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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총 겨눈 마적 두목, 어머니 비녀 챙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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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도 실록소설 ‘들꽃’ (20)] # 제5장 망명생활의 시작

②< 들꽃> 해제

‘들꽃’은 일제강점기에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나라를 되찾고자 일제 침략자들과 싸운 항일 독립전사들을 말한다. 이 작품은 필자가 이역에서 불꽃처럼 이름도 없이 산화한 독립전사들의 전투지와 순국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으로, 그분들의 희생비를 찾아가 한 아름 들꽃을 바치고 돌아온 이야기다.  – 작가의 말

▲ 구절초, 약용으로도 쓰인다. 꽃말은 ‘순수’, ‘어머니의 사랑’이다.ⓒ 임소혁 사진작가 제공


해마다 올라 가는 소작료


우리 일행(만주 망명 가족단)은 첫 해 통화현 다황거우에서 죽도록 고생만 했다. 이듬해 좀 더 나은 곳을 찾아간 곳은 거기서 오십 리 떨어진 진두허였다. 그곳에서 중국인들의 토지를 소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 지주의 땅을 소작하면 우선 살 집과 1년 농사 지으며 먹을 양식과 약간의 농비 그리고 채소를 갈아먹을 수 있는 조그마한 채전을 주었다. 그때 우리들은 당장 먹을 게 없었기에 그 정도의 대우에도 감지덕지였다.

우리 일행은 중국인 지주가 마련해 준 걸로 먹고 살면서 그해 농사를 지어 추수한 뒤 그들이 미리 준 양식과 소작료를 갚았다. 우리가 소작료를 갚을 때는 땅의 질에 따라 달랐다. 처음 황무지를 개간한 첫 해는 대체로 지주와 소작인의 비율이 1대9, 이듬해는 2대8, 3대 7로 등으로 점차 올라가다가 개간이 완전히 끝나면 5대5로 나눴다. 초기의 중국인들은 인심이 좋았는데, 차차 그들도 매우 영악해져 우리 동포들은 몹시 힘들었다.

애초 동북의 중국인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전(水田) 곧 논은 없었다. 조선 이주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만주에 벼농사가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러자 토착 중국인조차도 식생활에 큰 변화가 있었다. 그들도 조나 옥수수 대신 점차 쌀을 먹기 시작했다. 조선 이주자들의 만주 황무지 개간은 ‘이밥은 뼈 밥’이라고 할 만큼 뼈저린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농민들의 수전개척사는 곧 조선족 이주사이기도 했다.

드넓은 만주 황무지에는 울로초, 또는 울로덩이라고 하는 풀들이 맷방석만큼 잔뜩 엉켜 있었다. 그 뿌리는 동근 상 같았는데 단단히 엉켜 있어 그것을 캐내기가 무척 힘들었다. 또 그 위로 나무들이 자라 그 뿌리가 땅속 깊이 내리고 있었다. 그 뿌리를 말끔히 뽑아 땅을 고르고 물길을 대어 논을 만드는 일은 여간 힘들지 않았다. 마땅한 연장도 없는데다가 이주민들은 손에 익지 않은 솜씨요, 밥조차 제대로 배불리 먹지 않고 일하는 처지라 늘 허기가 졌다.

리 집도 중국인 지주의 땅을 얻어 소작을 했다. 일흔을 넘은 할아버지만 빼고 가족 모두 황무지 개간에 나섰다. 아버지도 평생 처음 소를 몰고 땅을 갈았다. 아버지는 소를 다루는 일이 서툴러 내가 소고삐를 잡고 앞에서 끌었다. 그렇게 황무지를 개간했으나 만주 토질은 좋지 못했다. 땅이 푸석푸석하여 볍씨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볍씨를 뿌린 뒤 발로 꼭꼭 밟아야 했다. 그해 가을 소출은 좋지 않았으나 그래도 볍씨를 뿌렸기에 쌀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해 가을부터 이주민들은 강냉이죽 대신에 쌀죽을 끓여 먹을 수 있었다.

▲ 동북지방의 벼논들, 이들 대부분 조선 이주 농사꾼들의 피땀으로 개간한 것이다(2004. 5. 제3차 답사 때 촬영 장소; 합니하 신흥무관학교 터에서.)ⓒ 박도


만주의 겨울 추위


만주의 겨울은 엄청 추웠다. 추운 날은 아예 공기의 느낌이 다르다. 바깥 공기는 닿기만 해도 살을 에는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온 천지가 눈서리로 자욱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찬 공기와 바람소리만 요란했다.

바깥 기온은 섭씨 영하 30~40도로 그 무렵은 모두 옷도 시원찮기에 바깥 나들이하고 돌아오면 온 몸이 빳빳할 만큼 얼었다. 방안에 들어와 목을 녹이면 귓바퀴에서 진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발도 얼어 아리고 아팠다. 그러면 아버지는 한약재를 갈아 가루로 만들어 아픈 부위에 발라 주셨다. 한 달 정도 지나야 겨우 나았다. 그래서 겨울철에는 식구들이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집안에서만 지냈다.

“길 닦아 놓으니까 원숭이가 먼저 지나간다”는 말처럼, 조선 이주민들이 황무지를 수전으로 개간하자 중국인 지주들은 농간을 부리기 시작했다. 특히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세계 식량시장에서 쌀값이 폭등했다. 그러자 중국인 지주들은 조선 이주자들을 대대적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계속 황무지나 진펄, 밭을 수전(水田, 논)으로 조선인 이주자에게 개간케 했다. 그리고는 소작료를 점차 올려 조선인 소작농사꾼을 울리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곡가 상승의 기미에 일본자본가들이 슬그머니 동북에 침투했다. 그들은 동북의 쌀을 세계시장에 내다팔려고 동북의 토지를 헐값으로 사들여 농장을 꾸린 뒤 조선농민을 고용하여 지주 노릇하는 일들이 횡행했다. 그저 조선 농사꾼들은 조선에서도, 만주에서도 일본인들의 식민지 백성으로 먹잇감이었다.


▲ 동북의 조선족 초가집들(1999년 제1차 답사 때 촬영. 장소, 청산리전적지 아랑촌에서.)
ⓒ 박도
마적 떼의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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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은 여사의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표지. 이 소설의 귀중한 참고자료다.
ⓒ 민족문제연구소


마적 떼의 습격

그 무렵 우리 집은 임시 틀방 집으로 통나무를 우물 정(井) 자로 쌓고 지붕을 돌이끼로 덮었다. 어느 봄날 진흙을 개어 틀방집 틈새를 메우는데 마적 수십 명이 갑자기 마을을 덮쳤다.

그들은 사나운 말을 탄 채 장총을 휘두르거나 ‘펑펑’ 총을 마구 쏘면서 마을사람 특히 조선 이주민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말을 탄 채 조선인 집집마다 들어가 겨울을 나고 조금 남은 양식들을 모조리 자루에 담아갔다.

마적 두목이라는 자가 우리 집으로 와서 마침 사다리 위에서 흙은 바르던 아버지를 끌어내린 뒤 목을 마당 장대 위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뭐라고 중국말로 호통을 쳤다. 이웃에 사는 중국말을 아는 동포가 통역을 했다.

“너희 조선놈들이 왜 함부로 남의 땅에 와 일본까지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위협하느냐? 너희 조선인들을 모조리 죽이겠다.”


그리고는 장총 총구를 아버지에게 겨누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울부짖던 어머니가 안방 고리짝에 깊이 숨겨놓은 돈과 비녀를 몽땅 꺼내 마적 두목에게 바치며 빌었다. 그제야 마적 두목은 어머니가 준 돈과 비녀를 챙긴 뒤 무리를 이끌고 사라졌다.


그런 황당한 일을 겪자 우리 가족단은 그곳에서 살기가 싫어졌다. 어른들은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그래도 우리 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유하현 삼원포가 나을 거라고 거기로 떠나고자 이사 봇짐을 쌌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2014.12.10>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장총 겨눈 마적 두목, 어머니 비녀 챙겨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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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독립투사 이상룡 선생의 손부 허은 여사 회고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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