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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폐간탄압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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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4·19에 놀란 이승만, 하야 발표한 날 국민의 힘으로 다시 숨 쉰 경향신문


■ 상고 석 달 만에 엉뚱한 위헌제청


경향신문으로서는 대법원의 최종 판단을 받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상고심의 심판대상이 된 사건도 두 갈래여서 본안사건(발행정지처분 취소청구)의 재판부(재판장 김갑수 대법관, 주심 김세완 대법관)와 가처분사건(발행정지처분효력정지)의 재판부(재판장 김세완 대법관, 주심 백한성 대법관)가 서로 달랐다.


본안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상고 3개월이 지난 뒤에야 사건을 대법관 9명 전원으로 구성되는 대법원 연합부로 넘긴다는 결정을 했다. 앞서의 군정법령 제88호에 대한 종전의 법률 해석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1960년 2월5일에 열린 두 번째 심리기일에 대법관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로 격론을 벌인 끝에 ‘군정법령 제88호의 위헌 여부가 이 사건 재판의 전제가 된다’는 이유로 그 위헌 여부의 심사를 헌법위원회에 제청한다는 결정을 했다. 군정법령 제88호는 신문의 발행허가를 취소하거나 정지하는 요건을 규정하고 있지 않아서 위헌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한민국 수립 후에 제정된 법률이 아니라거나 신문 발행 허가 조항 자체가 위헌이라는 논리와는 사뭇 달랐다.




▲일러스트 | 박건웅


■ 구성 불능의 헌법위원회에 넘긴 공


그러나 이런 결정에는 신속히 처리해야 할 사건을 왜 이제 와서 뒤늦게 공을 헌법위원회에 넘기느냐는 의구심이 따랐다. 그보다도 훨씬 심각한 문제는 위헌 심사를 맡을 헌법위원회가 당시 구성조차 되어 있지 않은 데다 가까운 시일 내에 구성될 가능성조차 없다는 점이었다.


헌법위원회는 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고 대법관 5인, 민의원 의원 3인, 참의원 의원 2인(당시 국회는 양원제)으로 구성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참의원은 당시 구성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거기에다 헌법 부칙을 보면, 참의원의 존재를 전제로 한 규정은 참의원이 구성된 날로부터 시행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로서는 헌법위원회의 구성 자체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아는 대법관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헌법위원회에 위헌심사를 제청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꼼수였다.

이런 의견도 나왔다. ‘군정법령은 문자 그대로 법률 아닌 명령이므로 그 위헌 여부는 대법원 자체에서 판단해야 한다. 군정법령 제88호 자체가 대한민국 헌법 규정에 없는 것이므로 헌법위원회에 회부하여 심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당시로서는 구성의 여지조차 없는 헌법위원회에 심사를 해달라는 제청을 해놓은 채 손을 놓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경향뿐만 아니라 법조계, 언론계 등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한국편집인협회는 그 해 2월27일 성명을 내고 경향신문이 폐간되었다가 다시 무기정간된 지 열 달이 지났음을 상기시킨 후 “대법원이 헌법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며 무작정 방치하고 있는 것은 민주국가의 치욕이다”라고 공박했다.


■ 이승만 하야하자 그날로 정간 풀어줘


이처럼 대법원이 뒷짐을 지고 있는 동안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에 분노하고 항거하는 시위가 전국화되어 급기야는 4·19 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경무대 앞 발포로 많은 시민과 청년 학생들이 쓰러지는 참극을 고비로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그날이 바로 4월26일이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 2시50분 대법원은 허겁지겁 경향에 대한 발행정지처분의 효력정지 가처분 결정을 했다. 이러한 법원의 늑장으로 경향은 1년이란 긴 공백 끝에 겨우 신문을 다시 낼 수 있게 되었다.


조용순 대법원장까지도 헌법위원회의 위헌심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경향 사건 재판을 할 수 없다고 공언했는데, 하필이면 이 대통령이 하야한다고 발표한 바로 그날 허둥대며 그런 가처분 결정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런 해괴한 사태를 놓고 사법부 안에서 먼저 비난과 반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의 하와이 망명 사실을 특종 보도한 1960년 5월29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 분개한 법관들의 요구로 대법원장 사임


가처분 결정이 나온 바로 그날 오후 서울고법과 서울지법의 판사들은 “정치정세가 바뀌었다고 해서 종래의 태도를 돌변한 것은 그동안 법관이 법대로 판결이나 결정을 하지 않았다는 뚜렷한 증거이다”라며 분개하였다. 그리고 조용순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 전원의 사퇴를 권고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조 대법원장은 ‘사법부 독립의 완벽을 기하지 못한 책임을 느끼고 사임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4·19 후의 행정부와 사법부의 공백을 빌미로 한 여권의 만류로 한때 주춤하다가 대한변협에서 즉각 사퇴를 요구하자 5월11일 마침내 사임하였다.

그 무렵 전성천 공보실장은 각 대법관의 자택을 자신이 직접 또는 사람을 시켜서 매일같이 방문하였으며 심지어 금품거래설까지 겹쳐 검찰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전 실장은 검찰 조사에서 경향신문의 폐간조치는 이기붕 국회의장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실토했다(<법조50년야사>, 법률신문사, 2002).


그런데 이쯤에서 진정 국면에 접어드는가 싶던 차에 불의의 변수가 날아들었으니, 충남 공주에 사는 정우택이라는 사람이 경향 사건을 맡았던 대법관 전원을 직무유기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던 것이다(5월18일). ‘대법관들이 경향신문 사건을 3개월이나 끌어오다가 4·19가 성공하자 파렴치하게도 몇 시간 만에 신문이 복간되도록 판결함으로써 직무를 유기하였다’는 것이 고발의 요지였다.


■ 대법관들이 고법 판사들을 ‘기피’


이 고발사건에 대하여 서울지검은 대법관들을 조사도 하지 않고 ‘범죄의 혐의가 없다’며 안일하게 불기소 처분을 하였다. 그러자 정씨는 이에 불복하고 서울고법에 재정신청을 하였다. 재정신청이라 함은 검사의 불기소 처분에 대하여 고등법원에 그 당부의 심사를 요구하는 불복절차이다. 그런데 이 재정신청 사건을 담당한 서울고법 형사제1부(재판장 윤병칠 부장판사)는 대법관들의 직무유기 여부를 규명하는 데 적극성을 보여 시민들의 칭송과 대법관들의 불만을 아울러 불러일으켰다. 윤 부장판사는 경향 사건의 처리를 미루어오던 대법원이 4·19 이후에야 전화로 합의 결정을 하고 가처분 결정문도 사후에 서명한 사실을 밝혀냈다. 요컨대 대법관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회의도 하지 않고 전화로 결정했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진상이 밝혀지자 대법관들에 대한 준기소명령(재정신청에 이유가 있는 경우 법관이 내리는 기소 명령)이 떨어질 공산이 커졌다. 만일 그렇게 되면 대법관들은 직무유기죄의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야 하는 것이다.

이에 당황한 대법관들의 대응은 실로 놀라웠다. (1960년) 11월7일 (바로 그 다음날이 서울고법 재판부에서 대법관들을 재판에 회부하라는 결정, 즉 준기소명령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이었다.) 대법관 6명은 서울고법 형사제1부의 판사 3명(윤병칠 부장판사, 김택현·최재형 판사)에 대한 기피신청을 하였다. 담당 법관들이 불공정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렇게 되자 윤 부장판사는 바로 다음날 문제의 재정신청 사건에서 스스로 손을 떼겠다며 이른바 ‘회피’를 했다(11월8일). 그 사건은 형사2부(재판장 조창섭 부장판사)로 재배당된 지 불과 세 시간 만에 ‘재정신청은 이유가 없다’고 기각 결정이 났다. 그리고 윤병칠 부장판사는 곧 대구고등법원으로 전보되었으며 5·16 후에는 보복성이 짙은 곤욕까지 치르고 나서 사표를 내고 법원을 떠났다(김이조, <법조비화 100선>).


■ 아픔은 경향, 수치는 법원의 몫


그런데 당시 대법관이던 고재호 변호사의 회고록을 보면, ‘대법관의 파렴치’라는 비난은 ‘엄청난 누명’이라고 쓰여 있다. 3·15 정부통령 부정선거의 파문으로 헌법위원회 위원장인 장면 부통령이 사임한 데다 4월 들어 대법관들이 각급 법원에 대한 사무감사 일정으로 경향 각지에 나가 있는 동안 4·19가 일어났다. 급히 서울로 돌아와 대법원에 모인 대법관들은 장면 부통령의 사임으로 헌법위원회의 심리를 기대할 수 없으니 우선 대법원에서 효력정지신청 사건만이라도 처리를 하자는 의견이 나와 경향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합의까지 마쳤다. 그런데 조용순 대법원장의 제의에 따라 결정문은 일주일 후에 보내기로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4월26일) 이 대통령이 하야하는 바람에 대법원이 오해를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법조 반백년>, 박영사, 1985). 입장의 차이 내지 변명의 여운이 진하게 배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경향 사건에서 흉기로 쓰인 군정법령 제88호와 진보당 사건에 악용된 군정법령 제55호는 경향 사건에서 드러난 모순이 악법 제거의 계기가 되어 4·19 직후에 ‘신문 등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비로소 폐기되었다. 해방 15년, 정부 수립 12년 만의 늑장 입법이었다.


경향신문에 대한 이승만 정권의 폐간 탄압은 사법부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4·19라는 국민적 저항의 힘으로 제거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사법부가 국민의 기본권을 지켜준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민의 힘에 의해 사법부가 살아나게 된 역설을 실증해주었던 것이다. 아픔은 경향의 몫이었지만 수치는 사법부의 몫이 되었다.


<2014-12-28>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2) 경향신문 폐간탄압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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