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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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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죽산 사형 9개월 뒤 이승만 하야… 52년 만에 재심서 ‘무죄’

■ 재심 기각 18시간 만의 사형 집행

재심이 기각된 다음날(1959년 7월31일), 변호인단이 다시 한번 재심청구서를 내려고 한 바로 그날, 조봉암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그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대법원에서 재심 기각결정을 통보한 지 18시간 만인 다음 날 오전 11시3분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죽산은 사형장에 들어가서도 눈을 감은 채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입회 목사의 기도가 끝난 뒤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승만 박사와 싸워 졌으니, 패자가 승자로부터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가 처형되는 그 시각, 서대문형무소 철문 밖에는 매일처럼 죽산을 면회하러 오는 조카 조규진이 초조한 표정으로 호명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정오의 사이렌이 울린 뒤에야 그의 앞에 나타난 간수(형무관) 입에서 이런 말이 떨어졌다. “오늘은 만나고 싶지 않으니 내일 오시랍니다.”

죽산은 또 진보당 간사장으로서 함께 옥고를 치른 윤길중에게 이런 말도 남겼다. “결국엔 어느 땐가 평화통일을 할 날이 올 것이고, 온 국민이 고루 잘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네. 씨를 뿌린 자가 거둔다고 생각하면 안되지.” 그는 또 대법원에서 무죄로 풀려나는 정태영에게는 “나를 구출하는 명목으로 그 어떤 타협도 하지 말라”는 당부를 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치안국장의 경고 ‘죽산에 대한 기사는 이적’

죽산에 대한 사형 집행이 보도되자 서대문형무소 앞에는 수백명의 시민들이 운집했다. 인근 도로까지 인파가 몰려 교통이 마비될 정도가 되자 경찰이 출동하여 강제 해산을 시키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의 유해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다.

이래저래 민심이 흉흉해진 8월1일, 치안국장 이강학은 다음과 같은 경고서한을 각 언론사에 보냈다. “(조봉암과 양명산) 그들의 행적과 기타에 관한 모든 기사는 민심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적을 이롭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므로, 언론인 제현께서는 이 점에 특히 유의하시어 주시기를 앙망하나이다. (…) 그러므로 차후 이들 사형자와 그 주위 환경 등에 이르는 기사는 법에 저촉되는 것임을 거듭 말씀 드립니다.”

■ 진실화해위원회의 재심 권고 이후

그로부터 일곱 번이나 정권이 바뀐 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가기관의 인권 침해와 불법행위의 조사를 촉구했고, 이에 따라 국정원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이 위원회는 진보당 조봉암 사건을 재조사한 끝에 2007년 9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그에 대한 사과와 피해구제, 그리고 명예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를 국가에 권고했다.

‘특무대는 양이섭(양명산)을 1958년 2월8일부터 구속영장이 집행된 3월8일까지 1개월여 외부와의 연락을 일체 두절시킨 채 여관에서 불법감금한 상태에서 조사를 하였다. 조봉암과 양이섭은 그 혐의 내용이 국방경비법이 아니라 형법 제98조 및 국가보안법 위반이었으므로 특무대는 이들에 대한 수사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수사를 행하였다. 위와 같은 불법행위는 당시 형법 제124조 타인의 권리행사방해죄(현 직권남용죄)를 구성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제4권 p.49)

그리고 ‘이 사건은 정권에 위협이 되는 야당 정치인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표적수사를 하여 사형에 처한 것으로서 민주국가에서 있어서는 안될 인권 유린이자 정치탄압이었다’고 규정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p.1069)

▲2011년 1월20일 52년 만에 간첩 혐의 무죄를 선고받은 죽산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씨(왼쪽에서 두번째)가 대법원을 나서며 조봉암 선생 기념사업회 관계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대법, 반세기 만에 죽산의 영혼에 무죄 선고

조봉암의 억울한 죽음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8년 후손들은 재심을 청구했고,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은 그에 대한 종전의 사형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그것도 대법관 전원일치의 찬성으로. (1959년의 상고심이나 재심 판결에서 사형을 선고할 때도 대법관 전원일치였는데….)

서울 서초동에 있는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박시환 대법관)의 선고공판에서 이용훈 대법원장은 “진보당은 국가 변란 목적의 단체로 볼 수 없고, 진보당의 강령과 정책이 대한민국의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 조봉암의 간첩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군 부대의 영장 없는 체포와 불법감금을 통해 얻어진 증인 진술뿐이다”라는 요지의 무죄판결 이유를 낭독했다.

그렇다면 50년 뒤의 ‘무죄이유’라는 것이 죽산과 그 변호인들이 1심 재판 이래 입이 닳고 피가 마르도록 주장한 바로 그 이유와 똑같지 않은가? 다시 말해서 죽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50년이 지난 시점에 와서야 같은 이유로 ‘무죄’라고, 그나마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대법원의 (원)판결은 … 증거재판주의에 위배하여 … 조봉암에게 극형인 사형을 선고하여 결국 처형에 이르게 한 것은 인권 보장의 최후의 보루로서의 책무를 저버린 것’으로서 형사소송법상의 재심을 해야 한다는 결정(2007년 9월)을 한 뒤에야 이에 떠밀리다시피 하여 ‘무죄’가 났으니 ‘사법살인’의 오명은 여전히 벗을 길이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은 ‘피고인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고 …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서 …’ 운운하며 조봉암을 애국자라고 예찬은 하면서도, 오판으로 사법살인까지 저지른 법원 판결에 대한 특별한 사과나 유감을 표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무기 불법소지에 대해 선고유예 판결을 하면서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의 대부분이 무죄로 밝혀졌으므로 이제 뒤늦게나마 재심판결로서 그 잘못을 바로잡고 형의 선고를 유예한다’고 했을 뿐이다.

■ 조사 담당 경찰관, ‘진보당 사건 조작’ 폭로

그런데 그보다 몇 해 전에 진보당 사건의 조작 내막을 폭로하는 전직 경찰관이 나타났다. 한승격이라고 자기 이름을 밝힌 그는 사건 당시 서울시 경찰국에 근무하면서 진보당 조직부장 전세룡을 취조했다며 바로 그 전씨와 함께 한 언론사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동아일보 1999년 8월18일자)

그의 말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당시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부터 조봉암을 어떤 수를 쓰더라도 잡아넣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엄청난 선거부정을 저질렀음에도 조봉암이 전체 유효투표의 30%나 얻어서 심한 압박을 받았는지, 서울시경 국장이 경찰 간부 몇 명과 자기를 불러놓고 ‘경무대에서 조봉암을 그대로 두어서는 이 대통령의 재선이 불가능하니 치안국이 책임지고 대책을 강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며 우리가 살 길은 이것밖에 없다’고도 했다. 당시 조직부장 전씨로부터 ‘북한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대한민국의 전복을 획책했다’, ‘조봉암은 빨갱이 간첩이다’라는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3주가량 혹독하게 신문을 했으나 자백을 얻어내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가 정권 유지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많이 잡았다. 이런 내용들이었다.

죽산을 사법살인으로 저 세상에 보낸 지 불과 9개월 만에 이승만 자신도 4·19의 분노와 함성에 쫓겨 하와이 망명길에 오른다. 그 어간에 저 유명한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가 자행되었고, 이에 격분한 국민들이 마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항의 시위를 벌여 4·19혁명으로 번진 것은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 죽산의 비운으로 이어진 통한의 고비

돌이켜 보면 죽산의 정치적 비운에는 애석하고도 안타까운 변수가 가로놓여 있었다. 1954년 11월의 이른바 ‘사사오입’ 3선개헌이 있은 뒤 반자유당세력을 망라하여 ‘민주당’을 창당할 때 보수우익세력이 조봉암의 참여를 배제한 것, 그리고 ‘진보당’(창당준비위원회)의 대통령 후보가 된 죽산이 범야권 후보 단일화를 위해 만나기로 한 민주당의 신익희 후보가 그 하루 전(5월5일)에 호남선 열차 안에서 급서한 것 등이 죽산의 불행으로 이어진 변수였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때 범야 신당이라는 민주당 창당에 죽산을 따돌리지 않았거나 후보 단일화 협의를 위해 만나기로 한 해공 신익희가 급서하지 않았다면, 앞서 본 죽산의 그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부질없는 가정을 해보는 것이다.

<조봉암 평전>을 쓴 어느 분은 죽산을 ‘평화와 정의의 씨를 뿌리고 간 순교자’라고 평가했다. 나는 얼마 전 일본 법조인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를 다시 가 본 적이 있다. 그때 ‘고만통’이라고 불리는 그 으스스한 사형(집행)장 안팎을 둘러보면서(마침 이 글을 준비하던 때여서) 죽산을 떠올렸다. 그리고 거기서 억울하게 목숨을 앗긴 그 많은 이들을 생각했다. 형장 입구에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통곡의 (미루)나무’는 예전 그대로 한을 삭이지 못한 채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2014-12-07>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9)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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