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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분단과 함께 축소, 파괴된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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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22) 정동·덕수궁 돌담길

▲ 정동일대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서소문 ~ 돈의문 구간 : 정동일대


정동(貞洞) 유래와 신덕왕후 강 씨의 운명


서소문일대에서 있었던 구한말 의병전쟁을 상상하며 길을 건너면 바로 중구 정동이다. 정동은 덕수궁을 위시하여 여러 역사흔적들이 남아있어 1900 년를 전후한 격동의 현대사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으로 수많은 역사기행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먼저 정동의 동명은 바로 이곳에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의 묘 ‘정릉’이 있었던데 유래한다. 이성계는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했던 탓에 그의 무덤을 사대문 안에 두었으며,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願刹)로 흥천사(興天寺)까지 건설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신덕왕후의 사망에 앞서 그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지명하였다. 하지만 정비 신의왕후의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방원이 격분하여 훗날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의왕후 소생 태종 이방원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시켰고, 또 그의 묘를 파괴하여 지금의 사대문밖 성북동으로 이전시켜 버린 것이다. 물론 일국의 왕으로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주:태평관)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태종의 의지였다.


가장 큰 명분은 사대문 안에 위패를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문 안에 위패를 모실 수 있는 곳은 오직 세 곳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놓은 ‘종묘’, 땅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사직’ 그리고 공자 등 성현들을 모신 성균관 대성전의 ‘문묘’가 그곳이다. 어쨌든 이런 명분으로 신덕왕후 강 씨의 묘는 현 성북동 정릉동으로 이전하였으니 그곳과 중구 정동의 의미는 같은 것이다.

▲ 본래 정동에 위치한 신덕왕후 강 씨의 묘를 태종(이방원)이 현재의 정릉으로 이전시키며, 무덤에 있던 석재들로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교각이나 주변의 돌에 글씨나 무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사진-유영호]


한편 정동에 있던 정릉은 이렇게 단순한 이전에 그친 것이 아니라 거의 파괴에 가까웠다. 묘의 봉분은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하였으며, 묘를 관리하던 정자각 목재부분은 태평관 북루를 짓는데 쓰고, 그 석물은 홍수로 무너진 청계천 광통교를 복원하는데 사용함으로써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도록 한 것이다. 또 정릉의 원찰로 지어진 흥천사는 훗날 중종 때 사대문 안에 사찰을 둘 수 없다는 유생들에 의해 방화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 때 남은 종은 그 뒤 기구한 떠돌이 생활을 하다 현재는 덕수궁 광명문(光明門)안에 자격루, 신기전 화차와 더불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태종은 정릉의 흔적을 완벽히 없애려 하였기에 지금에 와서 쉽게 그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현 미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일대에서 정릉의 석물 흔적이 일부 있어 이곳을 정릉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이방원에 의해 부관참시 당한 신덕왕후 강 씨는 그 후 260년이 흐른 뒤 현종10년(1669)에 이르러 송시열의 상소로 복위되었다. 그리고 그의 위폐는 종묘로 옮겨져 태조 이성계와 함께 배양되게 되었다. 이것 역시 88년간이나 이어져 온 논쟁이었지만 이로써 모든 것이 종료된 것이다.


덕수궁 돌담길의 슬픈 전설


성곽 길을 따라 정동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은 옛 배재학당이 있었던 <배재공원>이며, 이내 보이는 <신아빌딩>부터 소위 덕수궁 돌담길을 만난다. 그런데 이 돌담길을 남녀가 함께 걸으면 곧 헤어진다는 전설이 있지만 확인할 수는 없다. 이 이야기는 과거 덕수궁의 후궁들 가운데 왕의 승은을 받지 못한 여인들의 질투가 연인에게 씌워지기 때문이라는 전설이다.


그러나 이것보다 좀 더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덕수궁 바로 옆에 과거에 가정법원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돌담길 바로 옆 <서울시립미술관>이 지난 날 대법원과 가정법원의 건물이었다. 그래서 남녀가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가면 ‘그것은 곧 가정법원으로 가는 길’이라는 공식이 성립하면서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가면 이혼한다.’ 라는 이야기가 성립되었기에 전해지는 이야기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슬픈 전설에도 불구하고 이곳 돌담길은 여전히 많은 연인들이 걷고 싶은 길로 꼽히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상상하며 이제 도성순례가운데 유일하게 성곽 바로 옆에 위치한 덕수궁을 들어가 우리의 근현대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로 신아빌딩 자리(서소문동 39-1번지)가 앞서 서대문독립공원에서 살펴 본 한말 서재필에 의해 주도된 <독립신문사>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덕수궁>에서 상상하는 우리의 근현대사


덕수궁은 본래 궁궐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었다. 원래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는데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의주로 피난 갔다 돌아 온 선조가 1593년부터 머물렀던 곳이다. 그리하여 당시 ‘정릉동행궁’이라 불렸는데 이후 선조가 죽고 이어 광해군이 조선왕조에서 처음으로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그리고 창덕궁이 완성돼 광해군이 이곳을 떠나면서 <경운궁(慶運宮)>이란 궁호를 붙여 준 것이다.


광해군은 즉위 후 1618년 인목대비를 폐위한 뒤 경운궁에 유폐시켰으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즉위한 인조 역시 이곳 경운궁 즉조당에서 즉위하였다. 하지만 곧 창덕궁으로 정궁을 옮겨 이곳 경운궁은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 뒤 경운궁은 그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약 270년 뒤인 아관파천(1896) 이후 고종이 이곳을 정궁으로 삼으면서 다시 궁궐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897년 아관파천을 마치고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돌아 온 고종은 궁궐로서 경운궁의 확장과 더불어 여러 전각 등을 설립하였고, 그 해 9월 대한제국을 수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경운궁 앞 현 조선호텔자리에 환구단과 황궁우를 짓는 등 황제국가로서의 위상회복을 꾀했다. 하지만 1904년 큰 화재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어 이듬 해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함녕전 등을 중건하였으며, 1906년에는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이후 1907년 헤이그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고 순종에 양위한 뒤 이곳에 머물면서 덕수궁(德壽宮)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일어난 거의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은 덕수궁이 아닌 경운궁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곳 덕수궁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으며, 개인 저택을 궁궐로 개축하였기 때문에 전각 배치도 정연하지 못하다. 그리고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 등 서양식 건물이 있어서 고유한 궁궐의 양식과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건물가운데 주요한 몇 곳에 대하여 돌아보기로 하자.

▲ 한일합병 직전 대한제국시기(1910.2)와 현재의 덕수궁의 영역(붉은 선 안쪽) 변화.


돌아보기에 앞서 먼저 현재의 덕수궁은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축소, 파괴되어 본래의 크기에서 약 3분의 1로 축소된 형태이다. 당장 <대한문>부터 1914년 일제가 태평로를 건설하면서 뒤로 크게 물러난 것이다. 본래의 자리는 현 시청 앞 잔디광장쯤에 해당하였다. 그 후 1968년 이 길을 확장하면서 또 다시 뒤로 물러나게 된 곳이 지금의 대한문 위치이다. 1919년 2월 22일 고종이 덕수궁에서 승하하면서 대한문 앞으로 수많은 조문행렬이 섰고, 이것이 수일 뒤 3.1운동으로 연결되었음을 상상해 볼 때 대한문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을 우리의 민중들의 가슴 맺힌 절규를 떠올려 본다.


▲ 덕수궁 안내도. [자료-유영호]


대한문을 통해 덕수궁 안으로 들어가면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으로 가는 길에 정문 중화문 건너편에는 앞서 말한 정릉 원찰인 흥천사 종이 <광명문> 안에 전시되어 있다. 다시 한 번 그 종을 쳐다보며 기구한 신덕왕후 강 씨의 능(정릉)을 상상해 보며 중화전에 들어섰다. 임금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법(제왕남면 : 帝王南面)이라 하여 덕수궁의 정전이었던 중화전 역시 남쪽을 바라보게 설계되어 있다.


정전인 중화전 서북쪽에 위치한 두 개의 석조 건물은 이제는 마치 덕수궁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석조전>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건물로 신고전주의양식에 따른 건물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석조전 앞에 ‘분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궁궐에서는 볼 수 없는 장식으로 우리의 전통조경에 ‘분수’라는 것은 없다. 본래 물이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고 물이 거꾸로 치솟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역천(逆天)’의 발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곳 ‘분수’는 자연과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던 우리의 전통적인 정원과는 달리 인공적이고 기하학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정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곳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조경적 의미도 있지만 바로 이곳에서 1945년 12월에 있었던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제한적 식민통치’와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1월에 개최된 곳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익세력과 친일세력의 반탁운동으로 결국 미소공동위가 해체되고 이곳은 1948년 분단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남한 단독선거를 감시하기 위하여 들어 온 국제연합(UN) 한국위원회에서 사용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석조전은 우리나라 분단의 씨앗을 창출한 공간이기도 하다. 또 6.25전쟁 중에는 미군이 점령하여 군사령부로 사용된 공간이기도 하며, 1961년에는 박정희 쿠데타군에 의해 점령되기도 했던 비운의 공간이기도 하다.


중화전 뒤에 위치한 <석어당>은 궁중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2층 건축물이다. 또 단청이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곳은 본래 민가였기에 단청을 올리지 않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선조가 덕수궁에 머문 곳이 바로 이 곳인데 선조가 단청을 올리지 못하게 하여 후세 임금들도 선조의 뜻을 받들어 임진왜란 때의 고생을 기리는 마음으로 단청을 올리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광해군 역시 바로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긴 뒤 인목대비가 유폐된 곳이기도 하며, 훗날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이 이곳으로 끌려 나와 자기보다 9살이나 어린 새어머니 인목대비에게 질책 받은 곳이기도 하다.


또 가 볼만한 마지막 장소로 중화전 동북쪽에 <정관헌>이 있다. 이곳은 서구문화를 동경했던 고종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즐겼던 곳이다. 특히 고종은 커피를 매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결국 고종의 커피에 독약을 타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된 것이다. 1898년 러시아통역관 김홍륙이 커피에 독을 탄 사건인데 김홍륙은 거액의 착복혐의로 흑산도로 유배를 갈 위험에 처하자 고종의 커피에 아편을 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일본공사관기록》은 “(고종은) 맛이 좋지 않다면서 아주 소량으로 두세 번 마셨지만 황태자(순종)는 거의 한두 번에 반잔을 마셨다”고 전한다. 커피 맛을 안 고종과 달리 냉큼 마신 황태자는 ‘인사불성이 되었을 정도’였고 이후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고 한다.


덕수궁은 워낙 축소되어 잠깐 만에 모두 돌아보았다. 이제 돌담길을 따라 본격적인 정동일대의 역사유적지를 걷기로 하자.

<2014-12-06> 통일뉴스 

☞기사원문: 친일·분단과 함께 축소, 파괴된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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