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이 어제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밝혀 파문이 일고 있다. 황부총리는 “한 가지 교과서로 역사를 균형 있게 가르치는 것은 국가의 책임”이며, “역사만큼은 분쟁의 씨앗을 뿌리고 갈래가 갈라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황 부총리의 궤변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한 가지 교과서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국가의 책무가 아니라 유신독재의 통치술이었다. 황 부총리에게 국가는 유신체제를 의미하는가?
국정교과서는 1974년에 등장했다. 그 전까지 중학교는 11종, 고등학교도 11종, 총 22종의 국사 교과서가 존재했다. 유신이 선포된 해인 1972년 박정희는 ‘전국교육자대회’를 열어 ‘국적 있는 교육’을 명했다. 전국교육자대회는 안보교육체제 확립, 새마을운동 추진, 국민총화 저해요인 제거, 교육풍토 개선을 ‘국적 있는 교육’을 위한 4대 결의사항으로 채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변경된 제도가 ‘한 가지 교과서로 역사를 가르치는’ 국정교과서 제도이다.
국정교과서가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는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것이다. 4.19.는 ‘학생의거’로, 5.16.은 ‘군사혁명’으로 규정했고, 10월 유신은 ‘한국적 민주주의’로 표현했다. 교과서가 독재자의 통치 수단이 된 것이다.
황 부총리의 궤변은 적반하장이다. 도대체 누가 역사교과서를 ‘분쟁의 씨앗’으로 만들었는가? 이명박 정권을 떠받치던 뉴라이트 세력들이었다. 그들은 일선 학교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었던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를 좌파로 몰아 공격하고, 강제로 교과서 수정을 시도하고, 학교장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채택을 철회하게 하였다.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 공격에 이어 시도한 것이 친일독재미화 교학사 교과서 채택 압력이었다. 1년 전 겨울, 일선 학교는 교학사 교과서 채택 문제로 몸살을 앓았다. 고등학생들까지 나서서 친일독재미화 교과서를 거부하여 결국 전국 단 한 학교에서도 채택되지 못했다. 이렇게 채택률 0%인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률 100% 교과서로 만들겠다는 것이 국정교과서 제도 부활이다.
역사 국정교과서가 가져올 재앙은 초등학교에서 이미 검증되었다. 내년에 전국의 초등학교에 보급될 예정으로 작년 2학기 전국 16개 초등학교 5학년 학생 2천명을 대상으로 수업이 진행된 초등 역사교과서 실험본 <사회 5-2>는 교학사 교과서의 초등학교판이었다. 박정희에 대해서는 ‘독재’라는 표현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이 강제로 맺은 을사조약을 ‘성공적’이라고 서술했으며, 일제가 의병을 ‘대토벌’하고 ‘소탕’했다고 표현했다. 일본의 쌀 수탈은 ‘수출’로, 독도는 ‘역사분쟁지역’으로 표현했다. 이 교과서의 편찬기획자 모두 4명의 교육부 관료들인데 한 페이지마다 평균 2개씩의 오류가 발견되었다. 분노한 초등학교 교사들과 역사 관련 단체들이 집단으로 항의 성명을 발표한지 보름이 지났는데 황우여 부총리는 일말의 반성도 없이 국정교과서 제도를 부활하겠다고 선전포고했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치를 시작했고, 아버지가 한 일을 그대로 따라 하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아버지가 만든 국정교과서 제도는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버지 이름 뒤에 따라붙는 ‘독재’라는 단어를 없애고 싶은 욕망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국정교과서 제도를 부활시켜 ‘독재’를 삭제한다고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18년 장기독재도 이기지 못한 역사의 평가를 5년 단임제 대통령이 이길 수 있겠는가?
<2015-01-09> 민중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