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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조선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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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 유영호의 서울 성곽 역사기행 (23) 하비브하우스·중명전

▲ 정동일대 답사구간 [자료-유영호]

‘영원히 팔린 땅’ <하비브하우스(Habib House)>

대한문에서 덕수궁 담장을 따라 걷다 보면 이내 사거리가 나오고 담장을 따라 우측으로 계속해서 걸으면 주한 미 대사관저인 <하비브하우스>가 위치해 있다. 이 길은 1897년까지만 해도 없던 길이며, 그 후로도 약 1990년대까지 경찰들이 출입을 통제하여 일반인들은 걸을 수 없는 길이었다. 물론 지금도 통행은 가능하지만 정문에는 대한민국 경찰이 지키고 서있으며, 이곳을 향해 사진을 찍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다.

▲ 하비브하우스를 향해 사진을 찍자 바로 이를 제지시키기 위해 경찰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모습. [사진-유영호]

지금은 정동일대에 미국, 영국, 러시아 등 10개 국가에 가까운 대사관들이 있지만 이곳은 본래 도성 안으로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까지만 해도 외국공관이 위치할 수 없었던 곳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첫 공사관을 개설한 일본의 경우도 서대문 밖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으로 일본공사관이 방화되고, 또 이것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청군과 일본군이 도성 안에 주둔하고 일본공사관 역시 종로구 교동으로 옮겨지면서 이러한 원칙이 깨진 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1883년 공사관이 들어선 미국은 처음부터 사대문 안에 위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사대문 안에서조차 도성 내 외곽인 청계천 이남으로 제한하였던 것이다.

▲ 미 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1883년 민계호의 사저를 구입해 1970년대 대대적인 재건축을 하였지만 당시 미 대사였던 필립 하비브의 주장으로 우리의 전통가옥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출처-주한 미 대사관 홈페이지]

미국은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1883년 5월 이곳 민계호의 사저를 구입하여 공사관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정동지역에 외국인이 토지를 구매할 수 있도록 조치가 내려진 시기는 그 이듬해인 1884년 10월부터였다. 따라서 미국의 토지매입은 그 절차에 있어서 불법적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초대 공사 푸드(H. Foote)의 사재로 구매한 것이며, 이후 4년 뒤 미국정부에게 다시 판매된다. 이때 한성부에서는 공식적인 문서를 발급하는데 그 문서에는 현재의 미 대사관저 즉 하비브하우스 등의 토지에 대하여 ‘영원히 팔린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정동에 첫발을 들인 미국 공사관에 이어 영국(1884년), 러시아(1885, 현 정동공원), 프랑스(1889, 현 창덕여중 자리), 독일(1891, 현 서울미술관 자리), 벨기에(1901, 현 캐나다대사관 옆 주차장) 등의 공사관들이 들어오면서 정동은 조선의 양인촌(洋人村)이 됐다. 19세기 말엽 서울에는 9개의 공사관이 있었는데 그 중 중국(중구 소공동)과 일본(중구 예장동)을 제외한 7개국의 공사관이 바로 이 정동에 위치했던 것이다.

정동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미국 공사관은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을 겪으며 적산으로 처리되었다가 미 군정기를 거치며 다시 미국의 손에 들어갔다. 특히 6.25전쟁 시기 인천상륙 후 덕수궁에 미군이 주둔하면서 그 후부터 미국 공사관은 그 기능을 미 대사관에 넘기고 대사관저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곳의 명칭이 <하비브하우스>인 것은 1970대 이르자 지난 건물을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만큼 낡아 새로 건축하였는데 당시 미국대사였던 필립 하비브(Philip Habib)가 한옥을 고집하여 지어진 것으로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이것이 완공되기 전 퇴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사망한 1992년까지 이곳에 와보지 못하였다.

현재 이곳은 미 대사관저를 방문하는 손님이 묵는 영빈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을 방문한 여러 사람가운데 우리역사와 크게 관련 있는 인물은 1994년 방한한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이다. 6.25전쟁 이후 한반도 최대의 전쟁위기를 가져왔던 1994년에 카터 전 대통령이 전쟁발화를 막기 위해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주석과 회담을 갖은 후 서울로 와서 기자회견을 갖은 장소도 바로 이곳 하비브하우스이었다. 카터는 당시 평양에서 김 주석과의 회담을 마치고 미 백악관으로 회담내용을 전하는 전화를 걸어 전쟁을 막았던 것이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우리는 그 내용을 잘 모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돈 오버도퍼의 책 《두개의 한국》에 따르면 당시 카터 전 대통령으로부터 평양에서 백악관으로 전화가 온 바로 그 시간에도 백악관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주재로 부통령, 국무장관, 국방장관, 합창의장, CIA국장 등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으며, 여기서 이미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추진을 최종 결정한 상태였고, 한반도 주변 미군병력배치를 논의하고 있었다.

또 샐리카 쉬빌리 합참의장은 북미전쟁 개시를 위하여 미국 내 예비군을 소집해야 할 필요성을 클린턴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고 한다. 한편 주한 미군 및 대사관 직원들의 가족은 모두 미국으로 대피된 상황이었고, 이러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소수의 상층인사들을 중심으로 이미 강남에서는 전쟁을 대비한 사재기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위급한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 1994년 6월 16일 레이니 주한 미 대사와 게리 럭 사령관이 미국인을 소개(疏開)하기로 협의한 직후 레이니 대사가 한국에 와 있던 자기 딸과 손자, 손녀에게 사흘 뒤인 “일요일까지 한국을 떠나라”고 지시하였다.

이처럼 당시는 그야말로 선전포고를 앞두고 초읽기에 들어갔던 것이다. 우리 같은 일반 서민들은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벌어먹고 살기 바빴을 뿐인 바로 그런 시점에 이 땅에는 전쟁의 먹구름이 크게 드리워졌다 사라진 것이었다. 그것도 우리의 힘에 의해서 전쟁을 피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소외된 채 북미 양자의 협상으로 그러한 결정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 위기를 모면했으니 좋아해야 할 일이지만 전쟁의 준비는 물론 전쟁의 저지도 모두 우리의 결정권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이기에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중명전(重?殿)>

<하비브하우스>는 일반인 출입은커녕 사진조차 못 찍게 하니 이내 돌아 나와 정동길로 들어섰다. 여기서 정동극장 옆길로 올라가면 바로 을사늑약의 현장인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은 본래 경운궁에 속해 있지 않았지만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궁궐의 영역을 넓히면서 편입된 것이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도서관으로 사용된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도서관건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것이 1901년 화재로 전소되자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게 설계를 맡겨 재건된 모습이 현재의 2층 벽돌건물의 모습이다. 그리고도 또 화재를 입었지만 외형은 남아있어 복구된 것이다. 이후 여러 용도로 거쳐 1963년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에게 돌려졌다.

▲ 을사늑약이 체결된 치욕의 현장 <중명전> [사진-유영호]

그런데 또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이것이 1977년 다시 개인소유로 변화되었고, 이것에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사건 청문회를 통해서이다.

경한실업 소유였던 중명전이 청문회에서 소유자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 드러난 것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돈인 경방유량이 사돈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명의로 소유자를 변경했던 것이다.

그 뒤 문화재보호운동이 일어나면서 2003년 서울시 산하기관인 정동극장에서 다시 매입, 복원하여 2010년부터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이렇게 힘들게 우리에게 돌아 온 중명전(重?殿)의 이름은 꽤 의미심장하다. ‘해와 달이 함께 하늘에 떠서 광명이 겹친다’는 의미이며, 여기서 해와 달은 임금과 신하를 뜻하는데, 임금과 신하가 본분을 다해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밝을 명(?)’자가 ‘날 일(日)’과 ‘달 월(月)’의 조합이 아니라 ‘눈 목(目)’과 ‘달 월(月)’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조합의 훈(訓)도 그대로 ‘밝을 명(?)’으로 그 뜻은 같다. 이렇게 흔히 쓰는 ‘밝을 명(明)’을 쓰지 않고 ‘눈 목(目)’을 쓴 것은 ‘밝은 눈으로 정치를 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 중명전의 가운데 글자는 ‘밝을 명’자이지만 ‘날 일(日)’변과 ‘달 월(月)의 조합이 아니라 ‘눈 목(目)’자로 ‘날 일(日)’변을 대신하고 있음이 특이하다. [사진-유영호]

이러한 중명전이 우리 근대사에서 집중 조명되는 시기는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이로부터 1907년까지 약 3년 동안 고종이 이곳 중명전을 편전으로 이용하던 그때다. 이 가운데 1905년 11월 17일 바로 이곳 중명전에서 일본에게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겼다. 이것이 소위 <을사늑약>이다.

하지만 고종은 이듬 해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1907년에는 급기야 이준을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파견하여 세계열강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제국주의열강들에 의해 일본의 조선침략은 묵인되고 만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고 왕위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된 것이다.

옛말에 “나라 잃은 백성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했으니, 우리백성들의 마음이야 오죽했으며, 그 마음이 얼마나 스산하고 쓸쓸했을까? 이러한 당시 조선의 현실을 빗대어 ‘마음이나 날씨가 어수선하고 흐린 것’을 ‘을사년(乙巳年)스럽다’고 한 것이 지금은 전이되어 ‘을씨년스럽다’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온 국민들이 사용하기에 이제는 표준어로 인정되고 있지만 그 말의 유래는 이런 슬픈 우리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나는 학창시절 이 조약을 <을사조약>이란 명칭으로 배웠지만, 지금은 모두가 <을사늑약(乙巳勒約)>이라 부른다. 일반적인 정식조약이 아니라 강제로 체결된 조약이라 하여 ‘마소에게 굴레를 씌워 강제하듯 맺어진 조약’이라 하여 ‘굴레 늑(勒)’자를 쓰고 있다. 어쨌든 이로써 사실상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이다.

조선은 이렇게 외교권을 빼앗겨 주체적인 외교활동이 불가능하였기에 ‘사실상의 식민지’라 한다면, 1950년 7월 14일부터 막연한 미래까지 대한민국의 군사권을 자발적으로 넘겨준 상태는 뭐라 해야 옳은지 헷갈리게 하는 현실이다. 그저 ‘경인년(庚寅年)스럽다’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안타깝다.

<2014-12-09> 통일뉴스

☞기사원문: 식민지 조선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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