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대해부 1권] 이봉창 의거를 ‘대불경 사건’ 김구선생 독립운동에 ‘테러 음모’
동아일보는 창간 4개월부터 친일 논조를 선보였다. 조선인의 민족성을 헐뜯는 사설 <조선인의 단처를 논하여 반성을 촉하노라>를 7회에 걸쳐 연재했다. 웅장한 기풍과 지속성, 신앙심이 없고, 게으르고(태타의 폐가 유함), 당파열이 심하고, 관리를 무조건적으로 숭배한다(배관열이 심함)는 것이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동아일보는 “나라 안팎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이고 언론계, 그리고 나아가서 전 조선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연속 사설 <민족적 경륜>을 1924년 1월2일부터 5회에 걸쳐 1면에 실었다.
가장 문제가 됐던 2회 사설 ‘정치적 결사와 운동’을 보자. 조선인에게 정치적 생활이 없는 이유에 대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이래로 조선인에게는 모든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 것이 제1인이요”라고 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조선인은 일본의 통치권을 승인하는 조건 밑에서만 모든 정치적 활동 즉 참정권, 자치권의 운동 같은 것은 물론이요 일본 정부를 대수로 하는 독립운동조차도 원치 아니하는 강력한 절개 의식이 있었던 것이 제2인이다.” 조선인들이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황당하고도 반민족적 논리를 펼친 것이다. 이 사설이 나오기 전 이미 3.1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상해임시정부가 세워졌다.
그러면서 동아일보는 조선 독립을 부정하는 주장을 했다. “우리는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 일대 정치적 결사를 조직하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이다.”
동아일보는 <동아일보사사>(1권)에서 “이 사설의 집필자인 이광수는…‘조선에서 허하는 범위 내에서’라는 부분의 삽입으로 표현상의 오류를 저지른 것도 사실”, “그것은 역시 이광수의 사견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라고 뒤늦게 변명했다.
▲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
1924년 4월 초 친일폭력단체 ‘각파유지연명’의 수장인 박춘금이 동아일보사 사주 김성수와 사장 송진우를 요리집 ‘식도원’으로 유인해서 권총으로 협박하며 3만여원이라는 거액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일보 4월2일자 사설 <관민 야합의 어리운동>에 반발한 것이다.
박춘금은 1급 부일 민족반역자이다. 네이버 두산백과에는 박춘금에 대해 “한국의 친일 정치가이다. 폭력을 밑천으로 일제 권력에 아부하고 협력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당수가 돼 항일·반전(反戰) 사상의 격파를 주도했고 광복 후에는 일본으로 도망갔다.
동아일보는 공식 기록에서 박춘금의 요구에 대해 “거절했던 것”이라고 밝혔지만, <일제하 민족언론사론>에서는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온다. “송진우가 ‘사담’이라고 해 ‘주의주장은 반대하나 인신공격한 것은 온당치 못한 글로 인함’이라는 쪽지를 건네 풀려나오고, 김성수는 그들의 요구대로 돈 3천원을 그 이튿날 마무야마경무국장에게 가지고가 전하도록 했으나 박춘금이 ‘그 돈은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 해서 일단락된 언론계 테러사건.”
친일단체의 언론테러 행위가 일어났음에도 동아일보는 박춘금을 고소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4월11일 사설 <민중의 반역자에게>에서 사건전말을 보도했다. 하지만 ‘서약서’든 ‘사담’이든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일체 없었다. 당시 박춘금과 송진우 역시 서약서에 대해서는 모두 부인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이 사건에 침묵하는 경영진에 항의하며 송진우와 간부 5명, 논설반 기자 1명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했다. 동아일보는 김성수와 송진우의 사표를 수리하는 등 발빠르게 대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동아일보 대주주 김성수는 기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로 간부진을 구성했다.
부장들과 공장장 등 9명과 기자 대부분은 사측의 기만 행위에 사표를 제출하고 인쇄직공 및 영업국 광고부장과 직원 7명도 동정휴업을 일으키는 등 개혁운동은 몇몇을 제외한 전 사원의 결속 하에 진행됐다.
이에 김성수는 3.1독립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이승훈을 사장으로, 인망이 있던 홍명희를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앉히면서 기자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결국 기자들은 떠났으며, 김성수는 이승훈을 고문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직접 사장이 됐고 홍명희도 떠나자 송진우를 주필로 임명했다.
동아일보는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완전히 총독부의 ‘홍보지’로 전락했다. 일왕 부부에게 수류탄을 던진 이봉창 의거를 “대불경 사건”이라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대해부>는 “‘대불경’은 일본제국 아래서 신민이 일왕에게 쓸 수 있는 극존칭에 해당되는 표현이라 할 것이다. 동아일보의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표현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34년 8월31일자 2면 기사 <김구 등 각파 규합/반만항일을 개시? 중O호조회를 조직하고 폭동반 조선에 잠입설>에서 “그 이면에는 조선 안을 소란케 하고 대관 암살의 테러 음모가 있다고 보아 취조를 계속하는 일방, 연루자 수사를 엄중히 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동아일보가 자랑하는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도 당시 경영진의 태도는 정반대였다. 동아일보사가 낸 <인촌 김성수전>은 김성수가 이 소식을 듣고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전했고, 송진우도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며 이 기사를 쓴 이길용 기자를 크게 꾸짖었다고 전했다. 이 사건으로 주필, 편집국장이 즉시 사임했고, 조사부장과 지방부장이 회사를 떠났다. 또한 사건으로 구속된 이길용 기자 등 8명은 언론기관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서약서를 쓰고 겨우 풀러났다.
▲ 동아일보는 손기정 선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삭제하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는 등 더욱 노골적으로 전쟁을 벌이자 전쟁 총동원령을 홍보하는데 열을 올렸다. “비상한 결심을 가지고 매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름지기 당국의 지도에 순응할 것이니라”라고 했다. 중국 침략에 동원돼 처음 전사한 조선인 이인석에 대해 “조선 지원병의 영예”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39년 독자들에게 최신세계지도를 새해 선물로 보냈다. <동아일보 대해부>는 “그 제작 의도가 음험하기 짝이 없다. 유럽에서 독일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전체주의 국가들이 영국, 프랑스를 비롯한 나라들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여서 ‘확보’한 영역을 지도에 그려넣는 것을 시작으로 일제가 중국대륙에서 점령한 지역을 명확히 그 지도에 표시하겠다는 뜻”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이런 동아일보도 결국 1940년 8월 폐간당했다. 동아일보는 반발하지 않았다. 다만 사고에 “총독부 당국의 신문지 통제방침에 순응하여”라는 이유만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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