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국가에서 태어나 망국의 현실 속에서 식민지인으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사람으로, 그 영욕의 파란만장함이 춘원 이광수를 능가할 인물이 흔치 않을 것 같다. 약관에 2.8 독립선언문을 쓰고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을 만들기도 하고 소설 ‘무정’ ‘유정’ 등을 써서 계몽작가로 많은 젊은이들의 인생 멘토를 자임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친일 대열에 가담하여 일본군 위문단에 합류하고 창씨개명에 앞장섰으며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등 그 친일활동은 자못 현란하다. 물론 1937년의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는 가운데 회유되었을 가능성과 독립이 무망함을 절감한 나머지 식민지 정치현실에 적응할 밖에 없었을 그의 나약한 심성을 헤아려 보기도 한다.
당시 경기도 경찰부장 지바는 “민족본능인 지하수(독립사상)가 지표로 분출했을 때는 급격히 막지 말고 버려두지도 말고 자연의 흐르는 힘을 이용해서 바다로 흘러가도록 도랑을 설치하라”고 했다. 그의 주장과 소신은 격렬한 독립투쟁과는 다른 민족개조론이고 민족적 경륜이고 수양동우회고 흥사단이었던 것이다.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고 제국주의의 국제질서가 더욱 위세를 떨치는 현실에서 조선독립의 현실성은 없어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이 곧바로 친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임정과 해외의 독립운동이 실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적을 돕는 친일행위는 민족윤리를 저버린 짓이었다. 그런데 높은 지성의 소유자인 춘원이 왜 그랬을까? 결국은 나약할 밖에 없는 그의 심성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그는 과거에 실패한 후 술로 세월을 보내던 조선의 변두리 정주의 한 서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나마 10세 때에 콜레라로 양친을 잃고 천애 고아가 되었다. 과거의 조선은 그의 요람이 아닌데다 천애 고아인 그에게는 독지가의 원조와 배려가 중요하였다. 삶의 불안을 그의 건강 조건이 더욱 가중시켰다. 출중하게 총명해서 많은 쓰임새를 갖는 인재였지만 그의 불안은 흔들리지 않는 의지처가 필요했고 그것은 사람이기도 하고 체제이기도 하였다.
1925년 8월 잡지 ‘개벽’에 춘원의 안창호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가 실려 있다. 편지 속에서 춘원은 자신이 척추 카리에스(caries) 진단을 받았음을 말하면서 “속하면 1.2년, 오래 끌면 혹 10수년 더 살 수가 있다고 하는데 넉넉잡고 한 3년 더 살 것으로 작정하는 것이 합당할 듯하옵니다.”고 말하였는데 그는 해방 후까지 살고 한국전쟁 중에 납북되었던 것이다.
생명에 대한 불안을 안고서 그의 평생의 멘토인 안창호에게 엄살을 부리는 듯한 정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도산이 옥고로 건강을 해친 끝에 타계하는 상황에서 춘원은 과거에 이어온 일체의 희망을 접는 대신 새로운, 그러면서도 불멸의 의지처를 일제에서 찾지는 않았을까 하고 유추해본다.
1940년 창씨개명령이 선포되자 춘원은 다음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개명하면서 일반인들의 동참을 촉구하였다.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 온통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야 하며 그 속에 진정한 조선인의 길이 있다”(매일신보 1940년 9월 4일)고 말하고 “조선놈의 이마빡을 바늘로 찔러서 일본인 피가 나올 만큼 조선인은 일본인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황국신민화가 춘원에게서 철저하게 성공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는데, 춘원의 삶의 불안이 일제에서 그 의지처를 확실하게 찾은 증좌라 할 것이다. 삶이 본디 안타까울 수 있음을 어찌하랴.
<2014.12.11> 시민의소리
☞기사원문: 다시 친일 아리랑을 읊는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