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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14) 소설 ‘분지’ 필화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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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검사 “이 소설이 용공적이라 보지 않는가” 증인 이어령 “병풍 속 호랑이에 놀라는 격”


■ ‘반미감정 고취, 북괴 동조’라고


작가 남정현의 <분지> 필화사건은 서울형사지방법원 박두환 (단독)판사에게 배당되었다. 1967년 9월6일 첫 공판이 열린 이후 문단, 학계, 언론계 등 지식층 인사들이 매번 방청석을 메운 가운데 전후 여덟 번에 걸쳐 재판이 진행되었다. 당초의 수사검사였던 김태현 부장검사가 부산으로 전보되어 3회 공판부터는 박종연 검사가 공소 유지에 나섰다.


변호인단은 이항녕, 김두현, 한승헌 세 변호사로 구성되었고 작가 안수길 선생이 법원의 허가를 얻어 특별변호인으로서 변론에 참여했다. 특별변호인이란 변호사 자격이 없는 사람도 법원의 허가를 얻어 변호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제도인데 안수길씨는 피고인 남정현씨를 ‘자유문학’지를 통해 작가로 추천한 문학의 대부이기도 해서 특별변호인으로서 적임이었다.


검사는 피고인에 대한 직접 신문을 통해 피고인이 <분지>라는 소설에서 남한 사회를 왜곡하고 반미감정과 계급의식을 고취한 것이 아니냐고 추궁해 나갔다. 남씨는 검사의 공소사실을 적극 부인했다. 작가는 현실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를 가공적으로 그릴 수도 있는 것이며 이 소설도 우화적·상징적 수법으로 가상적 세계를 묘사한 것이라고 맞섰다. 그는 북괴의 선전에 동조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면서 문학의 본질과 기법 등을 판사에게 이해시키려고 애썼다.


공판은 검사와 변호인 양측에서 신청한 증인신문에서 열기가 높아졌다. 검찰 측 증인으로는 북한에서 ‘민주전선’ 주필을 지내다 월남한 한재덕(공산권문제연구소장), 함흥공산대학 출신의 이영명(군속), 대남간첩 최남섭, 최경무(복역 중) 등 5명이 나온 한편, 변호인 측 증인으로는 문학평론가 이어령 교수(이화여대)가 나왔다. 검찰 측 증인들은 우선 그들의 특수한 신분에 비추어 자유롭고 공정한 증언을 기대하기 어려운 인물들이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북한 ‘민주전선’ (전)주필의 증언


먼저 한재덕 증인의 진술 요지를 옮겨 보면 이러하다. 그는 검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가운데 이 소설의 제목 ‘분지’는 똥의 땅이란 뜻이니 한국을 부정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발상에서 나온 제목이라고 보며, 누가 읽어 봐도 반미적일뿐더러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북괴와 똑같은 주장을 하고 있어 놀랐다고 말했다. 요컨대 검찰의 공소사실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진술로 일관했다.


다음은 변호인의 반대신문에 대한 그의 답변 요지.


변호인 = 남한과 북한의 문화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한재덕 = 북괴의 문화는 노동당이 제시하는 목표에 추종해야 하는 어용문화이지만 남한에서는 그런 기준이나 규율이 없다. 즉 언론의 자유가 있다.


변호인 = 작가는 가난한 사람의 고통을 그리거나 미국을 비판해서는 안되는가?


한 = 정도 문제다. 한국의 특수사정에 비추어 삼가야 할 것도 있다고 본다.


변호인 = 그 정도라는 것은 무슨 기준에 의해서 판가름하는가?


한 = 나는 이 작품이 정도를 넘어섰다고 본다.


변호인 = 반미적 인상인가, 반미를 위한 것인가?

한 = 제목부터 심히 반미적이다. 선동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변호인 = <분지>의 주인공인 홍만수의 선조 홍길동은 북한 집단의 사상에 부합하는 인물인가?


한 = 북괴의 대남방송에 ‘홍길동’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 작품이 그것과 우연의 일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은 북괴의 ‘홍길동’에 동조하는 내용이다.


변호인 = 지금 남한에서 <홍길동>이란 영화를 상영 중인 사실을 아는가?


한 = 알고 있다.


재판장 = 증인의 감정서에 <분지>는 북괴 주장에 동조하는 내용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동조’란 말의 뜻은 무엇인가?


한 = 북괴가 대남전략에 쓰는 주장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재판장 = 지난번 한일회담에 대해서는 북괴도 반대하고 한국 내에서도 반대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조’인가, 아닌가?


한 = 아니다. ‘동조’의 해석을 ‘공산주의적 의사로 북괴와 동일한 주장을 할 때’로 수정한다.


■ 복역 중인 대남간첩의 증언


이어서 증언대에 오른 사람은 최남섭 증인이었다. 그는 수갑을 찬 채 법정에 들어와서 방청객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알고 보니 그는 1965년에 북에서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복역 중이었는데 고학력이 아니라면서도 달변이었다.


검사 = <분지>를 읽은 소감은?


최남섭 = 그 내용이 남한에 대한 북괴의 악선전을 대신하고 있다.


변호인 = 이 소설을 읽고 대한민국은 자유스럽다고 느꼈는가? 반미적인 소설이라고 분개하였는가?


최 = 이런 소설이 허용된다면 자유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북에서는 상상도 못한다.


변호인 = 소설가의 상상이 우연히 북한 공산집단의 선전과 일치했을 때에도 ‘동조’가 되는가?


최 = 이 작품은 내용 자체가 북괴의 선전과 동일하다.

세 번째로 검찰 측 증인 이영명의 증언 차례가 되었다. 북에서 월남한 그는 당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군속이란 신분을 갖고 있었다.


검사 = 이 작품을 읽은 소감은?


이영명 = 철두철미한 공산주의 작가가 최고로 기술을 발휘해서 쓴대도 이 이상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인즉, ‘알링톤 발’ 운운하면서 미군이 향미산을 폭파하여 그 안의 사람들을 전멸시킨다고 한 점과 주인공의 어머니가 미군에게 강간당한다는 내용으로 반미사상을 고취시키고 높이 솟은 건물과 가난뱅이의 불만을 대조시켜 계급의식을 강조했다.


변호인 = 증인의 특수한 신분에 비추어 이 소설을 읽을 때에 정치적 편견은 없었는가?


이 = 편견은 없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정치적 작품이다.


변호인 = 작품 속의 허구가 곧 현실 그 자체인가?


이 = 작품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하며 또 작가가 바라고 있는 세계다.


변호인 = 남북한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는가?


이 = 남한에는 이북과 달리 개인의 자유가 있다. 그러나 헌법에 유보조항이 있듯이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


■ 이어령 증인,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네 번째는 변호인 측에서 신청한 이어령 증인의 차례였다. 현직 대학교수의 신분으로 당시 군사정권하의 공안몰이의 살벌함을 무릅쓰고 반공법 필화사건의 변호인 측 증인으로 법정에 나온다는 것은 여간한 신념과 용기가 아니면 작심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변호인 = 이 소설은 반미적인가?


이어령 = 이 소설은 우화적 수법으로 쓴 것이므로 친미도 반미도 아니다.


변호인 = 현실 그 자체를 그린 것이 아니란 건가?


이 = 그렇다. 이 작품에서 한국 여성과 미군의 관계는 미국 문화가 한국 문화에 접촉하는 과정을 비유한 것이다. 계급의식이란 것도 빈부의 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관해서 작품 안에 언급이 없으므로 단순히 약자에 대한 동정으로 해석된다. 군 복무의식을 해이시켰다는 문제도 지엽적인 상황 설정이지, 그것이 목적이 아니므로 인정될 수 없다. ‘알링톤 발’ 운운하는 대목에서 이 작품의 상징성이 더욱 분명하다. 여기서 서구문명의 정화인 원·수폭을 사용한다는 건 우화에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변호인 = 저항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 문학에는 본질적으로 저항의 일면이 있다. 아무리 평화시라 할지라도 작가는 저항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문학의 창작성과 저항은 동전의 안팎관계이다. 특히 저항문학이라면 현실 상황에 대한 비판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변호인 = 이 작품에서 작가는 어떤 저항성을 보이고 있는가?


이 = 현실적 저항이 아니다. 남씨는 흔들리는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작품 곳곳에 비서구적인 한국 문화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 있다.


변호인 = 홍길동은 저항적인 인물인가?


이 = 그에게는 저항성의 일면과 도술, 은둔 등 동양적 풍류사상의 양면성이 있다. 남씨는 이 소설의 첫머리에서 묘사하였듯이 홍길동을 후자의 것으로 상징했다.


변호인 = 이 작품이 북한 공산집단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공격을 받고 있는데?


이 = 달을 가리키는데 보라는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남씨가 가리키는 달은 주체적인 한국 문화이며 ‘어머니’로 상징되는 조국이다. 장미의 뿌리는 장미꽃을 피우기 위해서 있는 것이므로, 설령 어느 신사가 애용하는 파이프를 만드는 데 쓰여졌다고 해서 장미 뿌리는 파이프를 위해서 자란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검사도 벼르고 있다가 반대신문에 나섰다.


검사 = 이 소설을 처음부터 상징으로 보았는가?


이 = 어머니를 강조한 데서 그렇게 느꼈다.


검사 = 상징이라면 우화가 아닌가?


이 = 우화적이지 우화 자체는 아니다.


검사 = 작가의 내심까지 알 수는 없지 않은가?


이 = 작품은 자기가 썼지만 일반에게 발표가 된 뒤에는 작가만의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독자가 멋대로 해석해서도 안된다. 작품 속에 담긴 상징성은 그대로 존중되어야 한다.


검사 =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놀랐는데 증인은 용공적이라고 보지 않았는가?


이 = 나는 놀라지 않았다. 병풍 속의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로 아는 사람은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분지>는 신문기사가 아니다. 

검사 = 증인은 반공의식이 약해서 이처럼 증언하는 것 아닌가?


이 = 나의 저술과 나를 비평하는 글들이 그 점에 대한 증거가 될 줄 믿는다.

<2015-01-11>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4) 소설 ‘분지’ 필화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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