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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월대 영화담에 어린 벽초, 선비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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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벽초는 부친의 유서를 책상 앞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벼렸다. 9년 뒤 그 사랑채에서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괴산 장날, 장터에서 충북지역 최초의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조국은 미증유의 살육전을 겪었고, 분단의 벽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가 머리를 둘 곳은 어딘가. 달천이 제월대를 감싸고도는 제월리 선영이었을까? 벽초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이다.”

1968년 초봄, 아버지 홍기문과 함께 찾아뵌 말년의 할아버지를 손자 홍석중은 이렇게 전한다. “할아버지는 이윽히 아버지를 쳐다보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난 못 가보는가 보다. 너나 가 봐라.’ 그로부터 며칠 뒤인 3월5일 할아버지는 창밖에서 쏟아지는 진눈깨비를 내다보시며 세상을 떠나셨다.” 벽초가 팔십 평생 못내 그리던 귀로의 끝은 어디였을까?

1910년 초, 벽초는 일본 다이세이중학을 마지막 한 학기만 남긴 채 돌연 괴산 인산리(현 동부리) 자택으로 돌아온다. 내리 수석을 해 일본 신문까지도 주목했던 수재였지만, 더 이상 일본에서 배울 것도 배울 이유도 없었다.

그해 여름, 금산군수로 있던 부친 일완 홍범식은 경술국치의 날 자결했다. “아아, 내가 이미 사방 백 리의 땅을 지키는 몸이면서도 힘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것을 구하지 못하니, 속히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 부친은 가족들에게 열통의 유서를 남겼고 장남 명희에게는 이렇게 당부했다. “어떻게 하나 잃어진 나라를 기어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 벽초는 부친의 유서를 액자에 넣어 책상 앞에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마음을 벼렸다.

냉정하게 복원된 인산리 고택엔 그때 그 고통과 울분의 흔적은 찾을 길 없다. 홍명희 이름 석자도 없다. 벽초는 9년 뒤 바로 그 사랑채에서 숙부 용식과 태식, 아우 성희 그리고 이재성, 김인수 등과 만세운동을 모의하고 3월19일 괴산 장날, 장터에서 충북지역 최초의 만세 시위를 일으켰다. 명희, 용식 등이 투옥되자 아우 성희는 다음 장날인 24일 더 큰 규모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투옥됐다. 장터는 고택 앞 동친천 건너 지척이었다.

제월리 선영 묘막에서 3년상을 치른 뒤 벽초는 편지 한 통만 남긴 채 훌쩍 서간도로 떠났다. 부친이 당부한 삶은 그렇게 시작했다.

서간도에서 위당 정인보와 함께 1년여 모색기를 거친 뒤 이듬해 상하이로 건너가 신규식, 신채호, 김규식, 조소앙, 문일평, 정인보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 동제사를 결성한다. 그 시절 단재(신채호)와 호암(문일평)에 대한 기억은 특별했다. 훗날 단재의 옥사 소식과 호암의 죽음 앞에서 그는 이렇게 통탄했다. “나는 무애(신채호) 저서에 뿌리던 쓰라린 눈물을 또다시 호암 유저에 뿌리지 아니치 못하였다.”

벽초는 1918년, 생모처럼 돌보아주시던 증조모가 별세하자 괴산으로 돌아온다. 만세 사건 이후 기울던 가세는 형편없었다. 인산리 저택을 처분하고 제월리 묘막으로 이주했다. 암담했던 제월리 시절 그의 신산한 마음을 달래준 것은 두 마장 거리의 제월대, 영화담이었다. 속리산에서 발원한 달천은 제월리에서 평지돌출의 고산을 만나 음태극 양태극을 이루며 쉬어 간다. 제월대 밑 영화담엔 천길 벼랑과 기화묘초가 어리고, 그런 풍광이 오롯한 곳에 관어대가 있어, 벽초는 낚싯대를 드리우곤 했다. 일찍이 조선 선조 때 충청관찰사 유근이 그곳에 고산정사와 만송정(지금의 고산정)을 짓고, 퇴직한 뒤엔 아예 그곳에 은거했다.

벽초는 유년 시절부터 <수호지>, <삼국지>, <춘추> 등을 외우다시피 했다. 민족의 대하소설도 쓰리라 다짐하곤 했다. <임꺽정>은 서울 익선동에서 쓰여지기 시작했고, ‘임꺽정’의 고향은 경기도 양주지만, 그를 잉태한 곳으로 그곳을 점지하는 데는 그런 사정이 있다. 홍명희 문학비도 그곳에 있다.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 조선 것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로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제월리에 은거하고 있을 순 없었다. 호구지책도 문제고, 아버지의 유훈이 그를 채찍질했다. 30명에 이르는 대가족을 이끌고 상경했다. 일찍이 그의 문재와 천재성은 널리 알려진 터여서 조선도서주식회사 전무, 동아일보사 주필 겸 편집국장, 시대일보 사장, 정주 오산학교장 등 여기저기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직장에 매여 있진 않았다. 1927년 2월 그의 주도로 신간회가 발족됐다. 좌우로 나뉘어 갈등하던 국내 독립운동 세력들의 역량을 집결하려는 그의 꿈이 담긴 단체였다.

신간회는 1929년 광주학생의거를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민중대회를 추진했고, 벽초는 핵심으로 지목돼 2년 가까이 실형을 살았다.
신간회 활동 중 호구지책은 따로 세워야 했다. 1928년 11월21일 <조선일보>에 <임꺽정> 연재를 시작한다. 익선동 교동초등학교 뒤편 셋집에서였다. 누구도 뛰어넘을 수 없는 근대문학의 최고봉. 평론가 김남천은 단언했다. “사실주의 문학의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 작은 논두렁길을 걷던 조선문학은 비로소 광활한 숲을 경험하였다.”

1935년 그는 4대문 밖인 마포 한강변 대흥동으로 이사를 간다. 일제의 광기를 피해 반쯤 은둔했다. 1937년 중일전쟁 도발 이후 전시총동원체제가 깊어졌다. 다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 244-1번지(현재 서울 도봉구 창동 820번지, 창동초교 뒤)로 은둔했다. 지기였던 이광수, 최남선 등은 이미 일제의 나팔수가 되어 있었다. 벽초는 모든 집필활동을 중단했다. <임꺽정>의 신문 연재도 1939년 7월 영원히 중단됐다.

창동에는 가인 김병로, 위당 정인보, 고하 송진우 등 요시찰인물이 살고 있었다. 일제는 창동주재소에 고등계 형사를 상주시켰다. 사람들은 벽초와 만나는 것을 꺼렸다. 마주치면 전봇대 쪽으로 돌아가 오줌 누는 척하는 지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 꼴을 당하며 벽초는 심산 김창숙 선생에게 이런 마음을 전한다. “관 뚜껑이 닫히기 전에는 항복도 하지 않고 모욕도 받지 않으리라.”

해방 이후 세태는 180도 바뀐다. 모든 단체들이 그를 끌어들이려 했다. 우파의 한국민주당, 중도좌파의 건국준비위원회, 좌익 계열의 ‘김일성, 무정 장군 독립동맹 환영준비회’가 그의 이름을 앞에 올리고 행사를 했다. 신탁통치 찬반 갈등 속에서 ‘성명의 도용’은 극심해졌다. 우파와 좌파, 반탁과 찬탁이 그의 이름을 도용했다. “나는 신탁통치에 대하여 열렬한 반대자의 한 사람으로 자처하는데 성명 석자가 삼국회의를 지지한다는 시민대회의 회장이 되었다니 참고 묵과할 수가 없다….” 개인 성명까지 내야 했다.

벽초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부친의 뜻에 따라 좌우, 사회주의자·민족주의자 모두가 단합해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으로는 우유부단하게 비쳤다. “용감하게 나아가지는 못하나 날카롭게 보고 굳게 지키는 분”이라고 아들 홍기문은 평했고, 벽초 자신도 “내가 다른 데는 유약해도 무엇이든지 안 하는 데는 강하다”고 자평했다. 그는 눈 밝은 평론가 양건식이 평한 것처럼 천상 원칙과 양심에 투철한 선비였을 뿐이다. “나에게는 한 단아한 선비로구나 하는 느낌을 주었다. 여옥기인(如玉其人·옥 같은 사람)이라 할는지….”

하지만 완전한 독립은 멀어지고 있었다. 우파인 고하도 중도좌파인 몽양(여운형)도 살해됐다. 대구 사태는 무력 진압되고, 급기야 제주 4·3학살까지 벌어졌다. 몽양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개탄했다. 1947년 몽양이 암살당하자 이렇게 통탄했다. “이런 분을 마침내 어쩌자고 죽인단 말고, 애닯도다 좌익 우익 다투다가 함께 망하는 꼴이다.” 마음은 북으로 기울었다. 남쪽은 이미 친일파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민족역량으로 독립을 완수하지 못하면, 장차 강대국의 부속국이나 괴뢰국이 되어, 한반도에서 미·소 양국이 충돌하는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그의 경고는 외면당했다.

20년이 흘렀다. 조국은 미증유의 살육전을 겪었고, 분단의 벽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가 머리를 둘 곳은 어딘가. 달천이 제월대를 감싸고 도는 제월리 선영이었을까? 벽초는 자식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이다.”

12월 제월대는 뼈에 사무치도록 차가웠고, 눈이 시리도록 맑고 밝았다. 지조 높은 한 선비의 초상이 영화담 깊고 푸른 물에 아프게 어렸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2014.12.16>
한겨레

☞기사원문: 제월대 영화담에 어린 벽초, 선비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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