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 실록소설 ‘들꽃’ (16)] # 제4장 압록강을 건너다 ③
<들꽃> 해제 |
제목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 국화, 사군자의 하나로 절개, 지조를 상징한다. ⓒ 박도
황현의 절명시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전라도 구례 고을의 매천(梅泉) 황현(黃玹)은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네 수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와 짐승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이 나라가 망하고 말았구나.
秋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천고 옛일 돌아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 아는 사람 구실 어렵구나!
– 절명시 네 수 중 제3수
삼천리 금수강산은 경술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단박에 그 빛을 잃었다. 경북 선산군 구미 임은동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을 앞은 낙동강이 굽이굽이 흘러가고, 갯벌에는 갈대숲이 무성하여 바람이 부는 날에는 은빛갈대가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마을 아이들은 사시사철 낙동강 모래톱에서 뛰어놀기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하지만 정미년(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고종 황제가 강제 폐위당하고,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왕산 허위가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했다. 그 이후 일본 헌병이나 경찰들은 걸핏하면 동네에 나타나 의병대장 왕산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때부터 구미 임은동은 웃음소리를 잃은 적막강산으로 변했다. 아이들조차도 “일본순사 온다”는 말에 울음이 단박에 그쳤다. 1908년 왕산이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자 더욱 이 동네는 적막강산이었다.
▲ 왕산허위선생기념공원으로 변한 왕산가, 그때의 대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다. ⓒ 손현희 기자 제공
해외독립기지 건설
왕산 순국 후 일본 순사들이 임은허씨 족친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가는 바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왕산의 사촌아우 허민 등 집안에는 줄초상이 잇달았다. 그런 찰나 나라조차 망하자 왕산의 직계가족과 같이 의병활동을 했던 왕산의 손위 형인 성산(性山) 허겸(許?) 가족들은 더 이상 일제 군경의 등쌀에 견딜 수 없어 보따리를 꾸려 야반도주하다시피 만주로 망명했다. 이 일은 주로 독립지사와 점조직으로 내통하던 성산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은 그동안 숨겨오던 조선병합의 마각(馬脚, 본심)을 드러내자 독립지사들은 국권회복을 도모하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망명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들은 서북간도와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여 해외독립기지를 건설했다. 마침내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신민회(新民會)를 중심으로 애국계몽활동을 하는 인물들이 이 일에 앞장섰다. 이들은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박용만(朴容萬)·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이다.
이들은 서간도에 집단이주를 계획하고 조선 본토에서 뜻있는 다수의 인사들을 이주시켜 토지를 구매하여 촌락을 만들어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뒤 학교와 교회를 세우고, 나아가 무관학교를 세워 장차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담고 있었다. 그 첫 이주 대상자는 유류상종으로 의병 및 독립지사 가족이었다. 이에 서울의 이회영(李會榮) 집안, 안동의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의 집안·구미의 왕산 허위의 집안 등이 가장 먼저 서간도로 떠났다.
왕산 직계가족이 떠난 이후에도 일본 군경들은 남아 있는 임은 허씨 일족들을 못살게 굴었다. 일본순사들은 번쩍거리는 긴 칼을 차고, 한복 차림의 조선 사람을 보조원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온 동네를 휘저었다. 이들이 동네에 나타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무서워서 벌벌 떨며 숨기 바빴다. 안방 다락에도 숨고, 집 뒤꼍 대나무 밭에도 숨었다. 어린아이들은 미처 다락이나 뒤꼍에 피하지 못하고 방안 이불 속에라도 숨곤 했다.
일본 헌병이나 순사만 괴롭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조선 사람 가운데도 일본 군경에게 붙어사는 밀정들이 늘 왕산 일가들을 감시했다. 그런 감시 때문에 조금이라도 이상해 보이면 집안 사람들이 몇 명씩 헌병분견소나 경찰서에 붙잡혀갔다. 한번 붙잡혀 가면 며칠씩, 때로는 한 달 이상 감금되었다가 나오기도 했다. 결국 남은 일가들도 정든 고향을 등지고 서간도로 떠나기로 했다.
허형식 탄생
▲ 그 시절을 증언해준 허은(1907~1997) 여사.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을 남겼다. 후손 이항증 선생의 허락으로 이 작품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이항증
허형식(許亨植)은 1909년 11월 18일 시산(是山) 허필(許苾)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극(克)이었고, 호적에는 연(?)으로 기록돼 있다.
후일 만주에서 본격으로 항일전선에서 활약할 때는 ‘허형식’이란 이름을 썼고, 또 ‘이희산(李熙山)’이라는 이명(異名)을 쓰기도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키도 매우 크고 튼튼한 체질인데, 학업을 게을리 하여 부모의 속을 썩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공부를 하지 않는 아들 문제로 큰 걱정을 하면 집안 어른들은 “황우는 무식해도 영웅이 되었다”고 하면서, 문약한 선비가 되는 것보다 강직한 무장이 되는 게 잃어버린 나라를 찾는 데 더 필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위로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는 그 말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허필은 꽤 많은 토지에다가 한약방까지 운영하여 비교적 살림이 넉넉했다. 그래서 행랑채에는 마 서방이라는 머슴 겸 하인을 두었는데, 마 서방에게는 부인과 2남 1녀의 자식이 있었다. 부인은 사곡 댁이요, 아들은 춘식, 춘돌이고, 딸을 춘옥이로 허형식과 동갑이었다.
어린 시절 형식은 두 살 위인 춘식이, 춘옥이, 그리고 큰집 은(銀) 누이, 큰집 종 삼월이 등과 왕산 당숙의 집으로 가서 소꿉장난을 하며 놀았다. 왕산가족들은 망국 이듬해 서간도로 망명을 갔기에 그 즈음 왕산 댁은 텅 빈 집이었다. 그 집은 큰기와 집으로 뒤뜰에는 대나무가 무성했고, 집안 곳곳에는 감나무, 가죽나무, 구기자나무, 대추나무, 팽나무 등 유실수도, 꽃나무도 많았다.
형식의 큰집 허규(許珪) 형은 그때부터 항일운동에 가담하여 늘 일제 군경에게 쫓기는 몸이었다. 아이들이 왕산 댁 마당에서 놀면 허규는 아이들에게 당부했다.
“순사가 와서 나를 찾으면 너희들은 모른다고 해라.”
그리고는 대밭으로 들어가 숨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2014-11-27>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아이들 울음도 그치게 한 말, “일본순사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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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독립투사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