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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7)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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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봉암에 위기감 느낀 이승만 “평화통일 주장은 범죄야” 간첩몰이로 진보당 일망타진

■ 화근이 된 조봉암의 216만표

일명 ‘조봉암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진보당 사건의 상류에는 제3대 대통령선거 결과가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대통령 이승만의 장기 집권 시나리오가 보인다.

이승만은 제헌 국회에서 간접선거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친이승만계의 원내 의석은 크게 감소되었다. 이승만은 국회 간선으로는 대통령 재선이 어렵다고 보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시도한다. 온갖 정치폭력과 위법이 난무한 ‘부산정치파동’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노리는 이른바 ‘발췌 개헌안’이 기립표결로 국회에서 가결된다. 6·25전란 중의 피란 수도 부산에서 자행된 이 위헌적인 직선제 개헌 덕분에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된다.(1952년 8월5일) 이때 조봉암은 79만여표를 얻는 데 불과한 군소 후보였다.

이승만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이 되자 이번에는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헌법의 ‘3선금지’ 조항을 ‘초대 대통령에 한해서는 적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른바 ‘3선개헌’을 감행한다. 의결정족수 미달의 개헌안을 ‘4사5입’이란 우격다짐으로 ‘가결’ 처리하고(1954년 11월19일)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1956년 5월15일) 당시의 제1야당 민주당은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절세의 구호를 내걸고 선전했으나, 신익희 후보의 불의의 별세로 좌절하고 말았다. 개표 결과, 이승만은 504만여표로 당선되었는데, 조봉암은 유효표의 30%를 넘는 216만여표를 얻어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 이런 결과를 이승만의 장기 집권에 적신호로 분석한 당시 여권에서는 조봉암을 불안하고 위험한 존재로 보기 시작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진보당 간부 일망타진, ‘평화통일정책’ 범죄시

마침내 1958년 1월12일 조봉암이 당수(위원장)로 있는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대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경찰은 이날 진보당 부위원장 박기출, 간사장 윤길중, 선전부 간사 조규희, 재정부 간사 조규택, 민혁당 간부 이동화 등을 검거 구속했다. 종로 2가에 있는 진보당 사무소도 수색했다. 정식 발표는 없었지만 조봉암과 부위원장 김달호도 검거된 것으로 알려졌다.(조봉암은 당 간부들이 검거된 사실을 알고서 경찰에 통고 후 자진 출두)

1월13일 정순석 검찰총장은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조봉암 진보당 위원장 등 일당은 북괴 김일성의 지령으로 남파된 간첩 박정호, 정우갑, 이봉창, 허봉희 등과 수차에 걸쳐 밀회하고, 동 당의 정강정책이 북괴가 주장하는 평화통일노선과 합치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북괴와 야합할 목적으로 평화통일을 추진해왔다.”

당국이 애초에 ‘평화통일론’을 문제 삼은 단서는 ‘중앙정치’라는 잡지(1957년 10월호)에 실린 조봉암의 글 ‘평화통일에의 길’이었다. ‘진보당의 주장을 만천하에 천명한다’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논문 중에 ‘북과 동등한 조건으로 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은 다소 불쾌할 수도 있으나 한 번 시행해보는 것도 결코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라고 한 대목이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인하고 국시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의 한 일간지에는 ‘평화통일이란 슬로건 그 자체를 문제 삼아 반국가적이라든가 국가보안법 위반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친 소견이다’라는 사설도 보였다.

■ 구속적부심 청구 기각에 이은 검사의 공소 제기

앞서 검거된 7명에 김기철, 신창균, 김병휘 등 3명을 더한 10명의 피의자들이 검찰에 송치된 후(1월21일) 신태악, 김춘봉 변호사 등 변호인단은 서울지방법원에 그들에 대한 구속적부심사를 청구했다. 그 청구서에서 변호인단은 ‘집권당이 북진통일정책을 내걸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국책이 될 수 없듯이, 반대당이 평화통일을 정책으로 삼고 있다고 해서 이를 국시에 반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보당의 평화통일정책은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거듭 강조한 유엔의 결의와도 부합할 뿐 아니라 1954년 5월22일 제네바회의에서 변영태 외무부 장관이 밝힌 통일방안과도 일치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변호인단의 위 청구는 재판부에 의해 기각되고 말았다.

2월8일 서울지검 조인구 검사는 구속된 피의자 10명을 모두 기소(1차)하였다. 그 요지는 (주로 조봉암이) 북한 괴뢰에 호응하여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하고, 북의 간첩 박정호와 접촉하였으며, 대한민국을 변혁할 목적으로 진보당을 결사, 공산주의자 정태영으로부터 ‘실천적 제문제’라는 강평서를 받아 소지하였는가 하면, 국제감시위원회 감시하의 총선거로 남북 대표가 참여하는 한국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국 군대의 철수를 주장하는 등으로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했다는 것 등이었다. 2월25일에는 공보처에 의해 진보당의 등록이 취소되어 불법화되었다.

■ 조봉암의 파란만장한 삶

여기서 우리는 조봉암이란 인물에 대하여 잠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아호가 죽산(竹山)인 그는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한 좌익 지도자였다. 강화에서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뒤 YMCA 중학부에서 공부하고 3·1운동에 참가했다가 1년간 복역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을 다니다 중퇴, 사회주의 이념에 입각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 중앙 간부, 모스크바 코민테른 총회 참석, 모스크바 공산대학 수학 등을 한 후 다시 귀국하였다. 국내에서 ML당을 조직하고 활약하다가 일경에 피검(1930년),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검거되어(1945년 1월) 수감 중 8·15해방으로 출감하였다.

그 다음 단계에서 그의 변신이 시작되었으니, 조선공산당 중앙 간부로 있다가 1946년 5월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한다. 그 후 우익진영으로 선회, 제헌 국회의원(인천·재선),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 장관, 국회부의장까지 역임하였다. 그리고 앞서 본 대로 두 번에 걸친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다. 한마디로 공산당과 결별하여 남한 단독선거와 이승만 정부에 참여한 정계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이런 전력을 가진 그가 자신을 각료로 중용했던 이승만에 의해서 간첩으로 몰렸으니, 그에 대한 탄압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의혹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 고문 수사와 ‘간첩 양명산’의 등장

사건은 계속 확대되어 앞서의 여러 사람 외에도 이명하, 김장성, 박준길, 김일사, 정규엽, 권대복, 안경득, 정규, 최희규, 김관국 등 진보당 관련자 20여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추가 구속되었다. 붙들려간 진보당 관련자들은 심한 고문을 받았다고 호소했다. 물고문, 몽둥이 구타, 잠 안 재우기 등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심한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것. 조규택, 김세룡 등은 수사관이 ‘밤중에 한강으로 끌고 가서 권총을 들이대고 물속에 처박았다’고 주장했다. 또 ‘조봉암을 공산당이라고 자백만 하면 풀어주겠다’는 회유도 있었다고 했다.(김이조, <법조 50년 야사>, 법률신문사, 2002)

감옥 안팎에서 이 사건의 공판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또 하나의 악재가 겹치게 되었으니, 북한 간첩이라는 양명산의 등장이었다. 1958년 2월20일 육군 특무부대와 검찰은 ‘조봉암과 접선한 거물급 대남 간첩 양명산(52세, 본명 양이섭)을 검거했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에도 몇 차례의 특무부대 발표가 거듭되면서 조봉암의 죄목에 간첩 혐의가 무겁게 추가되었다. ‘양명산은 6·25 전후 북괴를 10여차례 왕래하면서 북괴 중앙당 연락부장 박용길과 접선, 그의 지령을 받고 조봉암과 몇 차례 밀회한 일이 있으며, 그의 생활 일체를 돌봐주었다. 돈 500만환을 준 일도 있다.’ 이런 내용들이었다.

■ 조봉암, 사형 구형에 ‘간첩 무죄, 징역 5년’형

양명산은 진보당 사건과 병합 심리를 받게 되었는데 법정에서 그저 “네, 네, 했습니다”로 일관했다. 그것은 ‘양명산이 북괴의 지령에 따라 수십 차 남북을 왕래하면서 대남공작금을 진보당 정치자금으로 제공하고, 북괴가 지향하는 평화통일론을 추진시켰다’는 특무부대의 발표 내용을 그대로 시인하는 진술이었다. 조봉암의 말은 전혀 그와 달랐다. 그는 양명산과는 30년 전 상해 시절부터 친한 사이였으며, 그가 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기에 몇 번에 걸쳐 500만환을 조건 없이 얻어 썼을 뿐, 그가 북괴의 간첩이라거나 그 돈이 공작금인 줄은 전혀 몰랐다고 진술했다. 양명산은 또 “심정의 변화로 죽산 선생을 배신한 결과가 되었다”는 말도 했는데, “그게 무슨 뜻이냐”는 변호인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정체를 변호인 쪽에서 추적해 본 결과 그는 남파 간첩이 아니라 HID라는 미 정보국의 공작원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검사는 조봉암과 양명산에 대하여 사형을,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징역 12년 이상의 중형을 구형했다. 조봉암은 최후진술에서 “평화통일이란 국민의 뜻이다. 이 사건은 모두 정치적 음모이니 더 할 말이 없다”라고 했다. 7월2일 1심 선고 공판에서 유병진 재판장은 공소사실 중 가장 큰 논쟁거리였던 평화통일론과 간첩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다만 조봉암이 양명산으로부터 혁신세력 확대, 미군 철수운동 추진 등의 제의를 받고 금품을 수수했다는 점과 무기 불법소지 부분을 유죄로 보아 양명산과 같이 각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나머지 피고인 중 4명에게는 징역형의 집행유예, 17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공소유지를 담당했던 조인구 부장검사는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법정에서 총총히 걸어나갔다. 그런데 그 사흘 후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2014-11-23>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7)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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