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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봉건왕조에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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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21) 숭례문·선혜청·칠패시장·명동과 충무로




▲ 숭례문~서소문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숭례문 ~ 서소문 구간 


육백년을 지켜 온 국보1호 <숭례문>, 신자유주의로 무너지다. 


현재 국보1호인 숭례문은 2008년 2월 어느 시민의 방화로 인하여 현재의 것은 홍예(석문)와 현판 그리고 문루의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최근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비록 지난 조선시대의 것은 아닐지라도 한양도성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의미는 변화되는 것이 아니기에 여전히 국보1위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숭례문이 갖고 있는 도성에서의 지위와 의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숭례문(崇禮門)에서 ‘례(禮)’는 오행(五行)에서 말하는 불(火)을 뜻하며, 오방(五方)에서 말하는 남방(南方)에 해당한다. 그런데 한양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쪽의 관악산이 풍수지리적으로 다름 아닌 불의 산(火山)이다. 남쪽에서 들이치는 이 화기를 막아야 경복궁이 온전하고 백성들의 삶이 편안하다. 그래서 남쪽의 문을 통해서 불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불과 같은 모습의 숭(崇)자를 택했다. 숭(崇)자 위에 있는 산(山)은 산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상징함으로써 관악산의 기세를 억누르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세 곳 대문과 달리 불이 타오르는 모습을 형상하기 위하여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화기를 억누르기 위해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만들어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연못은 단지 숭례문뿐 아니라 다른 세 곳의 대문 근처에도 있어 관악산의 화기 때문만은 아니며, 모든 대문의 화재예방과 휴양시설, 풍수적 의미 등 다양하게 해석 가능하다. 


어쨌든 한양도성 밖의 화기를 막고자 숭례문 밖 남지라는 연못부터 숭례문현판 세로글씨와 내용, 경복궁 앞 해태상, 경회루 연못 등 겹겹이 그 화기예방장치를 해 두었지만 결국 스스로의 힘을 못 키워 제국주의세력에 무너져 내렸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 방화로 소실된 숭례문을 다시 복원한 상태이지만 부실공사로 비판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사진-유영호]


참고로 숭례문 현판의 글씨가 세로인 이유에 대하여서는 다른 주장도 있다. 첫째, 이곳이 사신을 맞는 장소이므로 서서 맞는 것이 예법에 맞기 때문이란 설도 있으며, 둘째, 논어 태백편에서 “흥어시, 입어례, 성어락(興於詩, 立於禮, 成於樂)”, 다시 말해 시(詩)에서 흥이 생기고 예(禮)에서 일어나고 악(樂)에서는 이룬다”는 말이 그 근거라는 주장도 있다. 즉 예를 통해 사람은 일어난다 했으므로 숭례문이란 현판 또한 세워서 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 숭례문 현판의 글씨는 다른 세 개의 대문과 달리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세로로 쓰여졌다고 한다. [사진-유영호]


숭례문 현판의 글은 《지봉유설》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라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주장이 다수설이며,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至德祠)에는 ‘崇禮門(숭례문)’ 탁본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일제식민시기 돈의문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곽 대소문들이 헐렸지만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파괴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숭례문으로 입성했으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흥인지문으로 입성했기 때문에 일본의 입장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은 이미 훙인지문에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1907년 일본 왕세자가 방한하자 일제는 “대일본의 왕세자가 머리를 숙이고 문루 밑을 지날 수 없다”면서 숭례문과 연결된 성곽을 헐어 버리고 숭례문 옆으로 입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성곽을 헌 자리에는 도로와 전차길을 내며 숭례문과 성곽의 연결을 영구히 끊어 버렸다. 


조선개국과 함께 만들어진 숭례문은 한양도성의 정문으로써 이렇게 모진 풍파를 거치며 600년을 지켜왔건만 21세기 물질만능주의를 전면에 내세운 신자유주의 앞에서 그만 불타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 어느 70세 노인의 방화였으며, 이에 대한 기성언론들은 사회부적응자 한 사람 때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그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한 사람의 방화와 이를 제대로 감시 못한 담당 공무원의 태만에 의해 저질러진 문제가 아니다. 즉 사회구조적 문제인 것이다. 우리사회가 지금처럼 화폐를 최고의 가치로 내 세우는 신자유주의시스템 속에 운영되는 한 이러한 일은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사회는 빈익빈부익부구조 속에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사회적 약자의 계층상승 욕구를 성취시킬 희망은 더욱 좁아졌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가치를 그의 소득으로 평가하는 문화 속에서 그들이 살아갈 희망은 갈수록 작아지고 있는 것이다. 방화자의 억울함이라는 것조차 결국 자신의 땅을 정부가 수용하면서 제대로 된 가치로 평가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서울시 역시 국가문화재에 대한 관리를 비용대비 효율이라는 측면에서 신공공관리정책을 적용하며 민영화, 즉 사설업체에게 위탁했던 것이다. 이제 와서 심야에 공무원이 없다며 관리소홀 운운하는 것은 이율배반이다. 만약 숭례문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경제적 가치를 생산해 내는 도구였다면 신자유주의 신봉사회에서 이런 관리방식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방화범도 문화재관리방식도 모두 돈과 관련된 것이다. 


‘병든 말은 무거운 짐을 질 수 없다’고 했다. 바꿔 말해 병든 말은 무거운 짐에 깔릴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우리사회구조를 바꾸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이라는 일국의 사회가 통째로 무너질 수 있음을 숭례문화재사건이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공평한 세금을 위한 조선의 노력, <선혜청> 


흥미로운 것은 이곳 숭례문 바로 옆 <숭례문수입상가>자리가 조선시대 <선혜청>이 있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선혜청은 조선이 임진왜란을 겪고 사회경제적으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붕괴조짐을 보이자 광해군이 양반사회라는 기득권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이다. 어쩌면 물신숭배사회 속에서 사회가 양극화되고 이런 현실에서 사회적 약자에 의해 불타버린 숭례문방화사건을 역사 속에서 다시금 배울 수 있는 좋은 장소다. 



▲ 광해군이 대동법시행을 위해 설치한 기관 선혜청의 옛 터 [사진-유영호]


먼저 대동법(大同法)은 말 그대로 ‘모두가 동등하게 세금을 내는 법’이다. 이전에는 공납(貢納:각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방식)으로 나라의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하지만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으며, 시도 때도 없는 납부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한 부과 기준이었다. 공납은 군현·마을 단위로 부과돼 가호(家戶) 단위로 분배되었기 때문에 한 마을 안에서 대토지를 가진 양반 지주와 송곳 꽂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소작농이 같은 액수를 부담하거나 더 많이 부담하기도 했다. 


여기에 정경유착의 원조라 할 방납업자(防納業者)들까지 농민 착취에 가세했다. ‘막을 방'(防)자를 쓰는 이유는 공납업자들이 관리들과 유착되는 것을 막자고 쓴 말인데, 이들이 서로 짜고 농민들이 마련한 공물을 퇴짜 놓고 자신들의 물건을 사서 납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놓일 방'(放)자가 된 꼴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임진왜란을 지나며 더욱 격화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도망가면 가족에게 대신 공납의무를 지우는 족징(族徵)으로 대응했고,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이웃에게 지우는 인징(隣徵)으로 그 액수를 채웠다. 그야말로 봉건지배층의 수탈은 극치를 이루어, 백성은 도탄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조정에서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고, 결국 남인 이원익에 의하여 그 해결방안으로 대동법이 탄생한 것이다. 이에 시범적으로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하게 된 것이며, 이에 대한 호응과 결과가 좋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송시열 등 양반지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은 이미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었고, 송시열조차 결국 대동법의 효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대동법은 그 뒤 인조, 효종을 거쳐 숙종34년(1708)에 가서나 전국적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전국적 법제로 완성되기까지 100년이 걸린 법이다. 


좋은 제도임에도 이렇게 오래 걸린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조선은 공식적으로 지방수령에게 녹봉 정도를 제외하고는 해당 지방관청의 운영비를 내려 보내지 않았다. 알아서 조달하라는 것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일종의 지방자치단체를 민영화시킨 꼴이다. 여기서 공납의 비리가 왜 생길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공납 비리를 처단할 계기가 될 대동법실시를 과연 지방의 양반지주들이 찬성하겠는가? 


두 번째로 세수현황의 파악이었다. 임진왜란으로 토지문서가 대거 불타버려 정확한 토지현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대동법의 핵심은 특산물로 납부하던 공납을 토지규모에 따른 쌀로 똑같이 내게 하려면 토지 결 수의 측량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무시하고 세금을 거두어 드린다면 이전과 다를 바 없었을 것으로 백성들의 원망은 똑같았을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호폐법과 토지대장을 재정리하는 등 끊임없는 제도개선을 통해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실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오랜 시간을 통해 조선 최고의 제도이자 세계적으로 봐도 유례가 없을 정도의 선진적인 중앙정부의 징세시스템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좋은 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모든 것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즉 그것을 운영하는 사람이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제도가 또 다시 조선후기 고종 때 와서 민씨외척들의 수탈로 이용되어 1882년 임오군란의 첫 번째 처단대상은 다름 아닌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전 당상 최보현이었음을 나는 이번 도성기행의 출발지였던 옛 경기감영의 터(현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알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이를 잘 운영해 나갈 좋은 사람이 만나야 역사에 남는 제도로 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다. 


참고로 중구 남창동(南倉洞)과 북창동(北倉洞)의 동명 유래는 이 선혜청을 기준으로 각각 남북에 위치해 있다고 해서 지어진 동명이다. 


<칠패시장>을 통해 본 조선의 시장과 자본주의 이행 


숭례문에서 남쪽 횡단보도를 건너면 앞서 살펴본 남지(南池) 표석이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고, 서쪽 염천교 방향으로 난 <칠패로>라는 도로를 건너야 성곽 길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도로 명칭인 칠패(七牌)는 조선시대 이 일대에 선 시장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즉 이 일대가 시전(市廛) 및 이현시장과 함께 조선 3대시장이었던 칠패시장이 섰던 곳이다. 


먼저 칠패시장이란 이름은 현종 11년(1670)부터 3군문(三軍門 :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에서 한성부의 순찰을 위해서 전 지역을 8패(牌)로 나누어 3일에 한 번씩 교대로 순찰하였는데 이곳이 7패의 관할구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비롯된 명칭이다. 여기에 형성된 칠패시장을 통해 우리는 조선시대 시장의 역사를 상상해 보기로 하자. 



▲ 조선시대 한양 3대 시장. 시전은 조선의 한양천도와 함께 나라에서 조성한 것이며, 칠패와 이현은 17~18세기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민간주도시장이다.


조선은 한양으로 천도하고 도성을 축성한 것과 더불어 정종부터 태종 때까지 4차례에 걸쳐 종로와 남대문로일대에 정(丁)자 형태의 행랑 2천여 칸을 짓고 그 일부에 시전을 두어 시장으로 활용한 것이다. 중종 때 기록에 의하면 종루에서 종묘 앞까지를 시전으로 삼았다고 하니 실제 조선전기 중요한 핵심적인 시장은 육의전이 있었던 종루에서 종묘까지가 핵심적인 시장거리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조선의 시장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조선후기에 이르면서 크게 변화하였다. 유민의 집중에 따라 도성 외부에 인구가 밀집되면서 17세기 후반 이후 남대문과 서소문 밖에 상가가 조성되기 시작했고, 그곳이 바로 지금 내가 서있는 현재의 칠패로 일대이다. 그 후 또다시 약 1백년이 흐른 뒤 앞서 지나온 종로4가 네거리 일대에 이현시장이 들어 선 것이다. 


칠패와 이현은 정부로부터 보호받지 않는 사설시장이었지만 조선후기의 시장은 이 두 곳에서 주도해 나갔기에 하다못해 ‘동부채 칠패어(東部菜 七牌魚)’라는 말까지 생기게 된 것이다. 즉 이현은 채소가 유명하고, 칠패는 어물이 유명하다는 뜻이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왕십리일대는 왕십리평이라 해서 평야지대였고,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곡물, 채소 등이 많아서 왕십리 무, 훈련원 배추 등이 유명했다. 한편 마포, 용산으로는 배가 들어오는 곳으로 젓갈과 어물 등의 유통이 원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얼굴이 새카만 사람은 마포의 새우젓 장수이고, 뒷덜미가 새카만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장수다’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들이 채소와 어물을 팔기 위해 이현과 칠패로 이동할 때 태양이 비추는 방향을 이야기한 것이다. 


이들 칠패와 이현 등에서 활동하는 사상(私商)은 이후 도고(독점적 상인)로 성장하여 상업자본을 집적시켜가며 조선을 자본주의로 전이시킬 그 맹아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경강 상인,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 등이 있다. 즉 조선전기의 국가중심적 시전체제가 후기로 넘어오면서 개별적으로 성장한 사상이 시장을 주도하는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 


결국 조선은 정조 15년(1791)에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통공정책(通共政策)이 시행되고, 그 후 1895년 갑오개혁을 추진하면서 육의전의 금난전권조차 폐지하여 자본주의 물결에 호응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자본주의 이행을 위한 이러한 노력은 사대주의자들과 제국주의세력에 의해 왜곡, 파탄되고 말았다.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남산일대에 대거 몰려 산 일본인들에 의하여 칠패는 남대문시장으로 크게 성장하지만 일본인을 위한 시장으로 왜곡되었고, 종로일대의 상권은 일제의 편향적 개발정책에 따라 그만 기울어져가고 말았다. 


이러한 일제의 시장편성에 대항하여 이현시장은 조선상인들이 새롭게 광장시장을 만들어 대항했지만 제국주의 자본의 거대한 흐름을 이겨내지는 못하고 그저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조선이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남촌과 조선인들이 주로 사는 북촌은 확연히 차별되고 만 것이다. 


욕망의 해방구며 선망과 배제의 공간이었던 메이지마치(명동)와 혼마치(충무로) 


일본공사관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통감부으로 변했고, 1910년 한일합병으로 다시 조선총독부로 변하면서 이제 더 이상 외교기관이 아닌 통치기관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권력관계가 바뀌면서 경성의 번화가 역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인구 면에서 1910년 한일합병 당시만 해도 일본인의 경성인구는 14%였다. 물론 이 역시 상당히 많은 것이지만 1934년에 이르면 28%까지 이르렀다. 


또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충무로 1~3가의 진고개를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본정(本町), 즉 ‘혼마치’로 부르며 경성중심가로 키워갔으며, 이것은 더욱 확대되어 명동 역시 동명도 일본식 ‘메이지마치(明治町)’로 바꾸었다. 이제 청계천 이남의 충무로와 명동은 남촌을 상징하는 최고의 번화가가 된 것이다. 이곳은 화려한 조명으로 밤에도 불야성을 이루며 경성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마음껏 즐기고 소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해방구가 된 것이다. 



▲ 일제시대 남촌은 최신식 건물들의 집합소였다. 조선은행(상, 현 한국은행), 경성우편국(중, 현 중앙우체국 자리),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 백화점 본관). [사진출처-한겨례21]


그러나 동시에 이곳은 ‘내지인(內地人)’으로 불린 일본인들이 식민지 지배층으로서 특권적 삶을 누리는 ‘선망과 배제의 공간’이기도 했다. 1930년대 이처럼 모던보이나 모던 걸의 겉모습을 한 이들은 제국주의를 통해 번진 자본주의적 소비욕망의 포로였지만, 동시에 탈권력화된 식민지 국민이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인 거류지 남촌의 화려함과 반대로 조선인상권 북촌의 종로거리는 황량해져 갔던 것이다. 


한편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에 이르면 태평양전쟁과 함께 서울은 대동아공영권의 거점도시로 용산, 영등포 등이 도시변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올랐다. 신용산일대(현 미군기지)는 조선군사령부 등 일본군 병영이 차지하였고, 용산역일대는 철도국을 필두로 여러 철도기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또한 영등포는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경성 인근의 최대공업단지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일제시대 서울의 공간적 확장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와 발을 맞추며 이루어졌던 것이다. 


숭례문 안쪽으로 명동일대에 아직도 남아있는 일제의 흔적이나 비록 사라져 표석으로만 남아 있는 곳들을 알아보며. 일제시대 화려하고 흥청대던 이곳 남촌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숭례문에서 한국은행, 을지로입구역을 거쳐 청계천 광교에 이르기까지의 남대문로일대는 조선은행(1912년, 현 한국은행건물), 동양척식주식회사(1908년, 을지로 외환은행 본점 자리), 조선식산은행(1918년, 롯데호텔 신관 자리)이 들어서며 경제적 통치기관이 들어섰다. 그리고 경성우체국(1915년, 현 중앙우체국 자리)과 경성전기주식회사(1927년, 을지로입구역 6번출구 옆 현 한국전력건물)이 들어섰다. 


이런 경제적 수탈기관뿐만 아니라 1930년에 이르러서는 미쓰코시백화점(1934년, 신세계백화점의 전신), 조지아백화점(1939년, 미도파백화점의 전신) 등이 들어서면서 소비와 선망의 공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백 여년 전 일본과 총격전을 벌였던 <정미의병 발원 터> 


숭례문에서 바라본 명동이 일제시대 어떻게 변해왔는가에 대한 상상을 마치고 다시 본격적인 성곽길 걷기에 나섰다. 숭례문 건너편 대한상공회의소 건물로 가면 이 빌딩의 담장을 성곽으로 복원하여 놓았으며 담장 밑은 옛 성돌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그런데 이곳 숭례문 북서쪽의 서소문동일대는 일제와 체결한 1907년 정미조약에 따른 군대해산령에 저항하여 의병전쟁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기에 유심히 살펴보면 곳곳에 이와 관련된 표석들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부영빌딩(서소문동 120-23)과 올리브빌딩 사이 도로변에는 바로 이곳이 정미의병 발원지임을 알리는 표석이 있다. 또 호암아트홀 정문 쪽 도로변에는 일본군과의 전투 중 체포된 이충순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임을 알리는 표석도 있다. 그리고 중앙일보 사옥이 있는 서소문로에는 시위대가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리는 <시위병영 터>의 표석이 있다. 이와 별개로 시위병영터 표석에서 서쪽에 있는 고가도로 입구에는 바로 이곳에 <서소문>이 있었음을 알리는 표석도 있다. 이제 와서야 그저 몇 개의 표석만 남겨져 있지만 이곳은 조선의 식민화를 반대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외세에 저항했던 뜻 깊은 곳이기에 100여 년 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로 하자. 이곳에 대한제국 시기 도성을 수비하던 중앙군으로 시위대(侍衛隊)가 있었다. 당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려고 획책하던 일본의 입장에서 대한제국의 군사력은 이미 제거대상이었다. 결국 1907년 7월 31일 일본은 정미조약에 따라 군대해산령을 내리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조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들고 있던 무장을 내려놓으라는 것은 조선군인들에게는 더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이에 동대문 인근의 훈련원에서 해산식이 예정된 8월 1일 박승환 제1대대장이 병에 걸렸다는 핑계로 참석을 거부하는데 일본군 교관이 자신의 부하들을 인솔하여 훈련원으로 떠나려 하자 이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한 그는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면 만 번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그러자 이에 장병들이 호응하며 탄약고를 부수고 무장한 다음 이곳 서소문과 숭례문일대에서 본격적인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렇게 서소문일대에서 총성이 들리자 주변 2연대 병사들도 함께하여 남대문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본군 51연대가 현 남대문시장에 위치하고 있어서 일본군과 교전이 본격화된 것이다. 일본군은 숭례문 성벽에 기관총을 걸어 놓고 무차별 사격하였다. 일본의 막강한 화력과 병력에서 현격한 열세에 놓인 우리는 교전 3시간 만에 200여 명이 사상되었으며 500여 명이 포로로 잡힌 채 서소문 시위병영이 점령당하고 말았다. 


서소문 전투는 이렇게 수 시간 만에 제압되고 말았지만 퇴각한 우리 군은 일부가 서소문 밖 고지일대를 배경으로 저항을 계속했고, 각지로 흩어져 의병진에 합류하였다. 1894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을미의병의 활동이 개별적이고 산발적이었던 모습에서 정미의병을 거치면서 좀더 조직적이며 무장력을 갖춘 의병전쟁으로 그 양상이 바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많은 의병들이 간도와 연해주로 옮겨가 독립군으로 항전을 계속하며, 일부는 국내에 남아 산악 지대 등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2014-12-05> 통일뉴스 


☞기사원문: 조선 봉건왕조에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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