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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본 맹아싹튼 광장시장에서 전태일 분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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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7) 동대문·동묘·광장시장·동대문운동장·국립중앙의료원



▲ 동대문~장충동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동대문~장충동 구간


졸지에 가장 오래된 대문이 되어버린 <흥인지문(興仁之門)>, 속칭 동대문


이제부터 <종로구>에 건설된 성곽을 벗어나 <중구>에 건설된 성곽을 따라 <광희문>, <숭례문>등을 거쳐 처음 출발했던 <돈의문>까지 가기로 하자. 물론 종로구와 중구를 나누고 있는 경계는 청계천이기 때문에 청계천 이북에 있는 <동대문>은 여전히 종로구에 속해 있다. 하지만 사대문을 기준으로 보면 흥인지문과 돈의문 이남이 중구에 속하기 때문에 편의상 사대문을 기준으로 종로구와 중구를 나눈 것이다.


현재 사대문 가운데 동대문이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건축된 형태로 보존된 유일한 대문이다. 동대문도 일제 강점기 교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돈의문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한양으로 진입할 때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각각 두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이 입성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살아남게 된 것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남대문과 동대문이 각각 국보1호와 보물1호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2008년 2월 남대문이 화재로 문루 전체가 소실됨에 따라 졸지에 동대문이 가장 오래된 대문으로서의 지위를 물려받게 된 것이다. 동대문은 다른 대문과 마찬가지로 조선 태조 때 건설되어 여러 번 중수를 거쳤고, 마지막 중수를 한 것이 고종 때이다.



▲ 숭례문의 화재로 졸지에 사대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대문이 된 <숭인지문>. 2014년 10월 현재 대문 밖 옹성을 수리하고 있는 모습. [사진-유영호]


한편 동대문은 한양성 내사산가운데 좌청룡인 낙산이 가장 낮고, 또 동대문일대는 청계천의 물이 빠져 나가는 곳으로 지대가 낮아서 이를 보완하기 위한 물리적, 관념적 여러 조치들이 취해진 대문이다. 먼저 동대문의 정식명칭은 정도전에 의하여 흥인문(興仁門)이라 지어졌지만 낙산의 허한 기운을 보완하기 위하여 용처럼 생긴 ‘갈 지(之)’를 넣어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다른 대문이 석자의 이름을 갖은 것과 달리 넉자의 명칭을 갖게 된 것이다. 또 이러한 관념적 보완 외에도 유독 동대문은 성 앞의 또 다른 작은 성곽인 옹성(甕城)을 갖고 있다. 이는 동대문 지대가 낮아 청계천이 범람할 때마다 물에 잠기는 것에 대한 보완책이다.


한편, 이곳 동대문 바로 옆 <동대문관광호텔> 앞에 <경성궤도회사 터>라는 표석이 있다. 1930년부터 1961년까지 운행되었던 협궤전차로 이곳 동대문에서 뚝섬과 광나루까지 운행되었던 전차의 종점이다. 당시 이 전차는 승객은 물론 서울로 집중되는 물류를 크게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이 노선은 지금 이 표석이 있는 동대문관광호텔에서 출발하여 숭인동, 신설동을 거쳐 청계천을 가로질러 상왕십리를 지나 지금의 지하철 2호선 구간을 계속 따라가다가 광진교부근 광나루에서 멈췄다.



▲ 동대문 옆, 동대문관광호텔 앞에 위치한 <경성궤도회사 터>를 알리는 표석. [사진-유영호]


본래 이 기동차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군량미와 부식, 그리고 각종 군수물자를 운동하기 위해 가설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해방 후 물자와 승객을 태우는 교통수단으로 변신하여 서민들의 애환을 싣고 달리다 1961년 폐쇄되었다.


이 전차의 종점인 성동구일대는 본래 조선시대에도 물류의 중심이었다. 한강변의 뚝섬, 두무개(두모포) 등의 나루엔 강원도 등지로부터 목재와 땔감이, 충정도, 경상도 등지로부터는 식량과 잡화가 몰려드는 등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관문역할을 하였던 곳이다. 뿐만 아니라 왕십리에서 뚝섬에 이르기까지 각종 채소를 키우는 밭이 널려있어 한양으로 부식을 공급하던 공급처이기도 했다.


중국귀신 관우의 사당, <동묘>


동대문에서 성 밖의 동쪽 신설동 방향으로 약 800미터 앞에 <동묘(東廟)>가 있다. 지하철역 이름으로 <동묘앞역>이 있어 이제는 사람들에게 무척 익숙한 명칭이다. <동묘>는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약칭으로 이곳은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립 된 것(1620년)이 아직까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당시 선조는 <남관왕묘>도 설립하였지만 이것은 6.25전쟁 중 상당부분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그 일대가 재개발 되면서 1979년 현 위치인 동작구 사당동 180-1로 이전하며 일부 복원하였다. 하지만 전혀 관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한편 이 동묘와 함께 임진왜란 후 명나라의 요구로 건립된 제단(祭壇)은 홍제원 근처의 <민충단(愍忠壇)>도 있다. 이것은 명나라 군사를 위한 제단이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이처럼 명나라를 위한 제단이 도성밖에 설치된 것은 도성 안에는 왕실관련 제사기관이 종묘와 사직만이 들어 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동묘>는 중국의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다. 우리나라의 신도 아니고, 실존인물도 아니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요청으로 지어진 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진-유영호]


관우는 명나라 때 공자와 더불어 신격화된 것이다. 명나라는 공자 사당인 ‘문묘’와 관우의 사당인 ‘무묘’를 지어 제사를 지내며 숭배해왔다. 중국 한족의 문무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우리나라에서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셈이다.


동묘는 우리조상을 위한 사당도 아니며, 또 실제인물도 아닌 소설 속 상상의 인물을 모시는 사당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우리나라의 무신 치우천왕을 모신다는 사당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외국 무신 관우를 모시는 사당은 버젓이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치우천왕은 배달국의 14대 임금인 ‘환웅’으로 단군왕검의 조상이다. 이렇다면 오히려 이곳에 관우상을 치우고 우리의 무신 치우천왕을 모시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조선 자본주의의 맹아 <광장시장(廣藏市場)>, 그 굴절의 모습


동묘에서 다시 광화문방향으로 발길을 돌려 종로를 따라 예지동으로 가보자. 여기서 흔히 TV방송을 통해 맛집 소개프로그램이 자주 나오는 <광장시장>을 만나게 된다. 광장시장은 1905년 개설되었다고 하지만 이곳은 본래 조선 3대 시장의 하나였던 <배오개시장>이 서던 곳인데, 1905년 11월 광장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광장시장>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곳을 그저 시장하나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곳에 설립된 광장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민족자본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 일제 강점기 청계천 아래 일본의 상권에 대항하여 순수 국내자본으로 설립된 <광장시장>. 지금의 동대문상권을 최초로 형성시킨 곳이지만 요즘 일반인들에게는 맛집 골목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사진-유영호]


배오개는 이현(梨峴)의 우리말 표기로, 조선 중기 이후 육의전을 포함한 시전이 있었던 종로의 변두리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전란과 기근으로 도성에 몰려든 난민들이 채소를 길거리에 늘어 놓고 팔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시장이다. 이들은 특혜를 받고, 관청과 연결된 시전상인들과 달리 모두 노점상이었다. 하지만 금난전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아 이곳에 거대한 상권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어물전을 주로 취급하는 남대문일대의 칠패시장나 과일을 주로 취급하는 무교시장과 달리 이곳은 채소를 주로 취급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전국적인 유통망을 형성해 나감으로써 노점상에서 도매상으로 성장하였고, 금난전권을 가진 시전상인에 대항할 힘을 키우게 되었다. 이러한 배오개상인들의 ‘도고’형태는 당시 조선사회가 자본주의 맹아기에 진입하고 있었음을 설명해주는 단서이기도 했다. 이들은 봉건지배층에 기대고 있는 시전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상공업과 유통, 물류를 촉진하는 신흥자본가로 부상했던 것이다.


어쨌든 조선시대는 시전과 난전을 불문하고 상권은 돈의문과 동대문을 동서 축으로 하는 종로상권이 그 핵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의 상권은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굴절되기 시작하였다. 즉 일제강점으로 광화문-용산을 잇는 남북의 위압적인 ‘직선 상징축’이 돈의문-동대문의 동서축을 압박하는 가운데 조선인 거리 종로는 그 발전이 왜곡, 굴절 당한 것이다. 이로써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일본인 거주지를 중심으로 주요 상권이 청계천이남 남대문과 진고개(명동, 충무로일대)에 형성된다.


이러한 외세의 자본침탈에 대항하기 위하여 몇몇 조선 상인들로 구성된 발기인(박승직·김종한·장두현·최익성 등)이 토지와 현금 십 만원으로 광장주식회사를 발족시켰다. 위치는 원래 청계천의 광교(廣橋)와 장교(長橋)사이를 복개하여 그곳에 만들고, 그래서 이름도 그 첫 글자를 따서 <광장시장(廣長市場)>이었지만 토목기술의 한계로 배오개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설립된 광장시장은 당국으로부터 허가 받은 최초의 근대적 시장이 된 것이다. 한편 광장주식회사의 발기인 가운데 박승직은 현재의 두산그룹 창업주이기도 하다. 그러니 두산그룹은 현재 우리나라 기업가운데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배오개에 이런 광장시장(廣長市場)을 만든 뒤 한글발음은 그대로 둔 채 ‘널리 모아 간직한다’는 뜻의 ‘광장(廣藏)시장’이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광장시장은 1950년대까지 농수산물을 취급하며 명실상부한 서울의 곳간 노릇을 했다. 또 전쟁 이후 구호물자나 미군부대에서 유출된 외래품을 거래하면서 일명 ‘구호물자시장’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승만정권 시절 이곳은 당시 정치깡패 이정재의 무대이기도 했다. 1950년대 광장시장 상점 사장이던 그는 상가연합회를 조직하고 폭력조직을 동원하여 동대문시장 황제로 군림했던 것이다. 이후 권력층과의 유착 속에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5.16군사쿠데타로 체포되어 사형을 판결 받았다. 그리고 판결을 받은 후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고 쓴 플래카드와 함께 백주의 시내에서 조리돌림 당하는 치욕을 당해야 했다.


 ▲ 5.16군사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 21일, 공수특전단에 의해 시내 한복판에서 조리돌림 당하고 있는 이정재(맨앞) 등 당시 깡패들의 모습. [출처 엔하위키미러]


이후 광장시장이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1960~70년대로 ‘나일론 시대’를 맞아 직물과 의류전문 시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청계천 마전교를 기준하여 대각선으로 평화시장과 방산시장 그리고 옆으로 동대문종합시장 등이 의류, 패션사업 중심지를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광장시장 덕인 셈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1980년대 들어 국가가 신자유주의경제체제로 변화되며 그 한파를 피해가지는 못했다. 절반 이상의 가게가 몰락했으며, 현재의 모습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현재는 대형 할인마트와 백화점 등 거대 유통회사들로 상권이 재구축되면서 이제 광장시장은 지난날의 위용을 잃어버린 채 먹을거리 시장으로 그 유명세만을 갖고 있는 전통시장으로서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광장시장은 사실상 우리나라자본주의의 발상지이면서 외래 자본에 의해 온갖 굴절을 겪어 온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앞서 지나온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설립자 전형필 역시 일제 강점기 이곳 배오개시장의 커다란 돈줄이었다. 그의 엄청난 돈과 피 끓는 민족애가 지금의 간송미술관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은 앞서 성북동에서 살펴보았다.


<오간수문>과 <버들다리>에 깃든 민초의 역사


<광장시장>을 돌아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 방향으로 오다 보면 처음 만나는 다리의 이름이 광장시장의 옛 이름을 따서 <배오개다리>이다. 그리고 청계천 새벽시장의 향수를 담아 지은 <새벽다리>를 지나 <마전교>를 지난다. 이 다리는 조선시대 말을 사고팔던 마전(馬廛)이 있던 곳이라 지어진 이름이다. 마전은 본래 좀더 서쪽 청계천 상류 쪽에 있었는데 말이 똥을 싸니 지저분해진다고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마전의 정확한 위치는 현 방산시장 앞으로 추정된다.


마전교에서 이제 ‘나비의 힘찬 나래 짓’을 뜻하는 <나래교>를 지나면 우리현대사의 아픈 과거를 담고 있는 <버들다리>가 나온다. 다리 명칭은 이곳과 <오간수문> 사이에 왕버들이 많았다고 지은 이름인데 너무 도식적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곳은 1970년 11월 13일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연 청년노동자 전태일이 분신한 곳으로 다리 위에는 그의 반신상이 놓여있다. 그가 외친 것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너무도 당연한 권리였지만 ‘고도성장’이란 자본의 논리 속에 이마저 짓밟혔던 현실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을 불사르며 세상을 향해 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웠던 것이다. 그 후 나름대로 한국 노동운동은 자리를 잡아 나갔으며 많은 권리가 신장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신자유주의체제로 경제구조가 바뀌면서 또 다시 노동자는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자살률 세계1위를 기록하는 현실이다.


▲ 청계천 버들다리 위에 세워진 <전태일반신상>, 분신한 곳의 정확한 위치는 청계천 남쪽으로 버들다리와 나래교 중간쯤이다. [사진-유영호]


버들다리 다음의 다리는 바로 성곽이 지나는 곳이다. 지금은 <오간수교(五間水橋)>라는 다리의 명칭이 이를 대신하고 있다. 이 다리는 본래 조선시대에는 없던 것이다. 이곳은 성벽이 지나가고 그 아래로 청계천의 물이 빠져나가도록 수문 5개가 설치되어 있던 오간수문(五間水門)의 자리이다. 그러나 1908년 성벽과 오간수문이 헐리고 이곳에 다리를 놓으며 오간수교라고 명명한 것이다. 다만 최근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이 오간수교 옆에 오간수문의 모형을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 청계천 오간수교 아래 모형으로 복원해 놓은 <오간수교>[사진-유영호]


한편 좀 전에 들른 광장시장과 오간수문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조선 명종 때의 백정출신 도적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양반과 부패한 관리의 집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의적’이라 불린다. 임꺽정은 간혹 한양 도성으로 숨어들어 북촌 양반마을의 물건들을 훔쳐 시전이 즐비한 종로일대에서 장물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관군의 추격이라도 당할라치면 좀 전에 들른 배오개장터 인근에서 귀신같이 살아졌다. 백성의 민심을 산 도적이다 보니 배오개 사람들이 그를 보아도 신고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더라도 날마다 허탕 친다는 것은 말이 안 될 노릇이었다. 알고 보니 임꺽정은 종로에서 배오개로 숨어들어 청계천을 따라 동대문 성곽 오간수문을 통해 수문 뒤편 갓바치마을로 몸을 숨겼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한양에서 임꺽정이 북촌-종로-배오개장-오간수문으로 움직였다니 최소한 배오개장과 오간수문까지라도 그의 길을 걸었다는 즐거운 생각이 든다.


역사의 변화, <경성운동장>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까지


오간수문에서 바로 옆에 있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옮겼다. 이 일대는 본래 조선시대 치안을 담당하던 하도감(下都監 : 현 동대문 문화역사공원)과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훈련원(訓鍊院 : 현 국립중앙의료원)이 있던 곳이다.


1925년 일제는 내선일체를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본의 동궁, 즉 훗날 일본의 왕이 되는 히로히토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하여 <경성운동장>을 건설하였다. 당시로도 상당한 규모의 운동장으로 2만 5천 명 정도의 수용이 가능했으며, 여기서 각종 근대스포츠가 시작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곳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운동경기가운데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아마도 조선의 양대 도시였던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경평축구대항전>이었을 것이다. 축구명문 경신중학 출신을 주축으로 구성되어 뛰어난 개인기를 자랑했던 경성팀과 당시 일본 최강의 와세다대학을 7:0으로 누른 숭실학교 출신들이 주축이 된 평양팀은 ‘평양박치기’로 표현되는 억센 서북기질에 몸싸움과 체력전에 능숙했다고 한다.


▲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서기 전까지 존재했던 동대문운동장. 이곳을 통해 근대스포츠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렸다. [사진-유영호]


이렇게 시작된 경성운동장에서 일제 강점기 마지막 날에 치른 행사는 무척 의미심장한 날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황손이자 의친왕의 아들 이우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이었다. 그는 조선독립에 대한 의지가 확고하였던 유일한 황족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일본여성과의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조선여성과의 결혼을 강행했으며,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일본에 가지 않으려고 설사약까지 먹으면서 버텼지만 그는 일본군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가 해방을 불과 며칠 앞두고 바로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이리하여 사망 1주일 뒤인 8월 15일 이곳 경성운동장에서 황족 이우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던 것이다. 묘하게도 그 시간은 일본의 히로히토가 항복방송을 한 직후였다. 일본의 ‘동궁’ 히로히토의 결혼기념으로 세워진 경성운동장에서 바로 그 히로히토가 항복선언을 하는 바로 그날 조선의 황손 이우의 장례식이 거행된 것이다.


한편 해방 후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을 뿐 그 기능과 역할을 경성운동장과 거의 유사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는 대규모정치집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1945년 12월에는 하루를 차이로 반탁집회와 찬탁집회가 열렸으며, 급기야 이듬해 5월 1일 노동절 행사의 경우 축구장에서는 우익집회가, 야구장에서는 좌익집회가 동시에 개최되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해방정국의 축소판이었다.


이후 남북 단독정권이 들어서고 이곳에서의 정치집회는 이제 완전히 반공궐기대회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스포츠분야에서는 70년대 고교야구와 박스컵 축구경기, 80년 프로야구의 시작 등을 거치며 스포츠의 메카로 성장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이곳 축구장과 야구장 등 여러 경기장은 서울시민들에게 수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1984년 잠실종합경기장이 건설되면서 <서울운동장>의 명칭도 한 지역으로 축소되며 <동대문운동장>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스포츠에서뿐만 아니라 여타의 행사에서도 그 자리를 빼앗기며 그야 말로 추억 속에서만 남게 되는 곳으로 전락하였다. 이런 과정을 겪다 결국 2007년 동대문야구장을 시작으로 헐려나갔고, 2014년 현재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서면서 더 이상 스포츠와는 무관한 공간으로 변했다. 이제 ‘동대문=스포츠메카’는 그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한편, 동대문운동장을 없애는 과정에서 막상 땅 위의 운동장을 헐어내고 땅 속을 파보니 상당한 역사의 흔적들이 묻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역사학자들의 권고로 처음 계획과는 달리 일부를 복원하는 등 몇몇 조치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동대문역사공원 입구의 <이간수문>의 복원이다. 이것은 앞서 본 오간수문처럼 물이 빠져나가는 곳인데 오간수문이 인왕산 및 백악에서 내려오는 청계천 물이 빠져나가는 곳이라며,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빠져나가는 출구이다. 이 거대한 성곽의 흔적이 땅 속에 묻혀있었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 동대문운동장을 파헤치면서 새롭게 발견된 <이간수문>. 그 너머 옛 동대문운동장은 이제 없어지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섰지만 옛 운동장의 조명탑 하나를 그 흔적으로 남겨두고 있다. [사진-유영호]


<경성운동장의 천재선수 이영민, 그리고 슬픈 그의 죽음>


우리나라 스포츠맨 가운데 이영민처럼 만능 스포츠선수는 아직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일제 강점기 <경성운동장>을 주름잡던 선수였다.


1923년 배재고보 시절 육상대회인 ‘경인역전 경주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더니 2년 뒤 연희전문시절 400미터 경기에서 조선 신기록으로 우승을 하였다. 같은 해 숭실대와의 정기전에서는 연희전문 농구선수로 출전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이영민이 스포츠 천재라는 것은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시 최고의 스포츠는 축구였다. 그리하여 잡지 ‘개벽’에는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불을 차라”는 논설이 실릴 만큼 축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조선의 각 도시마다 축구팀이 생겨났고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경기는 조선의 양대 도시인 경성과 평양을 번갈아 가며 맞붙는 <경평전>이었다.


1929년 제1회 경평전에서 평양팀의 우승으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경성팀은 1930년 최강의 멤버를 꾸려 경성운동장에서 2차 경평전을 맞이한다. 이때 활약한 선수가 다름 아닌 이영민선수이며 결국 경성팀의 승리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본래 축구에도 소질이 있어 이미 1924년 배제고보 선수로 전조선축구대회에 나가 배제고보의 우승을 이끌기도 하였으며, 1933년에는 경평축구 정기전에 아예 경성축구팀의 감독으로 출전하기도 하였고, 해방 뒤에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초대감독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영민의 가장 빛나는 분야는 역시 야구였다. 연희전문 소속 야구선수로서 1928년 경성의전과의 경기에서 그가 바로 경성야구장 제1호 홈런의 주인공이다. 오늘날에도 전국 고고야구를 망라하여 가장 높은 타율을 올린 선수에게 ‘이영민 타격상’이 수여되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야구의 토대를 닦은 천재이며, 이후 일본 야구대표선수로 선발되어 미국 프로야구단과 경기에도 출전하여 미국의 홈런왕 베이브 루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적이 있을 만큼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 1934년 일본에서 열린 메이저리그 올스타팀과 전 일본 선발팀 경기에 차출된 이영민이 베이브루스와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 사진은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야구 명예의 전당에 보관되어 있다. [출처-엔하위키 미러]


이런 불세출의 스포츠스타에게도 문제점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술과 여자’였다. 결국 그의 방탕한 생활에 가정은 깨지고 이에 원한을 품은 셋째 아들 이인섭은 아버지를 증오하며 일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10여년이 흐르고 1954년 이인섭은 아버지의 돈을 노리고 다른 불량배 둘과 함께 강도행각을 벌이는데 이 과정에서 한 불량배가 쏜 총에 이영민은 숨지고 만 것이다. 물론 아들 이인섭은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기에 이 상황을 목격할 수는 없었지만 공동정범으로서의 살인죄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당시 언론은 이러한 사실을 대서특필하였고, 이영민의 전처랑 남은 가족들 역시 한동안 숨어 지내다 이인섭을 교도소에 내버려 둔 채 모두 미국으로 이민 가버렸다고 한다.


화려한 재능과 그 기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그의 삶을 알게 되는 순간 안타깝기 그지없다.


조선시대 하대(下垈), 군란의 현장, <훈련원의 터> 국립중앙의료원


조선시대 도성 안을 나누는 기준선은 종로와 청계천으로 한양을 남북으로 양분하였다.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크게 보면 청계천 이북이 종로구이며, 이남이 중구이다. 하지만 종로와 청계천은 거의 비슷한 위치에서 동서로 평행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특정한 것이 남북을 나누는 기준선이라 말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두 기준선을 중심으로 북쪽이 북촌을 이루며, 남쪽이 남촌이 되는 것이다.


황현의 《매천야록》을 보면 북촌, 남촌이란 구분 외에도 상대(윗대), 하대(아랫대)라는 말도 나온다. 상대(上垈)란 경복궁 서쪽 인왕산 아래지역이며, 하대(下垈)란 청계천 물이 빠져 나가는 곳 즉 동대문, 광희문, 왕십리일대가 이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 한양도성 내의 마을 배치도. [자료-유영호]


이곳의 거주민들의 성향을 보면 경복궁이나 창덕궁에 가까운 북촌은 노론지배층이 살았고, 궁궐에서 먼 남촌에는 벼슬하지 못한 남산골 선비, 남인계열이 살았다. 예컨대 <허생전>의 주인공 역시 이곳 남촌사람인 것이다.


한편 상대는 경복궁에서 일하는 아전들이 주로 살았으며, 하대는 군총이라 할 수 있는 하급관리들이 머문 곳이다. 동대문일대가 하대를 형성한 것은 당장 이곳 동대문역사공원일대는 조선시대 하도감의 자리였고, 국립중앙의료원 일대는 훈련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이곳 동대문일대는 군사적인 사건이 많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훈련원은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치르던 곳으로 이순신이 무과시험 중 말에서 떨어져 나무껍질로 다리를 동여매고 다시 말에 올라타 끝내 과거에 합격한 곳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이곳을 지날 때 상처 입은 다리를 동여매고 말을 타고 달렸던 이순신을 상상해 보는 것도 그의 후손으로써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 이순신장군이 말에서 떨어졌음에도 무과에 합격한 <훈련원 터>(현 국립중앙의료원). 지금은 위 사진 속 숲 쪽에 <훈련원공원>으로 이름만 남아 있다. 그리고 이곳 뒤편에는 미군 공병부대가 위치해 있다. [사진-유영호]


한편, 1882년 구식군대들에 대한 차별로 봉기한 <임오군란> 역시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구식군대는 나의 도성기행 첫 방문지, 서대문역 <서울적십자병원>에 있었던 경기감영으로 전 선혜청 당상 최보현을 처형하러 몰려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 훈련원은 1907년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으로 조선의 군대가 해산식을 거행한 곳이기 때문에 조선의 일제 식민지화를 연대별 별로 느낄 수 있는 좋은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반외세투쟁의 현장에 여전히 외국군이 자리하고 있다. 해방이 되며 일본군이 떠나고 그 자리에 미극동군 공병부대(U.S Army Corps of Engineers)가 들어 온 것이다. 인터넷 지도를 검색 해봐도 이 일대는 그저 건물모양만 나타날 뿐 어떠한 소개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내가 아는 한 아마도 사대문 안에 위치한 미군기지는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옛 훈련원 터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미극동군 공병부대. 사진 왼쪽으로 훈련원공원과 접하고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청계천과 접하고 있다.[사진-유영호]


사대문 밖 주한미군의 주요 근거지인 용산일대는 고려시대 몽골군을 시작으로 조선시대에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그리고 해방 뒤에는 미국군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 내나라 영토를 외국군이 차지하고 있기에 이태원(梨泰院)이란 지명도 배나무(梨)가 많아 이곳에 있던 역원(驛院)의 이름 이태원(梨泰院)에서 유래한다는 설보다, 외국군이 조선의 여성들을 겁탈하여 우리와 태(胎)가 다른 아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는 이태원(異胎院)이 더 진짜같이 들리는 지도 모르겠다.


수구문이었던 <광희문(光熙門)>일대의 변화


동대문일대는 이제 시내 한 복판으로 도시화되어 성곽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최근 <이간수문>이 발굴되며 그 옆으로 일부 성곽을 복원해 놓았다. 또 그 남쪽으로 <광희문>과 그에 이어지는 일부 성곽이 복원되어 도성의 흐름을 상상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



▲ 남소문의 역할을 대신하며 시구문이라 불렸던 <광희문> [사진-유영호]


이곳 광희문은 시구문(屍口門)이라 부르기도 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 성안에는 무덤을 쓰지 못했으니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쓰기 위해서는 도성 밖으로 나가야 했고 그 출구는 이곳 광희문과 서쪽의 서소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소문밖 아현동 일대는 남북으로 만리동고개와 대현동고개 사이에 나지막한 작은 고개가 있어 아현(兒峴) 또는 애고개, 애오개 등으로 불렸고, 그 이름답게 이곳에 아이들의 무덤이 많았다고 한다. 이처럼 본래 ‘아이 아(兒)’자로 쓰이던 것이 변하여 지금은 ‘고개 아(阿)’자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시구문으로 불리며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가 그 뒤 병자호란을 겪으며 피신할 때 강화도로 피신하기 위하여 이곳 수구문인 광희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도피하였다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남대문으로 갔지만 청나라군대의 빠른 진격으로 어쩔 수 없어 시체가 빠져나가는 문으로 조선의 국왕이 지나간 것이다. 아마도 조선 27명의 국왕가운데 시구문으로 출입한 국왕은 인조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 이 일대는 여전히 조선시대의 아랫대(하대)로서 사회적으로 차별받던 군총들이 주로 살았던 곳인데, 최근에는 이 일대, 특히 광희동은 중앙아시안인들이 촌락을 이루고 있다. 1990년 러시아와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의류도매상이 밀집한 이곳에 러시아오퍼상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이후 점차로 그 범위를 넓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와 몽골 이주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보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이곳에 몰려 산다는 것이 왠지 조선시대 차별 받던 군총들이 몰려 살았던 것 겹쳐진다.


이번 기회에 서울에 있는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서초구 반포4동의 서래마을은 프랑스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프랑스학교도 있다. 심지어 마을 뒤쪽 공원의 공식명칭조차 몽마르뜨 언덕이라고 지었다. 이밖에 일본인 마을은 용산구 동부이촌동에, 이탈리아와 독일마을은 대사관이 많은 용산구 한남동에 형성되어 있다. 또 오랫동안 우리나라에 살아 온 화교를 중심으로 차이나타운은 서대문구 연희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온 조선족의 연변마을은 구로구 가리봉동에 형성되어 있다. 한편, 동남아거리는 성동구 홍익동에, 이슬람거리는 이슬람사원이 있는 용산구 이태원동에, 네팔거리는 종로구 창신동일대에 각각 위치해 있다. 결국 서울에 사는 외국인 역시 부동산값에 따른 분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 서울시내 주요 외국인 마을. [자료-유영호]


최근 신자유주의 체제에 접어들면서 급속한 세계화가 이루어지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이 점차 다문화사회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이와 같이 여러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들이 연구, 수립되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서 일부 좌파지식인들의 다문화사회로 가는 가장 큰 걸림돌로 우리의 ‘민족주의’를 꼽는다. 이러한 경향이 제3세계 노동자들과 또 최근 늘어나는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한국에 정착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분석은 분명 잘 못된 것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민족주의는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로 전개되는 논리이다. 하지만 우리민족이 타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갖고 있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민족이 아닌 타민족 전체에 대하여 배타적일 때 성립하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과연 우리가 제3세계출신이 아닌 백인에 대하여서도 배타적인가?


간단한 사례로 이들 좌파지식인들의 분석이 그릇됨을 알 수 있다. 현재 다문화가정의 자녀들이 학교에서 한국학생들에게 소위 왕따 당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그리고 이런 것이 민족주의 때문이라면 제3세계출신 아동이나 그 혼혈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백인이나 백인혼혈아도 똑같이 겪는 문제일 때 성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울 서대문구 연희초등학교에는 2010년 4명의 미국학생이 재학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중 한 명은 학생들의 직접선거를 통해 당당히 전교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학생들이 백인학생들을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몇몇 학생들은 그들과 대화를 할 때 ‘안녕~!’보다 ‘Hello~!’라 인사를 나누며 영어로 대화하고 싶어 했다.


이 사례를 기준으로 보면 지금 우리사회가 다문화사회로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사대주의’가 문제이다. 사대주의란 ‘자기보다 강한 자에 대하여 굽실거리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보다 약한 자를 깔보는 것’이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사대주의적인 문화를 극복하는 것이 우리사회가 진정 다문화사회로 가는 지름길이 되는 것이다.


<2014-11-25> 통일뉴스


☞기사원문: 민족자본 맹아싹튼 광장시장에서 전태일 분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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