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필화는 있든 없든 불행… 있다면 ‘작가의 수난’, 없으면 ‘문학의 부재’
■ 법정 최고형 징역 7년을 구형
<분지> 사건의 법정은 현실 비판을 주된 흐름으로 하는 참여문학 내지 저항문학과 국가안보를 내세운 공안탄압의 상충에서 빚어진 공개적 설전(舌戰)의 장(場)이었다. 그 대단원이라 할 결심공판은 1967년 5월24일 오전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종연 검사는 “남 피고인은 <분지>를 발표하기에 앞서 북괴의 대남전략을 알고 있었고, 이 소설 자체가 북괴의 대남전략에 부합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다는 증거가 뚜렷하며, 반미사상 고취와 계급의식 강조로 국민에게 반정부의식을 높임으로써 대남적화전략에 동조한 증거가 뚜렷하다”고 주장했다. 또 박 검사는 “<채털리부인의 사랑>이 예술성이 높다고 극찬 받으면서도 일본에서 외설작품으로 법원의 심판을 받은 예로 보아 <분지>가 비록 예술성이 높다 하더라도 그 내용이 반공법에 저촉되는 부분이 있으면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언론자유의 한계를 일탈한 작품이라 할 것이고, 피고인이 개전의 정이 없고 증거가 충분하므로 법정 최고형인 징역 7년을 구형한다”며 논고를 마쳤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변호인들의 파상적 ‘무죄론’
그 다음은 변호인들의 변론 차례였다. 변호인 이항녕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변론을 했다.
“<분지>는 다만 하나의 문학작품을 구성함에 있어서 부조리한 현실과 인간의 작태, 힘과 윤리의 불균형, 동서 문명의 접촉상황, 한국민의 주체의식 등을 우화적 해학적 수법으로 묘사하였을 뿐, 용공의식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 이 작품은 반미적이 아니며 약자를 동정하였다고 해서 계급의식을 고취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작품을 이북에서 전재 이용하였다는 것을 가지고 피고인이 북괴에 동조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무죄를 주장한다.”
나(변호인 한승헌)는 “남한의 반공정책은 매사를 용공적 시각으로 보는 위험을 안고 있는데, 반공의 이름 아래 국민의 기본권이 유린된다면 그야말로 본말전도가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에서 문학의 본질과 기법에 대한 이해 없이 간첩 등 특수신분에 묶여 있는 사람들의 몇 마디 말에 따라 유죄로 인정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 소설에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이 묘사되어 있다고 해서 반국가단체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보아서는 안되며, 특히 반공법 제4조와 같은 모호한 규정을 확대 적용한다면, 국민의 기본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여 결국 한 작가의 ‘분지(憤志)를 곡해한 분지(焚紙)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 반미 선전에 이용된 <분노의 포도>의 경우
특별변호인 안수길의 변론은 직업 변호사의 변론이 미치기 어려운 문학인다운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는 반공 매카시즘으로부터 문학과 문학인을 지키려는 열정으로 법정 분위기를 숙연케 만들었다.
그는 말했다. “이 작품에 나타난 미군의 비행은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구성상의 대조법으로 쓴 것이다. 이 작품이 북괴의 잡지에 연재되었다고 해서 문제 삼는 것도 부당하다. 미국의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를 써서 나치 독일의 반미 선전에 크게 이용당했지만, 이 작가는 법정에 선 일이 없었다. 당국은 문학의 저항성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일제 치하이던 1932년, 작가 김동인은 <붉은 산>이란 소설에 애국가 가사를 넣었는데도 검열을 통과해 잡지에 활자화되었고, 일본어로 번역까지 됐지만 법정에 끌려간 일이 없었다. 이처럼 작품 때문에 작가가 형을 받는 일은 일제강점기에도 없었는데, 해방 20년이 지난 오늘에 그런 일이 있다면 이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반미감정, 계급의식이 왜 불법인가’-조선일보
결심공판에서 검사의 구형이 반공법 제4조 제1항의 법정 최고형인 징역과 자격정지 각 7년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검찰의 극한적 처사에 놀라기도 하고 개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검찰의 과격성을 정면으로 공박하는 논조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작심한 듯한 사설을 실은 한 신문이 있었다. 우선 그 중 서너 대목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대한민국에서 계급의식이 법적으로 배척될 근거는 전혀 없으며 반미감정을 어째서 불법으로 단속할 수 있는가? 북괴가 반미 한다고 하여 대한민국 국민이 반미감정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논법이 선다면, 지금 한창 반미노선을 걷고 있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을 추켜올려도 북괴 동조라는 삼단논법이 성립되지 않는가? 우리의 민주주의를 스스로 창살 없는 감옥으로 만드는 우(愚)만은 절대로 범해서는 안되겠기에 감히 일언하는 바이다.’
이 글은 다름 아닌 당시 조선일보의 사설(1967년 5월26일자)이었다. 이만 한 논조를 편 그 양심과 용기에 놀라면서 모두들 갈채를 보냈다. 여기서 문득 금석지감(今昔之感)이란 말이 떠오른다.
정작 문인단체인 한국문인협회는 재판부에 ‘피고 남씨가 전도유망한 청년 작가일 뿐 아니라 사건의 귀결 여하에 따라서 예술 창작의 자유라는 근본문제에도 중요한 선례를 남기게 된다’면서 공정하고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는 매우 온건한 진정서를 냈다.
■ 민족 주체성을 염원한 작품이지만 유죄(선고유예)
마침내 판결을 선고하는 날이 왔다. (1967년) 6월28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방법원 214호 법정, 박두환 판사는 작품 <분지>가 반공법에 위반되는 작품인지의 여부에 대한 사법적 판단을 설시하기 시작했다.
“…본건 작품 <분지>를 전체적으로 음미 이해한 위에 증인 이어령의 법정에서의 진술을 보태어보면, 이 작품은 우리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피고인의 염원을 소설로써 표현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으므로 피고인이 위 작품을 집필함에 있어서 반국가단체의 활동에 호응 가세할 적극적인 의사 또는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여기까지 들으면서 무죄판결은 물론이고 민족문학 작품상까지도 기대할 만한 칭송으로 ‘혹시나’ 했다.
그러나 판시의 흐름은 이렇게 ‘역시나’로 달라진다.
“반공법 제4조의 해석에 있어서 반국가단체의 활동에 적극 호응 가세할 목적이 없다 하더라도 소설 등 작품을 쓴 사람이 이 작품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국가단체에 호응하는 감동을 일으킬 요소가 있다고 인식하고 집필하였으면, 동법 제4조 제1항에 저촉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유죄의 판시로 매듭지어졌다. 다만 피고인은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작가로서 개전의 정이 현저한 점을 참작하여 ‘피고인에 대한 형의 선고는 이를 유예한다’고 했다.
■ 두고 쓰는 관용문구로 간단히 ‘항소 기각’
위와 같은 1심 판결에 대해서는 징역 7년이나 구형한 반공법 사건에서 ‘선고유예’가 나온 것은 사실상 무죄나 마찬가지라는 의견이 있었는가 하면, 단호하게 무죄를 선고하지 못하고 ‘선고유예’를 한 것은 판사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 타협 판결이라는 견해도 나왔다. 그러나 ‘선고유예’도 유죄판결의 하나임은 분명하기 때문에 피고인 측은 항소했다. 검사 역시 1심의 형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했다.
나는 항소이유서에서, 피고인에게는 이른바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다는 범의가 없었고, 특수신분을 가진 검찰 측 증인들의 진술을 유죄의 증거로 삼은 것은 잘못이며, 원판결은 소설 <분지>가 우리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염원을 소설로 표현한 것이며 반국가단체의 활동에 호응할 적극적 의사가 없었다고 판시한 이상, 마땅히 무죄를 선고해야 마땅한데도 막연히 반정부 및 계급의식을 고취시킬 요소가 다분함을 인식하였다고 하여 유죄를 선고하였음은 이유모순의 오류를 범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창작의 자유를 포함한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의 본질 등을 거론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1970년 4월7일, 서울형사지방법원 항소 제1부(재판장 유태흥, 배석 이철환, 정귀호 판사)는 피고인과 검사 양쪽의 항소를 모두 기각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 이유를 옮겨보면, ‘원심이 적법히 조사한 여러 증거들을 기록에 의하여 살피니, 원심이 판시한 피고인에 대한 범죄사실은 이를 인정하기에 넉넉하고 달리 원심이 소론과 같이 사실을 그릇 인정하였다고 믿을 만한 자료가 없으니…’라는 식의 도식적인 한두 마디 나열이 판단의 전부였다.
■ 승복 아닌 체념으로 상고 포기
남정현씨와 변호인단은 대법원에 불복할 것인지를 논의한 끝에 상고를 하지 않기로 했다. 수십장의 상고이유서에 담은 불복 이유에 대해 ‘논지는 독단적 견해에 불과하다’거나 ‘일건 기록과 증거에 비추어 보건대 원 판결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라는 식의 상투적 용어를 애용하는 최고법원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국사범에서는 더구나 그러했다.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기대할 곳이 없는 썰렁한 심정으로 ‘승복 아닌 체념’으로 상고를 포기하고 말았다.
<분지> 사건은 문화 예술 분야 내지 지식인 사회에 두려움과 보신주의를 확산시키는 데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본다. 문학이 역사와 현실에 강렬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당대의 지배세력과 충돌을 피하기 어렵다. 작가의 필화는 그 갈등과 충돌의 과정에서 역시 불가피한 생채기를 남긴다. 그 훈장 없는 전상자 제1호가 바로 작가 남정현이었다.
나는 1972년 6월, 한국앰네스티의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필화는 있어도 불행하고, 없어도 불행하다. 필화가 있다는 것은 규제자의 억압과 작가의 수난을 생각할 때 불행한 일이고, 필화가 없다는 것은 작가의 무력이나 문학 부재의 반사적 평온일 수도 있기 때문에 역시 불행하다.”
<2015-01-18>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5) 소설 ‘분지’ 필화사건 (下)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4) 소설 ‘분지’ 필화사건 (中)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3) 소설 ‘분지’ 필화사건 (上)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2) 경향신문 폐간탄압사건 (下)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1) 경향신문 폐간 탄압 사건 (中)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0) 경향신문 폐간 탄압사건(上)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9)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下)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8)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中)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7) 진보당 사건과 조봉암 (上)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6) 국회 프락치 사건 (下)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5) 국회 프락치 사건 (上)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4) 반민특위 사건 (下)
☞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 반민특위 사건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