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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 박혀있는 치명적인 친일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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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19) 남소문·조선신궁


▲ 남산 성곽을 따라가는 남소문~숭례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남산 성곽(남소문 ~ 숭례문 구간)


‘존재하였다는 사실’조차 잊혀진 <남소문>


옛 타워호텔 입구에서 창충단로를 따라 한남동 방향으로 약 200미터 남짓 언덕길을 올라가면 도로 좌측에 외로운 표석이 하나 있다. 이것이 <남소문>표석이다. 흔히 사람들은 <광희문>을 남소문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저 광희문은 남소문 역할을 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광희문이 이곳 남소문보다 약 60년 먼저 태조 5년(1396)에 건설되었지만 광희문을 남소문이라 하지는 않고 그저 수구문, 시구문이라 속칭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세조 1년(1457) 이곳 남산 아래 진짜 남소문이 건설된 것이다.


러나 이곳의 남소문은 수레가 다닐 수 없어 실용성이 떨어지고, 또 풍수지리설에 따라 이를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는 건의를 받아들여 건설된 지 12년 만에 예종 1년(1469) 폐쇄하게 된다. 그 후 이 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명종과 숙종 때에 여러 차례 제기되어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풍수사상에 의한 반대에 부딪혀 개통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숙종 때에는 붕당정치가 심화되었던 관계로 정권 획득을 위해 남인(南人)들이 문을 개통하자고 한데 반하여 서인(西人)들은 이를 반대하였던 것도 이채롭다. 이처럼 남소문은 비록 폐쇄는 하였으나 조선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일제 때 주초(柱礎)마저 없어졌다.


남산에서 바라보는 조선의 <경강(京江)>


남소문 터에서 다시 성곽 길을 따라 남산을 힘겹게 올랐다. 남산에서 성곽의 흔적을 따라 걷기는 쉽지 않다. 오르는 가운데 간혹 성곽과 겹쳐져 볼 수 있을 뿐 성곽 옆으로 길이 나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 남산의 남쪽부분은 특별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그저 간혹 소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한강의 전경을 감상하며 정상을 향해 묵묵히 걸어 올라갔다.


돈의문에서 시계방향으로 성곽순례를 시작하고 이제는 드디어 한양도성 내사산 가운데 마지막인 목멱산, 속칭 남산의 정상에 올랐다. 남산 정상의 <서울N타워>옆 전망대에 올라서면 서울 남측의 멋진 경관이 펼쳐진다. 이곳은 다른 성곽 길에서 보기 힘든 한강이 한눈에 펼쳐져 보인다. 인구 1천만의 대도시에 이렇게 커다란 강이 도시를 가로 질러 가다니, 세계 대도시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큰 강이다. 비록 영토는 작더라도 이렇게 큰 강이 흐른다는 사실에 놀랍고, 이곳을 우리의 수도로 선택한 조상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여기서 나는 조선의 한강, 즉 경강(京江)을 떠올리며 또 다시 상상을 통해 조선시대로 들어가 본다.


한강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조선의 수도로 결정하는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양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데다 서쪽이 바다요, 남쪽으로는 한강이 흐르고 있어 군사적 방어에 유리하였다. 또 당시 육로교통이 극히 빈약한 상태에서 조선팔도에서 올라와야 하는 조세곡(租稅穀)을 운반하는데 수로로써 가장 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남한강,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경기도 양평군 양수리)부터 서해 한강하구까지 모두 한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이 물줄기가 한성부에 들어서는 부분부터 <경강(京江)>이라 불렀고, 이 경강은 다시 그 이름이 세분되었다. 18세기 이전까지는 3강으로, 18세기 중엽에 5강으로, 18세기 후반에는 8강으로 불렀다. 그리고 19세기 접어들어서는 12강까지 세분되었다. 이는 경강일대가 상업중심지로 확대되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여기서는 현재까지도 가장 널리 알려진 3강에 대해서만 간단히 알아보기로 하자.


▲ 한강 나루터와 경강의 세부 명칭. [자료-유영호]


조선시대 광진나루부터 양화진까지는 통칭 <경강>이라 불렸으며, 이것은 다시 세분하여 상류부터 <한강>(한남대교~한강대교), <용산강>(한강대교~마포대교), <서강>(마포대교~양화대교)로 나뉘었다. 이렇게 경강이 나뉘며 각 나루 별로 그 역할과 기능이 달랐다. 그리고 각 나루가 위치한 곳과 명칭을 현재의 다리명칭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광나루(광진교), 두모포(동호대교), 한강진(한남대교), 서빙고나루(반포대교), 동작진(동작대교), 노량진(한강대교), 마포나루(마포대교), 서강나루(서강대교), 양화진(양화대교) 등이 주요나루였다.


참고로, 한양을 벗어난 지역이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또 다른 강 이름이 있다. 지금은 소위 ‘한강하구’로 불리는 곳이다. 이곳은 한강하류의 파주시, 김포시일대부터 강화의 끝 섬인 ‘말도((唜島)까지를 말한다. 하지만 본래 이 부분에 대한 우리의 지명은 ‘한강하구’가 아니라 ‘조상 조(祖)’를 써서 ‘조강(祖江)’이라고 불렸다. 본래부터 존재했던 이러한 명칭이 1953년 정전협정 문안작성 과정에서 ‘한강하구’로 표기되고, 또 그 후로 이곳은 군사시설화 되어 이용이 제한되면서 그 표현마저 한강하구로 굳어진 것이다. 전쟁의 흔적은 이처럼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있는 것이다.


남산 정상에서 상상하는 <봉화대>, <국사당>, <우남정>


남산에서 보이는 경치는 한양도성의 주산인 백악에서 바라보는 것 보다 더 수려하다. 북쪽으로는 인왕-백악-낙산이 펼쳐져 보이며 그 뒤로 북한산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을 뿐만 아니라 남쪽으로는 한양의 외수(外水)인 한강이 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런 자연환경과 더불어 경복궁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전국 조선팔도의 봉수가 최종적으로 이곳 남산봉수대에 전달되도록 하였다. 아차산봉수대와 무악산(또는 안산)봉수대가 각각 조선의 동쪽과 서쪽 상황을 남산봉수대로 전달하여 최종적으로 이곳에서 전국의 실시간 상황을 조정에 전달하였다.


평상시에는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경계에 접근하면 3개, 경계를 침범하면 4개, 경계에서 아군과 전투를 벌이면 5개의 불을 올리도록 하였다. 남산봉수대는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5개소가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현재 복원된 남산 봉수대는 《청구도》 등 관련 자료를 종합하고 고증하여 현 위치에 1개소를 복원한 것에 불과하다.


▲ 남산봉수대. 총 5개소의 봉수대 현재 1개소만 복원된 상태이다. [사진-유영호]


그리고 봉수대 옆에는 팔각정이 있으며, 옆에는 앞서 인왕산자락에서 보았던 <국사당>이 본래 있었던 자리라는 표석이 놓여 있다. 이처럼 수려한 경치 위에 놓여 있었던 조선의 사당, <국사당>이 일제에 의해 저 멀리 인왕산기슭으로 쫓겨 간 것이었다. 그 뒤 해방은 되었지만 이곳에 들어선 것은 쫓겨난 국사당이 되돌아 온 것이 아니라 이승만의 호를 딴 팔각정 <우남정>이 1959년 들어섰다. 하지만 1년 뒤 이승만을 몰아낸 4월혁명에 의해 우남정은 헐려 나가고, 1968년 새로운 팔각정이 들어 선 것이 지금의 팔각정이다. 이름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팔각정이 남산 정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국사당은 되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남산 정상에 위치한 이곳은 본래 <국사당>이 있던 자리였지만, 일제 때 인왕산자락으로 쫓겨 갔으며, 해방 뒤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이승만의 호를 딴 <우남정>이란 팔각정이 들어섰다. 하지만 4월 혁명 뒤 우남정은 헐리고 1968년 새롭게 만들어진 팔각정이 들어 선 것이다. [사진-유영호]


정상부분에서의 한양도성의 성곽은 남산 N타워 바로 아래 남쪽으로 축성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 남산N타워보다는 낮지만 또 다른 꽤 높은 철탑이 놓여 있다. 하지만 이곳은 통행금지구역이다. 바로 이것이 주한미군방송용 송전탑이기 때문이다.


황국신민화의 절정 <조선신궁>


남산정상에서 중턱으로 내려오면 분수대가 있고, 그 아래에는 안중근의사 동상이 서있다. 바로 이곳 분수대가 일제 때 <조선신궁>이 위치한 자리이며, 이를 통해 일제는 우리에게 일본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심으려 하였던 것이다.


조선신궁의 시작은 시내에서 신궁으로 진입하는 참배도로에서부터 시작된다. 남대문 사거리에서 남산 쪽으로 오르는 길(표참도 : 表參道, 현 소월로)은 이때 신궁 참배용으로 만들어졌으며, 하얏트호텔 쪽으로 이어지는 남산 순환도로 역시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엔 현 숭의여대 쪽 길을 동참도(東參道, 현 소파로), 하얏트 쪽 길을 서참도(西參道, 현 소월로)라고 불렀다. 당시 사진을 보면 남산이 온통 이 조선신궁을 위한 산이라는 느낌이 들만큼 거대한 규모이다.



▲ 위 지도는 미국 텍사스 대학에서 서비스되는 1946년 미군정시절 제작한 지도에 <조선신궁>부분만 눈에 띄도록 색칠하였을 뿐 당시 지도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리고 알아보기 쉽게 지금의 명칭을 일부 삽입하였다. [자료-유영호]



▲ 조선신궁 조감도.


그리고 조선총독관저인 <경무대>(현 청와대 자리)와 <조선총독부>, <경성부청>(구 서울시청)이 당시 하늘에서 보면 대일본(大日本)이라는 글자를 형상하고 있었는데, 이곳 조선신궁의 대문이 ‘하늘 천(天)’자를 형상하여 이 모두가 어울리면서 대일본천(大日本天)이란 글자를 이룬다. 이리하여 조선의 한양도성은 당시 대일본제국을 하늘처럼 떠받들어야 하는 곳으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인들은 그곳에 모셨던 자신들의 신을 하늘로 보내는 승신식을 거행하고 그곳에 모셔진 신물(神物)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등 스스로 폐사시켰다. 이후 이곳에 있던 건물 등 모든 시설은 철거되었지만 아직도 남은 것이 있다. 현 서울시중앙교육연구원 건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바로 조선신궁으로 올라가는 여러 계단가운데 하나이다. 흔히 이 계단은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드라마 속에 나와 ‘삼순이 계단’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런 슬픈 역사가 담긴 곳이다. 이뿐 아니다. 이곳 남산공원은 아니지만 용산고 옆의 일명 <108계단>(용산동2가 1-1134)는 당시 그 위에 만들어진 <경성호국신사>(용산동2가 1-1485일대)참배를 위하여 만들어진 계단이다.

▲ TV드라마 속의 촬영장소로 일명’삼순이 계단’으로 널리 알려진 이 계단이 일제시대에는 조선신궁으로 참배하기 위하여 만든 계단이라는 슬픈 역사가 담겨있다. [사진-유영호]


해방 뒤 철거된 조선신궁의 자리는 그 뒤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이승만 80회 탄신’을 경축한다는 의미로 자신의 동상을 설치한 것이다. 그 크기는 본체와 기단을 합쳐 총 25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동상이었다. 현 광화문 이순신동상이 17미터인 것을 생각하면 그것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신궁 터의 변화모습. 1925년 일제시대 모습 → 1952년 전쟁 중 모습 → 1958년 이승만동상이 들어선 모습 → 1971년 어린이회관 앞 분수대로 바뀐 모습. [출처-한양도성박물관 영상 캡처]


하지만 이 동상도 결국 4월혁명 뒤 철거되고 이곳에 분수대가 만들어져 있다. 예로부터 역적의 집은 폐가성지(廢家城池)하였다. 즉 그의 집을 없애고 그곳에 연못이나 가축의 우리로 만들었다. 계유정난으로 역적으로 몰린 정도전의 집(현 종로구청 자리)이 말을 기르는 곳으로 쓰였던 것처럼, 이곳 조선신궁과 이승만동상이 있었던 자리에 분수대를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닌지 상상해 본다.


최근 뉴라이트 역사관이 등장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재조명이 강요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내쫓았을 뿐만 아니라 헌법전문에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으로 받아 안은 4.19혁명을 부정해야 가능하다는 논리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도 상식적인 이러한 논리를 부정하고 만약 이승만으로부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찾게 된다면 아마도 현재의 국립묘지처럼 친일파와 독립운동가가 함께 묻히는 꼴이 될 것이다.


죽어서도 친일파에게 추모당하는 <안중근>


조선신궁이 철거되고 이승만동상이 들어섰다가 1960년 4월혁명으로 또 다시 철거된 뒤 오랜 동안 빈터로 남겨졌던 옛 조선신궁의 터에 일본제국주의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의사의 동상을 1974년 건립하였다.


또 안중근의사 동상 뒤편에 <안중근기념관>이 있으며 이곳에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단체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남산은 정말 그야말로 뒤죽박죽 그 자체이다. 좀 전에 남산정상에서 느꼈던 혼란스러운 정체성은 여기서도 계속된다.


안중근의사숭모회는 안중근을 추모하는 단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단체는 1963년 친일파 윤치영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해 일본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까지 한 인물이다. 게다가 그의 형제들은 모두가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는가 하면 일본군 기병 중장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설은 초대 이사장에 그치지 않는다. 이후 이사장들도 이은상, 백두진 등 친일시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로 이어져 왔다. 심지어 황인성은 진성친일파 박정희에게 충성하여 5.16군사쿠데타 직후 요직에 나가면서 이후 민정당과 민자당 그리고 신한국당의 국회의원을 지닌 군 출신이다. 그리고 현 회장 안응모는 5공 때 치안본부장과 이후 안기부1차장과 2차장을 지내더니 전두환 독재의 꽃인 내무부장관 출신이다. 이들 모두가 안 의사의 정신에 부합한다기보다는 권력의 양지만을 쫓은 사람이다. 결국 이러한 인맥구성에 의하여 안중근의사의 동상은 친일미술가의 대명사인 김경승에 의하여 만들어졌고, 이것이 여론화되면서 2010년 재 건립하기까지 하였다.


▲ 친일조각가 김경승에 의해 제작되었다가 여론화되면서 2010년 재건립된 안중근의사 동상. [사진-유영호]


뿐만 아니라 숭모회의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인하여 기념관 들머리에 박정희전대통령은 ‘민족정기(民族精氣)’가 아닌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전당이라는 엉뚱한 휘호비를 남겼고, 지난 2003년 숭모회가 펴낸 《대한민국 안중근》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 전투상황도를 사용기도 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런 숭모회의 임원진구성을 문제 삼으며 또 다른 추모단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회장:함세웅신부)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국가보훈처는 안중근숭모회만 지원해주고 있다.


안중근의사의 동상이 처음에는 친일파 김경승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바로 아래 백범광장에 있는 김구동상에 대해서도 한마디 해야겠다. 김구의 동상은 여전히 친일파 김경승이 만든 것이 그대로 놓여 있다. 뿐만 아니라 동상 뒤편 좌측에는 친일파 이광수의 글로 밝혀진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이 새겨 있고, 우측에는 또 다른 친일파 이은상이 쓴 김구의 경력이 새겨 있다. 그리고 동상의 받침돌 우측에는 일본군장교였던 박정희의 글이 새겨져 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또 백범광장에서 남대문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김유신장군동상>이 있는데 이것 역시 김경승의 작품이다.


▲ 백범 김구동상의 동상은 김경승에 의해 제작되었을 뿐만 동상 뒤편에는 이광수의 ‘나의 소원'(좌)과 이은상의 김구약전(우)이 돌에 새겨져 있는 등 친일파들의 공동작품이라고 할 수있다. [사진-유영호]


친일미술가의 작품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감상하는 우리나라


안중근 동상 및 추모단체가 친일시비에 휘말린 것을 보면서 이번 기회에 친일미술가들이 해방 이후 어떻게 변신하며 우리의 삶 속에 침투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이를 알아보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으로 우리나라 화폐의 디자인을 보면 된다. 화폐란 일국의 국민들 모두의 손에서 하루도 떠날 날이 없는 일종의 ‘나라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폐가운데 인물로 형상된 것은 충무공 이순신이 들어있는 100원짜리 동전부터 지폐로는 천원 권 율곡 이이, 오천 원 권 퇴계 이황, 만 원권 세종대왕, 오 만 원권 심사임당 등 총 5명의 인물이 들어있다. 이 다섯 명의 영정은 모두 국가로부터 공인된 표준영정에 따른 그림이다. 참고로 표준영정은 1973년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을 지정한 이후부터 2005년 12월까지 총 77명의 선현에 대한 영정을 국가가 지정하였다.

▲ 우리나라에서 현재 사용되는 화폐 중 인물이 등장하는 총 5가지 화폐는 모두 친일화가들에 의해 그려진 표준영정에 따라 만들어 진 것이다. [사진-유영호]


그렇다면 국가로부터 공인된 위 다섯 명의 표준영정을 그린 화가들은 누구인가? 충무공 이순신은 장우성, 율곡 이이와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김은호, 퇴계 이황은 이유태, 세종대왕은 김기창이다.


표준영정을 그린 미술가를 기준으로 보면 김기창, 장우성, 이유태는 모두 김은호의 제자들이다. 이들 모두는 친일행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특히 김은호, 김기창, 장우성은 《친일인명사전》사전에도 등재된 화가들이다.


친일파로서 김은호 개인의 이력은 물론이려니와 폭 넓은 일본채색화풍 수용과 제자배출은 우리 현대회화의 정상적인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고, 아직까지도 극복되지 못한 식민잔재로 남아 있는 형편이다. 최근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동상을 세우면서 표준영정에 따라 동상을 제작하라는 정부의 지시로 시끄러웠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매일같이 지갑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대한민국 화폐 속 인물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친일화가들에 의하여 그려진 영정이라는 사실이다.


가장 쉽고도 매일같이 마주쳐야 하는 화폐 속 인물을 비롯하여 이들 친일미술가들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선현 표준영정으로 채택된 것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선현명 작가명 지정년도 선현명 작가명 지정년도
이순신 장우성 1973 김정호 김기창 1975
세종대왕 김기창 1973 무열왕 김기창 1975
정약용 장우성 1974 문무왕 김기창 1975
강감찬 장우성 1974 유관순 장우성 1978
을지문덕 김기창 1975 윤봉길 장우성 1978
이이 김은호 1975 정몽주 장우성 1981
김유신 장우성 1975 신사임당 김은호 1986
조헌 김기창 1975      

<2014-11-30> 통일뉴스

☞기사원문: 남산에 박혀있는 치명적인 친일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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