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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치욕의 통감관저에서 공포의 중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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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20) 안기부 터·문학의집·남산한옥마을·한국의집



▲ 예장동, 필동 일대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예장동, 필동일대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관저 및 조선총독부


안중근기념관에서 일제 강점기는 조선신궁 참배를 위한 ‘동참로’라 불렸던 현재의 ‘소파로’를 따라 일제 강점기 일본의 본거지였던 중구 예장동방향으로 가보도록 하자. 그런데, 이곳을 향해 걷다 보면 가는 길 왼쪽에 <한양공원>이라 새겨진 돌이 있다. 이것은 본래 남산3호 터널 북쪽에 있었으나 터널공사로 이리로 옮겨진 것이다. 1910년 일본이 남산일대를 공원화하면서 개장식 때 고종이 보낸 ‘漢陽公園(한양공원)’ 친필을 새겨 둔 것이다. 하지만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제는 한양공원을 1918년 폐쇄하였다. 한편 이 기념석 뒤편은 현재 모두 정으로 쪼아 알아 볼 수 없는 상태로 보아 아마도 공원개장의 후원자명단 같은 것이 적혀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 1910년 도성 안 남산일대는 일제에 의해 <한양공원>으로 개원되었다가 이후 조선신궁을 건립하면서 1918년 폐쇄되었다. 사진 속 글씨는 고종 어필이다. [사진-유영호]


이렇게 한양공원 터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면 도로 우측에 숭의여자대학교와 애니메이션센터가 위치해 있다. 바로 이 일대는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구 조선통감부)가 1926년 경복궁 안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있던 곳이다. 또 서울애니매이션센터 앞 버스정거장에는 바로 이곳이 1921년 의열단 김익상에 의해 조선총독부를 향하여 폭탄이 던져진 곳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그런데 김익상은 정작 이곳에서 체포된 것이 아니라 그 뒤 6개월 후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를 암살하려다 실패하면서 그곳에서 체포되었다고 한다.

이곳 조선총독부의 옛터를 넘어 뒤편에 총독관저(한일합병 이전에는 통감관저)가 있었다. 원래 이곳은 조선시대 <녹천정>이란 정자가 있던 곳으로 일본이 이곳에 1885년 일본공사관을 지었다가 1905년 현 애니메이션센터 자리로 이동하고 공사관건물은 통감관저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현재 빈터로 표석만 남아있다. 이곳에 있던 건물은 1950년대에는 연합참모본부가 사용하는 등 1960년대까지 있었지만 중앙정보부가 이 일대를 사용하면서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르게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사라진 통감관저의 터를 찾은 것은 민족문제연구소였으며, 이들이 찾아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입구에 있는 수백 년 된 두 그루의 은행나무 때문이었다. 올라가면서 좌측 나무가 임진왜란 때 일본장수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가 말을 매어두었다고 선전되었던 나무이다. 한편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이곳에 표석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서울시에 제안하였지만 서울시는 이곳을 통감관저 터가 아닌 <녹천정 옛터>로 하고자 하였다. 아무런 역사적 의미도 없는 그저 조선시대 정자의 이름 녹천정으로 표시하여 무엇을 감추려 하였던 것일까?



▲ 남산 왜성대에 있던 조선통감관저. 입구 양 옆의 커다란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지금도 남아 있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진-유영호]


▲ 총독관저 건물은 사라지고 빈터로 남아 표석만이 이 자리의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최근 역사기행, 인권기행 등의 코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유영호]


이곳 조선통감관저에서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현재 이곳 표석에는 신영복교수의 글씨로 “일제침략기 통감관저가 있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와 총리대신 이완용이 ‘강제병합’ 조약을 조인한 경술국치의 현장이다.”라고 쓰여 있다.


더욱이 이때 이완용이 들고 간 황제칙유(勅諭)에 순종의 서명과 대한제국 국새(國璽)날인이 없는 등 최소한의 인준요건을 갖추지 못해 불법적인 식민조약이 맺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5천년 우리의 조국이 이렇게 하여 식민지로 전락하는 그 순간이 바로 이곳에서 자행된 것이다.


조선을 멸망시킨 데라우치는 8월 30일 바로 이곳에서 파티를 열며 “고바야가와, 가토, 고니시(임진왜란 때 조선침략에 앞장섰던 왜장들)가 세상에 있다면 오늘 밤의 달을 어떻게 보았을까?”라는 시를 읊었고 이에 대하여 총독부 2인자 정무총감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지하에서 깨워 펄럭이는 일장기를 보여주라’는 시로 화답하였다. 이처럼 이곳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치욕의 장소 그 자체이다.


참고로 1910년 조선이 일제에게 식민지로 변화하는 날 이완용과 함께 그곳에 간 사람은 우리에게는 신소설 <혈의 누>로 알려진 소설가 이인직이다. 그는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이완용을 대신해 8월 4일 일본에 가서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즈(小松綠)를 만나 한일합병을 교섭했으며, 그가 다리를 놓아 경술국치 6일 전 이완용은 통감관저를 방문하였고, 결국 8월 22일 불법적인 순종의 칙유를 들고 이완용과 함께 이곳에 와서 조선을 일본에 넘긴 인물이다. 이완용과 더불어 꼭 기억해야 될 인물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국어교과서에서는 이인직을 신소설 개척자로 칭송하며 또 그의 소설제목도 《피눈물》이 아니라 여전히 일본식 어법 그대로 《혈의 누(血の淚)》이다.



▲ 한일합병의 주도자 이인직의 신소설 《혈의 누(血の淚)》를’꼭 읽어야 할 명작’으로 소개(좌)되고 있으며, 영화(2005년 작)에서도 ‘피눈물’아닌 일본식 어법 ‘혈의 누’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유영호]


<통감관저의 터>로 불리는 이곳의 변화과정을 정확히 아는 것이 일본의 조선침략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본다.


먼저 일본공사관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후 1880년 사대문밖의 현 동명여중에 위치했지만 1882년 임오군란으로 불타고, 드디어 사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그 위치는 종로구 교동 친일파 박영효의 집(종로구 관훈동 301-1, 현 경인미술관)을 새로 지어 사용하였다. 위치는 현 천도교중앙대교당 바로 옆이다. 하지만 1884년 갑신정변 때 또다시 조선인들에 의해 불타버리자 1885년 남산 중턱 녹천정이 있던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공사관>에서 <조선통감부>로 명칭을 바꾼 것이며, 이후 1906년 조선통감부를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쪽에 새로 짓고 이곳은 통감관저로 사용했다. 또 1910년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면서 이곳의 명칭도 통감관저에서 총독관저로 바뀌게 되며, 한참 후인 1939년 9월 22일에 총독관저 <경무대>(현 청와대 자리)의 신축과 더불어 그곳으로 옮겨질 때까지 그 기능은 그대로 이어졌다.


따라서 이곳은 가히 식민통치자들의 본거지요 심장부라고 할만 했다. 총독관저가 경무대로 이사한 뒤 이곳은 소위 <시정기념관(始政記念館)>이라 하여 역대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안기부(옛 중앙정보부) 터>, ‘치욕의 남산’에서 ‘공포의 ‘남산’으로


통감관저가 있던 이 일대는 일제가 물러간 후 해방정국의 혼란과 전쟁을 거친 뒤 5.16군사쿠데타로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들어섰다. 이제 이곳은 ‘치욕의 공간’에서 ‘공포의 공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것’을 빼고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는 무소불의의 권력이 이곳에서 인간을 짐승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친일파정권에 의하여 만들어진 정보기관이라 그랬는지 역설적으로 중앙정보부가 처음 군대 퀀셋막사 몇 개로 처음 시작한 곳은 바로 경술국치의 현장인 통감관저 표석 바로 뒤 언덕으로 현재는 빈터로 남겨져 있다. 이러한 공간적 태생 때문인지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로 이어지는 불법체포와 고문 그리고 조작은 일본제국주의의 그것을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 현재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되고 있는 옛 안기부 본부 건물로 이곳에서 최종길 교수가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사진-유영호]


한편, 1996년 국정원이 현재 위치한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이곳 남산에 남아있던 그 흔적들을 지난 날 독일 아우슈비츠처럼 이곳을 ‘인권평화센터’로 활용하여 기억의 공간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시민단체의 주장이 있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현재 <문학의 집>으로 사용되고 있는 전 안기부장공관. [사진-유영호]


당시 본관이었던 유스호스텔을 중심으로 40여 채나 되는 건물들이 있었지만 많이 헐리고 몇 개 안 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마저 전혀 다른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어 과거의 흔적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그저 사전 학습과 그것을 이용한 상상 속에서 그려지는 모습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공간과 과거의 사용처를 현 <서울시 남산 제2청사>부터 움직이는 동선을 기준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경술국치의 현장이었고, 독재시대 고문과 야만의 공간이었던 이 일대는 이제 그저 기억과 학습 속에서만 존재하는 희미한 곳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지난 날 이곳에서 빼앗긴 것은 국권이요, 인권이지만 우리가 이러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의 기억마저 빼앗기고 말 것이다.


참고로 조선총독부와 안기부가 시대를 이어 존재했던 이곳의 동명은 예장동(藝場洞)이다. 본래 이곳은 조선시대 5군영 군사들이 무예를 연습하는 훈련장이 있었고, 그 훈련장을 무예장(武藝場)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줄어 예장(藝場)이라 불리면서 동명으로 채택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의 군인들이 훈련을 하던 곳에 일본군이 들어서고, 그 뒤 해방 후에는 독재정권의 비밀경찰이 이곳을 차지하고 있었던 암울한 역사의 공간이기도 하다.


조선헌병대의 터에 친일파의 가옥으로 꾸민 <남산 한옥마을>


남산 기행에서 빠뜨리면 안 될 곳이 또 한 곳 있다. 중구 필동이 바로 그곳이다. 먼저 필동(筆洞)은 조선시대 한성부 5부(部) 가운데 하나인 남부의 부(部)사무소가 이곳에 위치해 있어 부동(部洞) 이라 하였는데 이와 발음이 같은 음(音)을 빌려와 ‘붓골’이라 하였다. 그 후 ‘부(部)의 음’과 ‘필(筆)의 훈’이 서로 같기 때문에 붓골을 필동(筆洞)으로 표기한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소위 <남산 한옥마을>로 널리 알려졌으며, 일제 강점기는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던 곳이다.


당시 일제가 조선헌병에게 부여했던 일은 본토의 일본헌병과는 달랐다.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에 따라 경찰권이 일본에게 넘어갔는데, 일제는 민간인에 대한 경찰권을 헌병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즉 일본 본토의 헌병은 군사경찰을 주로 하는데 대하여, 조선에 주둔하는 헌병은 치안유지를 하는 경찰업무를 주로 하고, 이에 겸하여 군사경찰을 맡도록 하였으니 주종이 역전된 꼴이었다. 이것은 국내 항일투쟁을 억압하고, 일반인들의 봉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일반경찰보다 조직력과 기동력이 뛰어난 헌병이 적합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편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있던 이곳은 해방 후 수도경비사령부(현 수도방위사령부)가 차지하였다. 그러다 1991년 수도방위사령부가 관악구 남태령으로 이전하면서 서울시가 이곳에 1998년 <한옥마을>을 개장한 것이다. 식민지시대부터 최근까지 군사지역으로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던 이곳을 공원으로 변경하여 일반인에게 개방한 것이다.


남산한옥마을에 옮겨진 전통가옥 5채 가운데 친일파의 가옥 3채 [사진-유영호]


이곳 한옥마을은 조선시대 정원과 정각 들이 꾸며져 있으며, 우리의 전통적인 가옥구조를 보여주기 위하여 서울에 산재해 있던 전통한옥 5채를 옮겨 놓았다. 그런데 옮겨진 5채의 가옥 가운데 3채는 친일파의 가옥이라 아직도 일제 강점기를 못 벗어난 느낌이다. 친일파들이 이렇게 좋은 가옥에서 배부르고 등 따시게 산 것을 보면, 예로부터 “나라를 잃은 백성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조선의 백성이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시된 가옥 가운데 <관훈동 민씨가옥>으로 소개되는 곳은 대표적인 친일파 민영휘의 가옥이다. 처음에는 박영효의 가옥으로 소개되다 최근 고쳐졌지만 박영효 역시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민영휘는 한말 탐관오리의 대명사로 임오군란 때 그의 집이 부서지고, 갑오경장 때는 유배까지 갔던 자이다. 하지만 그는 일제 강점기 조선 제일의 부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이미지 관리를 위하여 휘문고등학교와 풍문여고를 설립하였다. 지금도 유명한 관광지인 경기도 남이섬을 그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으니 친일파의 끈질긴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옥인동 윤씨가옥>으로 소개되는 곳은 조선의 마지막 왕비인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로 알려졌으나 황후의 큰아버지인 친일파 윤덕영이 자신의 첩을 위하여 지은 별장 건물이다. 윤덕영은 장충단공원에 <박문각>을 건설하기 위해 ‘이토공추모회’에 참가한 사람이라는 것은 앞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이라고 소개되는 곳은 위 윤덕영의 동생이며, 순정효황후의 친정아버지인 윤택영의 재실이다. 이사람 역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으며, 헤픈 씀씀이로 부채를 쌓아 ‘채무왕(債務王)’이란 별명을 가졌을 만큼 식민지조선에서 방탕한 삶을 살아간 인간이다.


굳이 모양이 초라한 가옥이 아니어도 분명 이 땅에도 양심적인 부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어찌 하나같이 고르는 것마다 식민잔재가 가득 담긴 것들만 고르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이곳에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이나 간송 전형필 같은 사람의 집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박팽년, 일본정무총감 그리고 여운형의 흔적, <한국의 집>


한편 남산 한옥마을 입구에 위치한 <한국의 집>은 본래 조선 세종 때 집현전학자 박팽년의 집이 있었던 곳이다. 그 후 그는 단종복위 운동을 하려다 체포되어 회유를 받았지만 세조에게 다음과 같은 시로 화답하여 결국 사형당한 사육신가운데 한 명이다.


“여수(麗水)에서 금(金)이 난다고 해서 물마다 금이 나겠으며,


옥(玉)이 곤강(崑岡)에서 나온다고 해서 산마다 옥이 나겠느냐?


아무리 사랑이 소중하다고 한들 님마다 다 따를 수 있겠는가?”


이러한 박팽년의 충성심에 감복한 세조는 사육신을 사형에 처하면서도 그들을 가리켜 “당대의 난신(亂臣)이요, 후세의 충신(忠臣)이다”라고 하였을 만큼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이렇게 충절의 역사가 흐르는 이곳은 그 후 450년 뒤 조선이 나라를 빼앗기자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곳이 역사적으로 조명 받은 것은 바로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던 날이다. 일본의 패망을 감지한 여운형은 8월 10일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해방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자신들의 패전에 대비하여 조선의 민중을 대변할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이에 해방 하루 전 여운형은 당시 총독부 경무국장에게 패전소식과 함께 다음 날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의 관저인 이곳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8월 15일 아침 여운형이 일제로부터 조선의 치안권과 행정권을 넘겨받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러한 정세변화에 따라 바로 그날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3주 뒤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9월 8일 인천에 도착한 미군은 다음 날 서울로 와서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는 멕아더 포고령 제1호를 발표함으로써 그 존재를 부정해버렸다. 우리의 자주독립이 여전히 험로에 놓여있음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다.

▲ 조선정무총감의 관저로 사용되었던 <한국의 집>, 1945년 8월 15일 여운형이 이곳을 방문해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에게서 조선의 치안권과 행정권을 넘겨받은 곳이기도 하다. [사진-유영호]


그리고 이곳 <한국의 집>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한때 영빈관으로도 사용되었지만 정무총감 관저로 사용되었기에 일식(日式)이 혼합돼 1980년 전면 개축한 것이다. 비록 박팽년의 집터였다고는 하나 그것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 뒤 일제 강점기 정무총감의 관저로 사용되었던 곳이기에 그것을 완전히 없애지 않은 곳이라면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적지 않을 터인데 이곳이 우리의 전통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 현실에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제 이를 뒤로 하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 다시 한양도성의 흔적을 따라 숭례문 쪽으로 향하기로 하자.

<2014-12-02> 통일뉴스

☞기사원문: 남산, 치욕의 통감관저에서 공포의 중정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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