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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나라 처지 불화로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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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서울 흥천사 감로도

전쟁 참혹성 민족의 생활상


여과 없이 사실적으로 묘사



포화에 휩싸인 전쟁터에서 앞으로 진격하는 군인들, 포탄을 난사하는 육중한 탱크, 신식법복을 입은 법관이 등장하는 재판, 조련사의 지시에 따라 코끼리가 재주를 부리는 모습, 전통 가마행렬까지…. 일제강점기 전쟁의 참혹성과 우리 민족의 생활상이 한 눈에 담긴 그림은 뜻밖에도 일반 풍속화가 아니라 감로도(甘露圖)라는 불화이다. 중생들에게 감로와 같은 법문을 베풀어 해탈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감로도는 현실의 희로애락을 다양하고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중에서도 1939년 11월에 제작된 서울 성북구 흥천사의 감로도로는 당시 암울했던 사회실상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어 전문가들의 연구 대상이 돼 왔다. 그러나 해방 이후 친일의 흔적이라는 오해를 받아 한동안 작품의 전모가 감춰지기도 했다. 흰 칠로 일부 장면(전쟁, 통감부, 신사 등)을 가리거나 종이로 덧댄 것이다. 다행히 심한 훼손은 없고 전반적인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최근 들어 이 감로도가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에 대한 비판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근현대시기 소중한 유물로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 불화는 당시 암울했던 사회실상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이 감로도는 비극을 상징하는 전쟁장면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보통 감로도에 전쟁 장면을 하나 정도 넣었는데 흥천사 감로도에는 모두 5장면으로 배치하고 있다. 공중에서는 긴박하게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아래에는 전사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또 다른 한 쪽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야간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하나같이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상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흥천사 감로도는 20세기 초 근대 생활 모습을 담고 있어 기록물로도 큰 가치를 지닌다. 당시에는 질옥(質屋)이라 불렸던 일본인이 운영하는 전당포가 성업을 이뤘다. 전당포는 식민지수탈정책에 운용된 일제강점기 금융기관의 하나였으며 민간 경제 파탄의 주범이었다. 이 불화에도 쇠창살을 경계로 냉정하게 금전관계가 이뤄지는 전당포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인에게 원성이 높았던 일본식 재판 등 일제강점기 이후 나타난 부정적 사회상들도 담고 있다. 다섯 명의 판사가 나란히 앉아있는 가운데 맞은편에는 양복을 입은 남자와 한복을 입은 여자가 서 있다. 이들은 재판의 원고와 피고로 보인다.


식민지 농촌의 풍경도 나와 있다. 양잠(누에를 사육해 고치를 생산하는 일)에 종사하는 모녀가 어두운 표정으로 누에에게 뽕잎을 조심스럽게 먹이고 있는데 어린 아기가 무언가를 자꾸 보채는 모습이다. 이처럼 각각의 장면을 주의 깊게 보고 있으면 그 당시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져 슬픈 생각이 스칠 정도다.

흥천사 감로도를 그린 남산병문(南山炳文)스님이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는 점도 이 그림에 담긴 비판 의식을 가늠케 한다. 장희정 대청호미술관 학예사의 ‘1939년작, 흥천사 감로왕도’라는 논문에 따르면 “병문스님은 제주도에서까지 불화제작의뢰가 들어올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12월 삼성암 밑에서 좌익이라는 죄목으로 우익에 의해 사살됐다고 한다”고 밝혔다. 감로도는 보응문성(普應文性)스님과 제자 병문스님이 함께 제작했다. 두 스님은 마곡사에서 수학했으며 금호당 약효(1846~1928)스님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흥천사 감로도는 여러 화사들이 참여해 그림을 완성했던 것과 달리 두 화승이 각각 나눠 처음부터 마무리까지 완성하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조선시대 감로도가 갖추고 있는 삼단, 즉 상단의 불보살, 중단의 의식행사, 하단의 아귀와 생활상 등의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작품 크기는 192×292cm이며 비단바탕에 채색을 했다. 불교문화재연구소는 “기본적 도상에 충실하면서 당대 시대상을 풍부하게 반영하고 있다”며 “근대기 유입된 신식화법으로 새로운 문물을 그려내 불교미술사적으로도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불교신문3075호/2015년1월21일자]


<2015-01-21> 불교신문


☞기사원문: “일제강점기 나라 처지 불화로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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