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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시장에는 해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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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해방 70주년이다. 돌이켜보면 10년 전, 해방 60주년을 맞이한 2005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뉴라이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해 해방전후사에 대한 재해석을 대대적으로 시도했다. 뉴라이트 하면 곧바로 ‘친일 미화’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지만, 뉴라이트가 벌인 작업의 핵심은 해방이 지닌 가능성을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통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좌우합작도 미소냉전이라는 국제정세 속에서는 어차피 실패할 시도였으며, 약소민족이 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을 따를 것인지 소련을 따를 것인지 선택하는 것뿐이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해방이란 국제관계 속에서 주어졌을 뿐이고, 그 국제관계 속에서 우리가 새로운 사회를 만들 가능성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냉전의 절대적 규정성을 부각시켜 해방이 지닌 가능성을 아예 생각도 못하게 하려는 경향은 뉴라이트와 약간 결을 달리하는 교학사 교과서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되었다. 뉴라이트뿐만 아니라 ‘이명박근혜 시대’의 보수도 현대사 이야기에서 대한민국의 성공을 늘 강조하지만, 사실 그 밑바탕에는 어떤 비관적 인식이 깔려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 즉 글로벌시장에 편입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며, ‘해방’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라는 것이다. 다른 세상은 어차피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영국에서 신자유주의를 도입하면서 대처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대안은 없다.’


영화 <국제시장>이 전하는 메시지도 바로 이것이다. 흥남철수부터 시작되는 역사 서사 속에서 주인공은 늘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가 속으로 힘들어하면서도 고된 길을 선택하는 이유는 항상 다른 도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체결을 알리는 라디오방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어린 주인공이 남자애들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은 그가 대한민국의 알레고리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그때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맞기만 한 것처럼 그는 그 뒤에도 항상 주어진 조건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한다.


그에게 사회적인 조건은 자연적 조건과 마찬가지로 오직 운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하는 전제다. 이 영화가 한국 현대사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 시작을 1945년이 아닌 1950년으로 잡은 까닭은 우리가 스스로 그 조건을, 그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게 하기 위해서다. ‘국제시장’의 룰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신을 노동력으로 내다팔게 하려면, 해방의 기억은 방해가 될 뿐이다.


해방의 순간이란 움직일 수 없는 자연법칙처럼 보였던 사회질서가 사실은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것임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다시 말해, 그 순간부터 사물 같았던 질서가 사람들의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순간을 삭제한 영화 <국제시장>에서 구체성을 띤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구체적인 관계를 맺는 존재는 친족 외에는 친구가 단 한 명 있을 뿐인데, 심지어 그 친구나 주인공과 결혼할 여성에 대해서도 이 영화는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친구’ 또는 ‘아내’로만 존재하는 것이며, 그들에게도 있었을 다른 사회관계들은 완전히 지워져 있다. 


사회적 조건들이 마치 자연적 조건처럼 비치는 것도 그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을 주제로 한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사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주인공 한 명뿐이다. 그리고 위기에 빠진 주인공을 구해주는 한국인 광부들이나 해병대가 아무런 구체성도 없는 추상적인 존재인 것처럼, 주인공의 고독은 국가에 의해 포획된다. 고독은 결코 해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2014-01-18> 한겨레


☞기사원문: [세상 읽기] 시장에는 해방이 없다 / 후지이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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