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 빼고 ‘연행’까지는 기술가능
정부·우익의 정치적 압력 문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집권 이후 일본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기술이 삭제된 첫 사례가 나오면서 이번 사태가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주목된다.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 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를 사실상 부정하려는 아베 정권의 의지와 현재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해 볼 때, 2000년대 초·중반 중학교 교과서의 관련 내용 삭제처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위안부 관련 기술이 대거 삭제될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 고등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본사 교과서는 도쿄출판 등 6개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15종이다. 이 가운데 일본 우익계열의 출판사인 메이세이(명성)사의 <최신 일본사>와 야마가와출판사의 <고교 일본사B>를 제외한 13종에 위안부 관련 기술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도쿄서적의 <일본사A>에는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조선인·중국인·필리핀인 등 많은 여성이 ‘위안부’로 끌려 나갔다”고 되어 있고, 진보성향 짓쿄(실교)출판의 <고교 일본사A>에는 “위안부는 전쟁 중 조선 등 아시아 각지에서 젊은 여성이 강제적으로 모집돼 일본 병사의 성적 대상이 되도록 강요받은 사람을 뜻한다”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월 ‘교과서 검정지침’을 개정하며 교과서에 역사·영토 문제를 기술할 땐 정부의 통일된 견해를 따라야 한다고 못 박은 바 있다. 위안부와 관련된 일본 정부의 통일된 견해는 고노 담화와 “(일본 정부의 자료 가운데)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지시하는 기술은 발견되지 않았다”는 2007년 3월 각의결정 내용뿐이다. 그 때문에 ‘강제연행’이란 표현은 안 되지만 ‘연행’ 정도의 표현은 가능하고, ‘군’이나 ‘일본 정부’라는 주어를 뺀 채 ‘위안부가 되도록 강요당했다’는 기술은 허용된다. 이 기준에 따른다면 현재 일본 교과서에 담긴 위안부 관련 기술은 큰 문제 없이 검정을 통과할 수 있다.
우려되는 것은 아베 정권으로부터 유·무언의 정치적 압력을 받은 출판사들이 자체 검열을 통해 스스로 기술을 삭제하는 경우다. 9일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한 스켄(수연)출판의 위안부 기술도 일본 정부의 검정 기준에 비춰보면 큰 문제가 없지만 출판사는 수정을 자청했고, 문부과학성은 이를 승인했다. 중학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기술이 사라질 땐 정부 관계자가 출판사에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는 사실이 2000년 8월 <마이니치신문>의 보도로 확인된 적도 있다.
그에 따라 2016년 3~4월 새 고등학교 교과서에 대한 검정결과 공개를 앞두고 일본 정부와 <산케이신문> 등 우익세력의 정치적 압박이 출판사들에 집중될 것으로 전망된다. <산케이신문>은 지난해 9월에도 고등학교 교과서의 위안부 관련 기술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며 삭제를 사실상 압박한 바 있다.
도쿄/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2015-01-09>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