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기획 – 독립유공자 후손의 70년] “가난과 편견… 할아버지가 지켜낸 국가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다”
ㆍ‘건국훈장 애족장’ 이승연 선생의 손자 이무열씨
▲ “만주서 동분서주한 조부 생전 고향땅 결국 못 밟아
손자 고생 끝에 귀국했지만 대 이어 못 배우고 못 살아”
그런 말을 하는 동생도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친일을 하지, 왜 항일운동을 해서 자손들을 이렇게 힘들고 곤란하게 만들어놨나. 친일파들은 다들 돈도 많고 공부도 많이 했는데….”
그래도 독립운동가 이승연 선생(1889~1956)의 손자 이무열씨(65)는 아직도 애국가를 부르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이 잊어버린 ‘국치일(國恥日)’까지 꼬박꼬박 챙긴다.
▲지난 12월 서울 구로동 자택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이승연 선생의 손자 이무열씨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서 녹록지 않았던 삶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씨의 옆에 손자가 좋아한다는 태극기가 걸려 있다. |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이씨의 할아버지 이승연 선생은 1919년 3월21일 경북 안동 편항시장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이 선생과 시위 군중은 주재소까지 달려가 유리창과 책상, 의자를 부수고 서류를 파기했다. 일본 경찰로부터 총칼과 제복을 뺏어 우물에 버렸다. 이 선생 등은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모닥불을 피우며 독립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자진 해산했다. 이 선생은 이 일로 2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39년 이 선생은 4남매를 데리고 만주로 건너갔다. 옥고를 치른 뒤 일본과 중국을 떠돌며 동분서주했지만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괴롭힘을 견디기 어려웠다. 가족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오상현(五常縣)에 둥지를 틀었다. 막막한 황무지에 물을 대고 한국식 논농사를 일구기까지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 선생은 서당을 열어 함께 온 조선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 선생은 생전에 광복을 맞았지만 곧이은 분단으로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1956년 중국에서 눈을 감았다. 이무열씨의 부친은 이 선생의 막내아들이다. 이씨의 부친은 어릴 적 장티푸스를 앓았다. 병원 한 번 못 가고 후유증으로 청각장애를 얻은 탓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 다행히 계산이 빠르고 글씨를 잘 써서 공산당 관리들 밑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계산해 주는 등의 허드렛일로 생계를 이을 수 있었다.
“한겨울에도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다닐 정도로 가난했죠. 눈밭을 걷다 보니 신발이 안 보였어요. 되짚어 보니 눈에 거꾸로 박혀 있는 겁니다. 결국 신발 두 짝을 손에 들고 학교까지 가는 바람에 발이 동상에 걸려 겨우내 학교를 못 갔지요.”
옷은 하도 기워 입어 본판이 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씨는 1970년 결혼식 때도 군데군데 기운 바지를 입었다. 이씨의 아버지는 결혼 비용이 없어 동네 사람들에게 돈을 꿨다. 설상가상으로 이씨의 어머니도 풍습성 관절염을 앓기 시작했다. 이씨의 어머니는 1996년에, 아버지는 한 해 뒤에 세상을 떠났다. 이승연 선생과 그의 아들 내외는 생존 당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1996년 이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을 뿐이다. “아버지는 1995년 김영삼 대통령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은 게 전부였지요. 1997년에 한국에 나오신다고 준비를 다 해놓고 암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순탄치 못한 삶은 3대에 걸쳐 이어졌다. 이씨는 중국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毛澤東)을 비판했다가 발각돼 3년 가까이 죄인 취급을 받았다. 학업도 중학교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여러 사업을 전전했지만 실패하고 돈만 날렸다. 나중에는 날품팔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KBS 사회교육방송을 빠짐없이 챙겨 들으며 조국을 잊지 않았다.
이씨는 2000년 한국행을 택했다. 형제자매와 사촌 등 9명이 함께 왔지만 정착지원금 3500만원, 임대아파트 1채만 지급됐다. 임대아파트는 먼저 한국에 온 사촌에게 내 주고 공장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했다.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건설 현장 막노동은 기본이었고 사출 공장이나 서적 포장 라인에서도 일했다. 열심히 일했지만 돌아온 것은 병마였다. 서울 가리봉동 아웃렛에서 에스컬레이터를 닦으면서 무릎을 꿇고 오랜 시간 일한 게 화근이었다. 병원에 갔더니 관절이 찢어진 청바지처럼 너덜너덜해졌다고 했다. 좀 나아진다 싶더니 탈장 수술을 해야 했고 허리 디스크까지 왔다. 지난해에는 전립샘암까지 덮쳤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데 우리가 3대째요. 그런데 친형제와 사촌까지 합쳐 10여명 남매 중에서 고졸도 드물어요. 그러다 보니 4대째까지도 애들이 제대로 공부를 못했죠.”
이씨는 교회사에 관심이 많아 <중국과 중국교회>라는 책을 쓸 정도로 학업에 대한 욕구가 컸지만 생계 때문에 제대로 잇질 못했다.
대접은 바라지도 않지만 차별은 서럽다. 이씨는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 일당 10만원 줄 것도 7만~8만원밖에 안 준다”고 했다. “형제 중에 둘째도 몸이 안 좋아 쉬고 있고 막내 여동생도 몸이 다 망가졌어요….” 말을 잇지 못하는 이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암이 온 집안을 총공격하는 것 같아요. 5년 전에는 남동생이 위암, 재작년에는 큰 여동생이 자궁암, 작년에는 나한테 전립샘암이 오고….”
정부나 사회가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뭘 해 줘야 하느냐고 묻자 이씨는 손사래를 치며 “그런 건 말 안 한다”고 했다. “한 번씩 행사에 다녀오면서 나눠 주는 태극기를 집에 갖다놔요. 7살짜리 막내 손자가 문을 딱 열고 들어와서 그걸 보더니 ‘대한민국’ 고함을 치면서 좋아하는 거예요. 너는 진정한 대한민국 국민이구나, 싶었어요. 얘네들에겐 우리 같은 일 없도록 해야지.”
<2015-01-01>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기획 – 독립유공자 후손의 70년]“가난과 편견… 할아버지가 지켜낸 국가는 우리를 지켜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