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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유족 광복 70년 지난 지금도 피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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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유족 광복 70년 지난 지금도 피눈물

정부 소극적 자세·日정부와 기업 외면 탓

60여명 소송했지만 일본법원서 모두 패소

최근 한국서 잇단 승소…日 수용할지 의문

◆ 한·일 수교 50년 / 끝나지 않은 강제징용 소송 ◆

▲한일협정 서명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조인식이 열린 일본 총리관저에서 김동조 수석대표(맨 왼쪽), 이동원 외무장관(왼쪽 셋째), 시이나 에쓰사부로 외상(맨 오른쪽) 등이 서명하고 있다. [매경DB]

광복 70주년이 됐지만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이 당시 조선인들의 징용이 ‘합법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결말은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눈물을 언제 닦을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세월만 기다리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와 시민단체, 정부 등에 따르면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2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이 수치도 국무총리 산하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에 피해를 신고한 사람들일 뿐이다. 이 때문에 당시 ‘근로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징용된 사람들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수백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2014년 10월 30일 서울중앙지법이 주식회사 후지코시에 동원된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배 소송에서 1인당 8000만원에서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지만 앞으로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대법원 판결까지의 기간과 일본이 우리 법원의 판단을 인용할지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들은 과거사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기업의 외면, 외교 문제를 들어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우리 정부의 냉대 때문에 각종 소송에서 패소했다.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서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생활환경 등 노예처럼 취급받았다”며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1987년 민주화 항쟁과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해외여행 자유화를 계기로 일본에서의 소송이 봇물을 이뤘다. 이들은 강제징용자들이 많았던 미쓰비시중공업(옛 미쓰비시조선소), 신일철주금회사(옛 일본제철), 후지코시(옛 후지코시강재) 등을 상대로 집중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일본 각급 법원을 포함해 최고재판소(우리의 대법원)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인해 청구권이 상실됐고,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원고들의 소를 기각했다. 한국이 한일협정 당시 일종의 ‘배상금’으로 돈을 받아갔고, 당시 기업의 상호가 변경되는 등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게 일본 법원의 판단이었다. 결국 60여 명이 제기한 소송에서 피해자들은 단 한 건도 승소하지 못했다.

이에 피해자와 유족들은 2005년 우리 법원에 판단을 맡겼다. 우리 법원의 1·2심도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1·2심은 강제징용에 따른 범법 행위에 대해 국제재판관할권이 우리 법원에 있다고 인정했지만 재판부는 “이 소송이 일본에서 패소한 만큼 일본의 판결 효력이 적용된다”는 어처구니없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2012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우리 대법원은 그해 5월 24일 곽 모씨 등 8명에 신일철주금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일본 법원 판결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전제하는 것으로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가치와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이라며 원고 측 손을 들어줬다. 일본 법원과 우리 법원의 1·2심 판단을 모두 배척한 것이다.

장완익 대한변호사협회 일제피해자인권특별위원회 부위원장(변호사)은 “일제의 국외 강제동원 피해자의 청구권이 한일협정으로 소멸되지 않았다는 첫 판결”이라며 “대법원은 일제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 행위로 인한 손배청구원은 유효하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후 서울중앙지법이 후지코시에 대해 손배를 청구한 사람들에 대해 승소 판결을 했지만 전망은 불투명하다. 정부에 신고한 20만여 명 가운데서도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60여 명에 불과하다.

소송이 지난한 점도 문제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고령인 점을 십분 활용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해자들이 사망하고 유족이 권한 승계를 거부하거나 오랜 싸움에 지쳐 재판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지적이다.

장 부위원장은 “일본 기업과 피해자들이 화해 교섭을 나서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며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고, 대법원 판결 이후 손배 소멸시효(3년)인 2015년 5월 24일까지 최대한 원고인단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 한일협정 어떻게

14년간 줄다리기…반대세력 무력으로 진압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 한국과 일본은 1965년 6월 22일에서야 비로소 광복 이후 단절된 양국의 외교관계를 다시 맺었다. 수십 년간 쌓여온 한·일 간 감정의 골을 메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양국은 한일협정이 체결되기까지 1952년 2월 제1차 회담이 개최된 후 무려 14년간 여섯 차례에 걸쳐 입장 차를 좁혀갔다. 특히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정부는 한·일 간 외교 정상화를 적극 추진했다.

우여곡절 끝에 1961년 10월 20일 제6차 회담이 재개됐다. 당시 격렬한 반대투쟁으로 타결이 늦어지자 정부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해 비밀회담을 하고 타결 조건에 대한 합의를 끌어내게 했다. 이때 교환한 메모 내용을 근거로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됐다. 하지만 주요 의제인 대일청구권 문제·어업 문제·문화 재반환 문제 등에서 우리 측이 지나치게 양보한 굴욕 협정이라는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일본은 식민지 수탈을 공식 시인하지도 않았고 그것과 관련한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협정 체결을 앞둔 1964년 3월 국내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6월 3일에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기에 이르렀다.

정부는 반대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이듬해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협정(한일협정)을 정조인하고, 8월 14일에는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국회에서 이를 비준함으로써 14년을 끌던 한·일회담은 마무리됐다.

[장원주 기자 / 이현정 기자]

<2014-12-31> 매일경제

☞기사원문: 강제징용 피해자·유족 광복 70년 지난 지금도 피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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