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부산에 남은 일제 흔적들
▲ 천마산 중턱 아미동 비석마을
동척 건물, 근대역사관으로 변모
경남지사 관사·도청 옛 모습 간직
부산만큼 일제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은 드물다. 1990년 이전만 해도 일본식 목조건물이 너무 흔해 부산 사람들에게 적산가옥(敵産家屋)은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적산가옥은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하면서 정부에 귀속되었다가 일반인에게 불하된 일본인 소유의 주택을 말한다. 현재 적산가옥은 많이 줄었지만 도심을 거닐다보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남포동 건어물 도매시장은 대부분 적산가옥으로 이뤄져 있다. 개보수를 하면서 외관이 바뀌었지만 건물의 옆과 뒤쪽을 보면 일본식 목조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용두산 일대는 수백년 전부터 일본인이 살던 곳이었다. 조선은 1678년 왜인과의 교역을 위해 이곳에 초량왜관을 설치했다. 부지가 36만3636㎡(11만평)에 달했고, 읍성처럼 돌담을 쌓아 왜인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용두산 일대에는 금융기관과 동양척식회사 등이 들어섰고, 일제 수탈의 중심지가 됐다.
▲아미동 비석마을은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곳이다. 일본인 공동묘지의 비석은 축대와 계단, 담벽 등으로 사용됐다. 비석마을의 존재가 일본에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일본인도 크게 늘고 있다.
▲부산왜관지도(釜山倭館之圖). 위쪽 산이 용두산이다. 왼쪽 아래 산은 용미산으로 현재 롯데백화점 광복점이 들어서 있다. 이 일대에는 다양한 근대건축물이 밀집해 있다.
■ 동양척식회사, 미 문화원에서 근대역사관으로
용두산을 등지고 있는 대청동의 근대역사관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 지어졌다. 식민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이었다. 외벽 기초에 대리석을 두르고 바닥에도 대리석을 깔았다. 외벽 1층과 2층 사이에는 무늬를 넣었고 실내에는 무늬 있는 대형 기둥을 세웠다. 당시로는 획기적인 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서양식 건물이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이 주둔했고 1949년부터는 미국 해외공보처 부산문화원으로 사용됐다. 한국전쟁 중에는 미 대사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부산시민의 끊임없는 요구로 1999년 한국 정부로 반환됐다. 2003년부터 부산근대역사관으로 바뀌어 일제의 침략과 수탈 등 근대사를 바로 알리는 역사교육장으로 변모했다. 2001년 부산시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유명하다. 당시 대학생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진압과 독재정권 비호에 대한 미국 측의 책임을 물어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 당시 피의자 중 일부를 고 노무현 대통령이 변호하기도 했다.
▲부산 경무대는 일제강점기 경남도지사 관사로 사용됐다.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건물로 20세기 초 일본에서 유행한 양식이다.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되면서 ‘부산 경무대’로도 불렸다.
■ 부산 경무대와 임시 정부청사
부산 서구 부민동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경남도지사 관사와 경남도청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경남도지사 관사는 한국전쟁 중에는 임시 수도의 대통령 관저로 사용됐다. 사람들은 ‘부산 경무대’라고 불렀다. 경남도청이 1983년 창원으로 이전하면서 임시수도기념관으로 바뀌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품을 중심으로 각종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독특한 양식의 2층짜리 건물이다. 대외 활동 공간인 대현관과 응접실, 서재는 서양식이다. 가족의 주거공간은 일본의 전통적인 주거양식을 따랐다. 20세기 초 일본에서 유행한 건축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임시수도기념관 김상수 학예연구사는 “수탈과 착취의 중심이었던 조선총독부의 고위 관료인 경남도지사 관사였고, 한국전쟁기의 대통령 관저였다”며 “한국 근대사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건물”이라고 말했다.
인근에 위치한 옛 경남도청은 한국전쟁 당시 임시 정부청사로 쓰였다. 준공 당시 ‘-’자 형태였으나 1960년대 증개축하면서 ‘ㅁ’자 모양으로 바뀌었다. 전체적으로 위엄있는 입면을 갖고 있다. 부산지법 청사로 쓰이다 2009년부터 동아대 박물관이 됐다.
▲백제병원은 1922년 한국인이 세운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이다. 중국음식점, 일본 장교숙소, 치안대 사무실, 중화민국영사관, 예식장 등으로 사용됐다. 100년 가까이 격동의 세월을 함께한 건물이다.
▲정란각은 전형적인 일본 무사계급의 주거양식을 볼 수 있는 가옥이다. 광복 후 요정으로 사용됐으며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 관광객을 상대하는 유흥업소였다.
■ 비석마을과 기생집 등 일제가 남긴 흔적
임시수도기념관 뒤편 천마산 중턱에 위치한 부산 서구 아미동 19통 일대.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마을이다. 220여가구 400여명이 살고 있는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들은 묘지의 비석과 상석을 뜯어 집을 지었다. 비문을 없애고 글자가 새겨진 면이 보이지 않도록 엎어서 계단을 만들었다.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장판 밑에 비석을 깐 이들은 찬물을 떠놓고 망자를 위한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마을만들기 지원센터는 최근 마을 곳곳에서 70여개 비석을 촬영했다. 가옥 내에 있는 비석은 주민 협조를 얻어 촬영할 예정이다. 화보집을 만들고 있는 신병윤 동의대 교수는 “비석을 판독한 결과 승려 등 사찰 관계자의 이름이 많았다”며 “비석마을은 일제강점기 건축물은 아니지만 한국전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부산 동구 수정동에 있는 ‘정란각’은 한눈에 봐도 일본식 고급주택이다. 일제가 철도청장 관사로 지은 2층짜리 기와지붕 건물이다. 일본 무사계급의 전형적 주거양식인 쇼이즈쿠리(書院造)이다. 광복 후에는 고급 기생집이 됐다. 영화 <장군의 아들>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현재는 원형 복원공사 중이다.
부산역 맞은편에는 한국인이 세운 부산 최초의 근대식 종합병원인 ‘백제병원’ 건물이 있다. 1922년 지어진 모더니즘 양식의 4층 건물로 실내는 목조다. 중국음식점으로 사용되다 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 장교 숙소로 바뀌었고, 광복 이후에는 치안대 사무실, 중화민국영사관, 예식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신병윤 교수는 “최근들어 부산을 찾는 여행객들은 산복도로, 비석마을, 근대 건축물 등에 주목하고 있다”며 “특히 부산의 근대건축물들은 아픈 역사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5-01-09>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기획 – 사진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건축 기행]일본인 묘지 비석들 6·25 난민촌 석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