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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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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특무대가 시켜 거짓말” 양명산 진술번복에도 대법 “사형”


■ 조봉암 ‘간첩 무죄’ 판결의 파장


유병진 부장판사(배석판사 이병용·배기호)가 조봉암의 간첩, 국가보안법 위반(일부) 혐의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조봉암 피고인은 간첩행위를 한 일이 없으며, 간첩 박정호와는 만난 일도 없고, 정우갑과는 만난 일이 있지만 면담 내용이나 경위로 보아 유죄를 인정할 근거가 없다. … 또한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시를 위반했거나 북한과 야합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는 사실은 이를 인정할 수 없고, 진보당의 정강 정책도 국가변란이나 북한에 호응한 행위로 볼 수 없으며, 진보당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함으로써 국헌을 위배했다는 공소사실도 인정할 수 없다.’

결국 1심 판결은 조 피고인이 양명산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점과 무기 불법 소지의 점만을 유죄로 인정하고, (양명산과 같이) 징역 5년에 처한다고 판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1심 판결 직후, 조·양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은 무죄 선고에 이은 보석 결정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반공청년 200여명 법원 난입, ‘용공판사 타도하라’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인정 않고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 판결은 이 사건을 둘러싼 정권 측의 노림수에 비추어 볼 때 놀랍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감돌기 시작했다. 선고 3일 뒤에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1958년 7월5일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자칭 반공청년 200여명이 “용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법원 정문으로 난입했다. ‘진보당사건 판결 규탄 반공청년 총궐기대회’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밀려든 그들은 지프차에 장착한 마이크를 통하여 “공산당 자금을 받은 조봉암 일파를 간첩죄로 처벌하라!”고 계속 절규했다. 법원의 수위와 구치감 경찰관들의 제지를 뚫고 법원 청사 안으로 침입한 이들은 “없애버려라” “죽여라”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중 두 사람이 나서서 대법원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던 끝에 변옥주 서울고등법원장 집무실에 들어가 즉석에서 ‘항의문’을 내놓았다. 그러고는 유병진 판사는 서울 문리대 유근일사건, 용산중학 교감사건 등에서도 무죄 판결을 한 점으로 보아 용공판사가 틀림없으니 즉각 해임하라고 요구하면서, 만일 불응한다면 전국의 반공청년들을 서울에 집결시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처럼 난폭한 시위대는 뒤늦게 출동한 기마경찰대에 의해 겨우 법원 청사 밖으로 밀려났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사회 각계에서 규탄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조용순 대법원장도 “폭력으로 판결에 위협을 가하는 것은 법치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다. 사법부는 이런 국가적으로 수치스러운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기 위해 난동 관계자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치안당국에 요구한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한 신문은 국시가 반공이라고 해서 반공에 편승하기만 하면 무엇이나 애국이라는 논리가 얼마나 위험천만한가를 깊이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썼다. 이러한 여론에 밀렸는지 경찰은 마지못해 난입 청년 두어 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였으나 검찰에서 이를 보류시킨 채 즉결심판에 회부하는 것으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런 ‘관제데모’로 진보당사건이 조봉암 제거를 위한 집권 측의 ‘기획’이었음이 더욱 분명해졌다.


■ 양명산의 자백 번복에도 항소심은 오히려


1심 선고가 있은 지 두 달이 지난 1958년 9월4일, 이 사건의 항소심 공판이 열렸다. 주심이자 재판장은 김용진 부장판사, 배심은 조규대·최보현 판사였다. 항소심에서는 피고인 양명산이 특무대와 1심 법정에서 한 종전의 진술을 완전 번복하는 큰 이변이 일어났다. 그는 “나는 특무대에서 시키는 대로 거짓말을 했다. 양심의 가책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죽산 선생은 아무 죄가 없다. 사실을 말하겠다.” 이처럼 정면으로 말을 바꾼 그는 이런 진술도 했다. “고영섭 수사관의 권유로 특무대 의무실에서 주사 두 대를 맞은 후로는 정신이 흐려져 꿈속과 같은 상태에서 죽산 선생에게 돈을 대준 사실이 있느냐고 물어서 2000만환가량 될 것이라고 말한 기억이 날 뿐이다.” “내가 기억이 없어서 일일이 진술을 못하겠다고 했더니, 모눈종이에 기록된 것을 주면서 항목별로 어떻게 했다는 것을 메모해서 외라고 해서 사흘 동안 외우고 다음날 판사 앞에 가서 메모를 보면서 그대로 답변했다.” “(특무대의) 고문관은 나에게 ‘너는 문제가 아니다. 조봉암을 잡자는 것이다. 당신은 살 수 있다. 하라는 대로만 해라’(고 했다).” “나는 이북을 왕래하는 상인이지, 정치적 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며, 소위 죽산 선생 간첩행위는 특무대에서 만든 것이어서 나는 그 내용조차 알 길이 없다. 나로선 그분과 오랜 친분관계가 있고 돈을 만지기 때문에 기백만환을 도와준 일이 있을 뿐이다.”(<청곡 윤길중 회고록>, 호암출판사, 1991)


변호인단은 양명산의 위와 같은 진술 번복에 고무되어 여러 증거와 증인을 신청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그런 증인 신청을 묵살하고 속전속결로 나갔다.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으로 맞섰으나 이 또한 기각당하고 말았다. 10월14일 검사는 1심에서와 같은 구형을 했고 이어서 피고인들의 최후진술도 끝났다. 그런데 이때 뜻밖의 충격적인 일이 또 벌어졌다. 1심의 무죄 판결로 석방되어 불구속으로 법정에 나온 피고인 전원이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재구속되었다. 불길한 징후였다.


선고 공판은 10월25일에 열렸다. 양명산의 진술 번복만으로도 조봉암의 무죄는 한층 더 확실해졌지만 어쩐지 재판부의 처사가 마음에 걸렸다. 아니나 다를까. 2심 판결은 1심과는 달리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이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며 조봉암과 양명산 두 사람에게 간첩죄와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조봉암에 대한 간첩 혐의의 유일한 증거인 양명산의 1심 자백이 뒤집어졌는데도 결과는 오히려 악화되고 말았다.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도 1심과는 달리 모두 유죄로 바뀌어 실형이 떨어졌다.


■ ‘혹시나’ 했던 대법원 판결, 조봉암 사형의 완결판


그래도 대법원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모두 상고를 했다. 1959년 2월20일 대법원의 변론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김세완 대법관, 주심은 김갑수 대법관이었다. 검사와 변호인 사이에 그야말로 치열한 공방이 벌어졌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열린 선고 공판엔 아침부터 수많은 방청객이 모여들었고, 그로 인한 혼잡 때문이었는지 개정시간을 1시간20분이나 넘긴 뒤에야 대법관들이 법정에 나타났다. 재판장인 김세완 대법관이 판결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진보당의 정강 정책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고 평화통일에 관한 주장 역시 언론자유의 한계를 일탈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처럼 2심 판결을 파기하면서도 조봉암(간첩, 국가변란)과 양명산(간첩)에 대해서는 사형을 선고했다. 그 이유인즉, 조봉암이 진보당 조직을 주동적으로 발의하여 표면상으로는 합법을 가장하였지만 실제로는 북괴와 상통하였으며, 대남 간첩 양명산이 북괴로부터 밀파되었다는 점을 알면서도 그와 밀회하고, 그로부터 북괴가 보내온 미화 2만2000달러의 공작금을 받고 간첩행위를 하였다는 요지였다. 그런 한편으로 진보당 간부 전원에게는 국가변란의 인식이 없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정부가 이 사건을 일으킨 속셈이 잘 드러나는 판결이었다.


변호인단을 비롯하여 법정을 가득 메운 가족, 진보당 관계자, 일반 방청객 모두가 경악과 허탈에 빠진 가운데 죽산의 딸 호정이 울음을 터뜨리며 실신하여 쓰러졌다. 죽산은 대법원의 사형선고가 있은 뒤 면회를 온 조카 조규택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모두들 실망하지 말라고 전해다오. 환갑이 다 된 사람이 징역을 살고 나면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사형을 당하지 않더라도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저들이 나를 처단하겠다면 감수할 수밖에 없다. 정치가는 그만한 각오는 해야 하는 것이다.”


■ 원심 판결 주심 대법관이 재심도 맡아 ‘기각!’


5월2일 대검찰청이 법무부 장관에게 조·양 두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을 상신한 직후 변호인단은 서둘러 조봉암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였고, 이에 따라 사형 집행은 일단 보류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원심 판결의 주심이었던 김갑수 대법관이 이 재심 사건의 주심을 맡게 되어 다시금 의문을 키웠다. 김달호 변호인은 ‘1심을 관여한 재판관이 2심에 관여할 수 없고 2심을 담당한 재판관이 3심을 담당할 수 없도록 규정한 법의 정신은 원심의 주심을 맡은 재판관이 그 판결에 대한 재심청구사건을 주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지난번 조봉암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주심 재판관(김갑수 대법관)이 다시금 이번 재심청구사건을 주관하는 것은 잘못이라 할 것이다’라며 주심 대법관의 교체를 조용순 대법원장에게 요구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조봉암의 간첩죄는 양명산의 1심 자백에만 의존했는데 그가 2심에서 자백을 번복한 점, 군사기밀을 누설한 아무런 증거가 없는 점, 비록 그가 공산당 활동의 경력이 있었지만 그 후 공산당과 결별하고 대한민국의 농림부 장관과 국회 부의장으로서 공헌을 한 점 등에 비추어 사형을 해서는 안된다는 견해가 나왔다.

그러나 7월30일 재심 청구는 그냥 기각되었다. 형사소송법상 재심사유에 해당될 만한 ‘명백한 새로운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양명산에 대해서는 바로 전날 이미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치권에서도 구명운동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세를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다.

<2014-11-30>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8)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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