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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폐간 탄압사건(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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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선거 앞둔 자유당 정권, 칼럼 ‘여적’ 필자 기소·기자 구속 그리고…


이승만 정권과 경향신문, 저항과 탄압의 교차


2009년 사법발전재단에서 간행한 <역사 속의 사법부>는 ‘경향신문 폐간사건’을 ‘제1공화국 최대의 언론 탄압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실상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주관해서 한국 사법 60년을 정리한 이 간행물에는 특정 사건을 별항으로 잡아 다룬 것이 몇 건밖에 안된다. 거기에 ‘경향신문 폐간사건’이 들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겨둘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러스트 | 박건웅


이 사건을 다룬 다른 저술도 ‘자유당 정권 아래서 대표적 야당지로 불리던 경향신문’(<법조50년야사>, 법률신문사), ‘항상 자유당이 눈에 가시처럼 별러오던 경향신문’(<역사의 현장>, 한국편집기자회), ‘당시 가장 격렬한 야당지였던 경향신문’(<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위원회), ‘한국 제2위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영향력 있는 가톨릭계 신문으로서 이승만 대통령 휘하의 자유당과 적대관계인 장면 부통령을 지지’(AP통신) 등으로 경향신문의 위상을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책에는 ‘한국 가톨릭의 후원을 받는 경향신문은 부산 피란 시절에도 발췌개헌안 파동을 전후하여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장기집권 기도를 강경하게 비판하고 나서 테러단 ‘땃벌떼’의 습격을 받는 등 반독재의 논지 때문에 정부의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고 있었다’고 쓰여져 있다(<한국 필화사>, 김삼웅). 1950년대 말엽 경향신문의 성향과 위상을 확인시켜 주는 평가들이다.

칼럼 ‘여적’에 담긴 ‘한국 선거의 위기’


이승만 치하의 자유당 정권은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반정부적 비판언론을 봉쇄 내지 제거할 ‘검은손’으로 회심의 강펀치를 날렸다. 그 첫 표적이 경향신문이었다. 호시탐탐하던 정부 여권 앞에 호재가 떠올랐으니, 그것은 경향신문의 ‘여적’이라는 칼럼의 글 한 편이었다.

문제의 ‘여적’ 칼럼은 1959년 2월4일자에 실린 글인데 같은 신문에 연재 중인 페르디난드 A 허맨스 교수(미국 노트르담대학)의 글을 논평하는 내용이었다.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라는 그의 글에는 주목할 만한 견해가 담겨 있어 국내에서도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인다. ‘여적’의 필자는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좀 강성의 논조를 펼쳤다. 그 첫머리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러하다.


“허맨스 교수에 의하면 ‘다수결의 폭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학설을 보는 한국의 다수당은 아전인수로 해석하려고 달려들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그의 주장 속에는 하나의 커다란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즉 ‘인민이 성숙되어 있어서 자기 의사를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요, 바꾸어 말하면 어제는 다수당을 지지하여 그에게 권력을 준 투표자도 내일은 그것을 버리고 그를 소수자로 전락시킬지도 모르며….”


‘여적’은 그 다음 대목에서 “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되느냐의 원시적인 요건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라고 문제를 제기한 데 이어 “물론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결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적 원칙인 것이니 오늘날 한국의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여기 있지 않을까”라고 맺는다.




▲경향신문 폐간 당시 여적을 쓴 주요한.


‘경향’ 탄압의 서곡, ‘여적’ 논조가 ‘내란선동’


이 같은 ‘여적’의 과감한 논조에 정부·여당은 놀라면서도 이를 탄압의 호재로 활용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즉 서울시경 사찰과는 그 글이 경향신문에 실려 나온 당일 오후 편집국장 강영수를 연행하여 무려 8시간에 걸쳐 강도 높은 조사를 했다. 신문사에 대한 압수수색도 했다.


이에 경향신문사는 법적 대응을 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먼저 압수수색의 부당함을 이유로 엄상섭 변호사를 선임하여 준항고를 제기했다.
이처럼 사태가 악화되자 논설위원(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겸임)인 주요한은 자기가 ‘여적’의 필자임을 밝히고 며칠 뒤 경찰에 나가 조사를 받았으며 한창우 사장도 경찰 조사에 응했다.


국내외 언론은 정부의 그런 처사에 대하여 부정 일색이었다. ‘여적’은 한국 위기의 본질인 선거부정을 되풀이해서는 안된다는 경종을 울린 글인데, 이런 충고의 글 한 편을 내란선동으로 형사문제화하는 것은 언론자유를 위축시키는 처사라는 견해가 중론이었다.


그럼에도 경찰은 2월17일 ‘여적’ 필자인 주요한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하지만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이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담당 조인구 부장검사)은 주요한과 한창우를 내란선동 및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는 한편 강영수 국장은 불기소 처분으로 종결짓는다. ‘여적’ 칼럼은 내란선동으로,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이란 기사(1959년 1월11일자)는 이기붕과 스코필드 박사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경향신문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서울시경은 경향의 법조 출입 정달선 기자와 서울시경 출입 어임영 기자도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하였다. 그들이 작성한 ‘남파 간첩 체포’ 기사가 간첩의 도피를 방조하였다는 것이었다.


미 군정법령 들이댄 경향신문 폐간 처분


경향신문에 대한 정부의 파상 공습은 그해 4월30일자 ‘발행허가 취소처분’(폐간처분)으로 절정에 이른다. 그날 오후 10시15분경 정부의 공보실은 경향신문에 대한 ‘신문 발행허가 취소 통지서’를 송달함과 동시에 그 내용을 전국에 방송했다. 처분의 근거 법령은 군정법령 제88호(1946년 5월 미군정이 공포)라고 했는데, 그 제4조에는 신문 기타 정기간행물에 법률 위반 등의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발행허가를 취소하거나 정지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당국으로부터 폐간 통고를 받고 침울해하는 경향신문 편집국.


정부가 경향신문에 대한 폐간처분의 사유로 내세운 ‘법률 위반’은 다음의 다섯 가지였다. 1) 1959년 1월11일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리멸렬상’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 국회의장 간의 면담 사실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져라’는 격렬한 표현으로 날조, 허위사실을 유포하였고 2) 그해 2월4일자 ‘여적’란을 통해 헌법에 규정된 선거제도를 부정함과 아울러 국헌을 문란케 할 목적으로 폭동을 선동했으며 3) 같은 달 15일자 ‘홍천 모 사단장의 휘발유 부정처분’ 허위보도로 군의 위신을 손상시켰다. 4) 4월3일자에 ‘북괴 간첩 하모의 체포’ 기사를 미리 보도하여 공범자들의 도주를 방조했으며 5) 4월15일자(석간) 이승만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다룬 ‘국가보안법 개정도 반대’ 기사에서 허위보도를 하는 등 오보를 일삼아 국익을 해쳤다.


미 국무부와 외신들까지 정부 속셈 비난


정부의 초강경 조치에 대한 국내외의 반향은 경악과 비난으로 넘쳐났다. 우선 군정법령 제88호가 위헌이고 언론자유에 대한 극한적 질식이라는 각계의 성명과 집회가 연달았다. 다울링 주한 미국대사까지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군정법령 제88호는 1946년 당시 한국의 치안을 위협하던 공산주의자들의 파괴 선전을 막으려는 것이었으며 언론에 대한 탄압이 언론의 과오를 바로잡는 방책은 되지 못한다’고 정부의 조치를 비난했다. 미 국무부도 다울링 대사의 성명을 전폭 지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 외에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등 언론단체와 대한변호사협회 등 각 분야의 사회단체에서 항의 성명이 나오고 국회에서도 전성천 공보실장에 대한 파면 결의안이 나오는 등 반대 공세가 확산되었다.


AP통신은 5월17일 서울발로 이렇게 보도했다. ‘이번 폐간조치는 내년(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이 승리하기 위해서 취해졌으며, 자유당은 언론의 비판을 침묵시키는 등 가혹한 수단만이 1960년 선거 승리의 길이라고 믿고 있다.’


폐간처분 취소청구소송과 가처분 신청


사태 해결에 나선 경향신문 측은 5월5일 서울고등법원에 행정처분(발행허가 취소처분)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때 정구영, 김동현, 이태희, 김흥한 등 당대의 명변호사들로 막강한 소송대리인단을 구성한 데서도 신문사 측의 결연한 의지가 드러났다. 경향신문은 소장에서 정부가 처분의 근거로 내세운 군정법령 제88호는 대한민국 헌법에 저촉되어 이미 효력을 상실했으며, 설령 유효하다고 하더라도 이는 공포 당시 공산당의 파괴 선전언론을 막기 위해 마련되었던 것인데 법령 본래의 목적을 일탈하여 악용하는 것은 재량의 범위를 벗어난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내란선동이나 명예훼손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아울러 내세웠다.

이어서 이 (본안) 소송에 대한 판결이 있기까지 우선 정부 측 행정처분(신문 발행허가 취소처분)의 효력을 급히 정지시켜달라는 가처분 신청도 했다. 이 사건은 서울고등법원 특별1부(재판장 홍일원 부장판사)에서 담당해 심리하게 되었다. 과연 법원은 경향에 대한 정권 차원의 메가톤급 탄압을 막아 줄 수 있을까?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법원의 결정을 기다렸다.


<2014-12-14>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0) 경향신문 폐간 탄압사건(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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