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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선생은 30년대 저항문학과 70년대 민족문학 연결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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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백지연 씨, 염무웅 교수.

 

[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② 백지연이 묻고 염무웅이 답하다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첫 주자인 문학평론가 염무웅 교수와 백지연 씨가 회고한 60~70년대 문인운동의 전사와 작가회의 창립의 배경을 2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사진은 두 선후배가 지난 13일 서울 운니동 덕성여대 평생교육원에서 74년 자실 결성 무렵 사료들을 살펴보는 모습이다. 이어 소설가 이호철-유시춘, 시인 고은-김형수, 문학평론가 백낙청-임홍배, 시인 양성우-이승철, 소설가 박태순-전성태, 소설가 황석영-정도상,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신경림 ‘농무’ 황석영 ‘객지’는

70년 전후 문학사적 전환의 상징

김수영·신동엽 등 60년대 참여문학

70년대 민족문학으로 수렴됐지요

80년대 ‘딴따라’ 문화 만나면서

문학 내부에 질적 변화가 생겼어요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온 거니까

백지연(이하 백) 1977년 해직교수들이 모여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했는데요. 이와 관련하여 1978년 발족한 해직교수협의회 이야기와 교육지표 사건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염무웅(이하 염) 유신체제하에서 처음 해직된 교수는 김병걸, 백낙청 두 분이었습니다. 1974년 말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때문이었지요. 교수와 문인들의 정치참여가 활발해지자 박 정권은 대학사회를 더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1975년에 교수 재임용 제도를 도입하고 이듬해 새 학기에는 전국에서 300명 이상의 교수들을 해직합니다. 해직된 교수들로서는 무엇보다 대학이 병영화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보다 못해 77년 12월2일 구속학생 석방과 복교, 민주인사 석방과 공민권 회복을 요구하는 ‘민주교육선언’을 발표했지요. 그리고 20여명이 모여 해직교수협의회를 결성하여 활동합니다. 그 와중에 78년 6월27일 소설가 송기숙 교수를 중심으로 전남대 교수 11명이 유명한 ‘우리의 교육지표 선언’을 발표하지요. 그 때문에 전남대 교수들이 여러 분 해직되고 구속됐어요. 흔히 교육지표 사건이라고 부르는 게 그것인데, 80년 광주항쟁의 씨앗 하나를 뿌린 사건입니다.

백 그즈음 문단 내부에서도 어떤 경향에 특별히 연결되어 있지 않은 분들이 자실에 함께하게 됐구요. 요산 김정한 선생님과 자실의 인연도 그런 점에서 새삼 되짚어볼 만합니다.

1987년 6월항쟁의 민주화 열기를 타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그해 9월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출범했다. 부산에서 칩거해온 요산 김정한 선생이 의장을 맡아 기꺼이 참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염 김정한 선생은 꽤 오랫동안 작품활동을 쉬다가 60년대 중반 문단에 복귀하지요.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가집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도 카프에 가담하지 않고 조직 외곽에 있으면서 카프 노선에 동조를 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30년대의 저항문학과 70년대의 민족문학을 연결하는 살아 있는 고리가 김정한인 셈입니다. 또 하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70년 전후에 일대 문학사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전환이 뛰어난 작품의 생산으로 표현되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신경림의 <농무>와 황석영의 <객지>같은 작품의 발표는 전환의 징후이고 하나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60년대의 김수영, 신동엽, 이호철, 최인훈 등의 문학과 더불어 해방 전 세대인 김정한의 교량적 구실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백 식민지 시대의 저항문학과 해방 후 민족문학의 연속성을 파악하는 의미에서 김정한의 소설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이 깊이 와닿는데요. 염 김정한만이 아니지요. 나는 우리 문학사에 대한 평가가 많은 부분에서 왜곡되어 균형을 잃고 있다고 봅니다. 카프의 역사적 위상도 그런 사례예요. 카프를 한편으로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 극복해야 하는데, 그냥 무조건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비판 또는 부정하거나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 기계적으로 연구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당대의 사회 현실과 관련지어 카프에서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극복할 것인가, 그러한 점이 역사적으로 규명되어야 할 텐데요. 반면에 사회 현실의 문제와 절연된 자폐적 공간에서 자기 예술의 세계에만 칩거한 순수주의 문인들에게는 과잉해석이 이루어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과 문학 간에 어떤 상호침투가 이루어졌는지 작품을 토대로 밝히는 일일 텐데요.

1974년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족식 때 발표한 ‘자유실천 101인 선언문’의 원본. 당시 시인 양성우가 밤새 등사원지에 철필로 글씨를 쓰고 등사기를 긁어 인쇄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백 선생님께서는 60년대 현장에서 벌어졌던 문학의 현실참여를 둘러싼 비평적 논쟁들이 그 당대보다는 70년대에 와서 풍요로운 창작 성과로 연결되었다고 보시는데요. 이 지점에서 문인들의 현실참여 운동이 지니는 역사적, 문학사적 의미를 종합적으로 짚어보았으면 합니다.

염 우리가 글쓰는 사람으로서 작가회의라는 단체의 구성원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숙고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작의 노고를 감당하는 것은 단독자로서의 개인이지만, 그는 사회에서 절연된 존재가 아니죠. 고독한 창작의 순간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 개인의 인생이 총체적으로 투영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 복잡한 얽힘을 명징하게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이 요구하면 거리에 나가 데모를 하거나 성명서를 읽거나 그밖의 양심의 명령에 따른 실천행동을 안 할 수 없는 게 이 시대의 작가지요. 하지만 그런 활동 중에도 그 자체가 창작과는 구별되는 일이라는 자의식을 늘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운동의 순결성과 지속성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60년대에 김수영, 신동엽, 최인훈, 이호철 등 뛰어난 작가들이 활동했고 70년대에 들어와 고은, 신경림을 비롯해 황석영, 김지하, 조태일, 조세희, 윤흥길 등의 좋은 작품이 나왔는데, 그 작품들이 어떤 조직이나 단체활동 때문에 나온 건 아니지요. ‘자실’부터 작가회의까지 40년의 활동과, 이런 좋은 작품들의 생산을 연결지어 어느 것이 원인이고 어느 것이 결과라고 할 순 없다는 뜻입니다. 문학도 운동도 그 뿌리는 현실이에요. 다시 말하면 현실의 변화와 민중 역량의 성장이 작품으로도 표현되고 현실 운동으로도 나타났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문학과 현실 간의 관계에 비대칭이 발생할 수 있지요. 80년대는 문인들의 사회적 발언이 뜨겁고 거센 시대였잖아요. 그런데 그 시대의 작품들은 발언의 강도에 비해 예술로서는 허술한 데가 너무 많아 보여요. 이게 무얼 의미하는가. 운동이 문학을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에요. 다른 말로 관념이 예술 위에 군림하려 했기 때문이지요. 작가란 자유로운 정신 속에서 마음껏 글을 써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거예요. 문학과 예술이 계획에 따라 생산될 수는 없습니다. 운동의 틀이나 외부적 이념에 얽매인 작품은 결국 언젠가는 휴지통으로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감하기 어려운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백 87년 9월17일 자실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고 이후 선생님께서는 93년부터 3년간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공동의장과 이사장을 맡아 직접적인 사업과 행정에 관여하셨는데요. 염 88년 말에 황석영, 김용태, 임진택, 문호근, 이애주, 영화감독 이장호, 정지영 등이 주도한 연대조직이 민예총의 이름으로 결성되었지요. 내게는 민족문학위원회 위원장이란 직함이 맡겨졌어요. 이후 내가 주도해서 세미나를 열고 민족미학연구소를 만들고 92년 문예아카데미를 개설했지요. 이어 93년 9월에는 민예총이 사단법인으로 전환합니다. 민예총의 예에 따라 작가회의도 얼마간의 진통 끝에 95년 사단법인이 됐지요.

돌아보면 5년 남짓한 민예총 경험을 통해 나는 인접 장르의 예술가·활동가들과 많은 접촉을 하면서 여러 가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가 원칙적으로 혼자 하는 작업이라면 전시와 공연은 창작자뿐 아니라 미적 감각을 지닌 사람들의 협동작업·공동작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어요. 6월항쟁 같은 운동의 고조기에 문학보다 미술이나 연극, 노래가 전위적 구실을 맡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점에서 80년대 이후 문학이 이른바 ‘딴따라’들의 노는 문화를 만나면서 자기 내부에 질적 변화가 생긴 측면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골방에서 광장으로 나온 거니까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 민예총이 급전직하 추락한 것은 이유 여하를 떠나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것은 건강한 민중예술의 퇴출을 뜻하는 현상이니까요.

2005년 북녘서 연 작가회의는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2005년 7월20~25일 북한 평양과 백두산·묘향산 일대에서 분단 이래 최초로 성사된 남북작가대회는 작가회의를 비롯한 문인들이 89년 이래 추진해온 통일문화운동의 한 정점이었다. 사진은 그해 7월23일 새벽 백두산 꼭대기 장군봉 아래 개활지에서 남·북·동포 문인 등 150여명이 천지를 등지고 동쪽 개마고원 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있는 순간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백 작가회의 이사장을 맡으실 때 가장 큰 일은 ‘남북작가대회’ 개최였을 텐데요. 개인적으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염 남북작가대회는 작가회의의 긴 역사에서도 가장 빛나는 업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2005년 7월20일부터 평양에서 사흘, 백두산에서 하루, 묘향산에서 하루, 이렇게 지내면서 북녘 작가들을 만나 함께 식사하고 토론하고 교류한 것은 그 사실 자체가 굉장한 역사입니다. 당시 김형수 사무총장이 작가대회의 성사를 위해서 엄청 수고를 했어요. 그런데 대회에 참여한 남쪽 작가들 일부는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것보다 사실은 북한이 어떤 곳인가 궁금해서 동행했을 거예요. 그래서 기대와 다르다고 실망한 이들도 적지 않았지요. 어떤 점에서 그건 당연한 반응입니다. 관광하듯 가면 실망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뜻을 가지고 간 사람들에게는 북녘땅을 밟는 것, 북녘 하늘을 보고 그곳 공기를 숨쉬는 것, 그리고 북녘 작가들과의 만남 자체가 너무나 귀중하고 감격스러웠어요.

또 잊을 수 없는 것이 ‘6·15민족문학인협회’ 결성이지요. 2006년 10월29일부터 30일까지 금강산에서 남북 작가 100여명이 모여 저녁엔 시낭송을 하고 다음날 오전에는 협회 결성식을 했어요. 남쪽에서는 염무웅, 신세훈, 임헌영, 정희성 등이 회장단이었고 북쪽에서는 김덕철, 장혜명 등이 대표로 왔지요. 홍석중, 오영재 등 이름있는 문인들은 예고와 달리 오지 못했고요.

그런데 그때 무척 곤혹스러웠던 게 금강산으로 떠나기 직전 북한에서 핵실험을 한 거예요. 가느냐 마느냐로 고민되는 상황이었지요. 결국 가기로 결단을 내리고 무사히 다녀왔어요. 얼마 뒤 이 6·15민족문학인협회 명의로 <통일문학>이라는 잡지도 3호까지 냈어요. 남북의 편집위원들이 상대쪽 작가들 작품을 바꾸어 읽고 작품집을 만들었지요. 김형수와 정도상이 편집회의를 위해 여러 번 개성에 다녀왔고 나와 김재용 교수도 두어 번 갔었어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마지막 호를 냈고 그 뒤로는 그런 만남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됐습니다.

백 마지막으로 작가회의 40돌을 맞아 선생님께서 글을 쓰는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

염 자실이 출범하던 40년 전과는 세상이 너무 달라져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다른 세상에서는 다른 삶의 길을 찾아야 하리라 봅니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세상을 향해 하는 작업이잖아요? 바로 그 지점에 작가회의 같은 공공 활동의 독특한 위상이 있는 거겠죠. 앞으로 다시 40년이 흘렀을 때 여전히 작가회의라는 단체가 있을지, 물론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요. 요즘 같은 캄캄한 시대가 계속된다면 당연히 있어야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그건 너무도 암담한 미래입니다. 나는 우리 작가회의가 현실에서 역사로 옮겨가게 될 해방의 날을 학수고대합니다. 그날을 위해 우리가 능력껏 헌신해야 하고요. 그런 뜻에서 억지로 희망이란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내 말을 끝내지요.

<2014-11-23> 한겨레

☞기사원문: 김정한 선생은 30년대 저항문학과 70년대 민족문학 연결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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