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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철’ 전성시대와 박정희 ‘친일 혈서’, 그리고 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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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45> 만주의 삼두마차, 만철·관동군·만주국

1906년 발족한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는 초고속 증식 세포처럼 만주 일대에 철도망을 깔았다. 러시아가 소유한 동청철도 노선을 빼면 만주는 일본이 부설한 철도망으로 인해 쇠줄로 꽁꽁 묶인 땅이 되었다. 만철의 철도망이 확장될수록 이를 지키기 위한 군 병력도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포츠머스 조약 세칙에 따라 일본은 만철 노선 1킬로미터(km)당 15명의 수비 병력을 둘 수 있었다. 일본은 철도 보호를 명목으로 독립 수비대 6개 대대를 창설하여 철도 연변을 따라 배치했다. 이 철도 수비대는 1919년 관동군 창설의 모태가 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아이 울음도 멈추게 했다던 일본군 정예 부대 관동군의 시초는 철도 경비대였다. 이후 관동군은 만철을 수족으로 부리며 대륙 침략과 식민지 독립운동 탄압의 핵심 기관이 된다.

만철은 운행 10년을 넘긴 1917년 또 한 번 사세를 확장하게 된다. 일본의 정책에 따라 만철이 조선 철도를 관장하게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 철도는 만철에 위탁되어 만철의 산하기관으로 편입되었다. 1911년 압록강 철교의 개통으로 조선과 만주가 이어지자 조선은 일본에서 대륙으로 들어가는 주요한 길목이 되었다.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의 짧은 뱃길은 상대적으로 긴 항해 끝에 도달해야 하는 다롄보다 경쟁력이 있었다. 1910년 조선을 먹어치운 일본은 이제 대륙 침략에 대한 야심을 더욱 노골화했고, 그 출발점인 조선 철도를 만철의 손에 맡김으로써 효용성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1919년 3월 1일은 한국 근대사의 분수령이 되었다. 1920년대 이후 거의 모든 항일 투쟁은 3.1운동의 정신이 만들어 냈다. 1910년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 이후 일제의 약탈은 치밀하고 광범위하게 자행됐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의 땅은 일본인 지주들의 차지가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회사령(朝鮮會社令)을 제정했다. 회사의 설립과 운영은 총독부의 허가와 관리 아래 가능했고 언제든지 총독부가 해산시킬 수 있었다. 일본은 삼림령, 어업령, 광업령으로 조선의 자원들을 약탈해 갔다. 당연히 조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고 일본에 대한 불만과 원성은 높아져 갔다. 절박한 생존의 문제에 직면한 조선 민중들은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연해주로 살길을 찾아 나섰다.

1917년 러시아에서 불어온 혁명의 기운이 조선 땅에도 퍼졌다. 1919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1차 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에 대해 파리강화회의에서 천명한 민족자결주의가 조선에도 전해졌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에 대한 패권을 가지고 있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이권은 전혀 포기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미국에 대한 우호적 감정과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실에 대한 인식 부재는 윌슨의 선언을 오독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당수 조선 사람들은 조선 민중이 독립을 결의하고 투쟁하면 국제사회가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독립운동은 200만 이상의 조선 민중이 들고일어난 대규모 항쟁이었다. 3월 1일 이후 약 두 달 동안 230개의 부와 군에서 1491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조선인들 중에 시위에 나가지 않은 자들은 소수의 친일파 자산가와 지주들뿐이었다. 학생, 농민, 노동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반도를 뜨겁게 달궜다. 1919년 서울에서는 ‘조선 독립’이라는 한국노동운동사상 최초의 정치적 목표를 내건 파업이 벌어진다. 

만철경성관리국 경성기관구 소속 차금봉은 철도원 생활 6년의 기관사였다. 차금봉은 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성 기관구 화부견습공으로 들어갔다. 14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소년 노동은 흔한 일이었다. 차금봉은 삽으로 증기기관차의 화구에 석탄을 넣고 물탱크에 급수를 하는 고된 견습 생활을 거쳐 마침내 기관사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전국적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차금봉은 용산 철도공장과 남대문 기관구, 남대문역(지금의 서울역)의 철도 노동자들을 규합해 대대적인 시위를 기획했으나 회사에 발각되어 바로 해고되었다. 차금봉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3월 22일 아침 남대문역으로 갔다. 전국 곳곳에서 3월 항쟁이 꺼지지 않고 진행되던 시기였다. 차금봉은 현재 소화아동병원과 철도공사 서울본부로 이어지는 삼거리의 만리동 서울역 앞 식당 거리로 갔다. 이곳은 서울역을 근거지로 두고 일하는 노동자들이 값싼 음식으로 허기를 달래던 곳이었다.

차금봉은 아침 식사를 하러 온 노동자를 한데 모았다. 지게꾼을 비롯한 잡역부, 철도 노동자, 전차 차장, 출근길에 나선 노동자,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8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차금봉을 따라 ‘조선 독립’을 외치며 행진을 시작했다. 3.1운동 대오가 이른 아침부터 만들어진 셈이었다. 행진에 나서자 대열이 불어나고 구경꾼이 몰려들었다. 행진 대열은 새문으로 불렀던 돈의문(서대문)을 향해 걸었다. 새문에는 경부선의 종착역이었던 서대문 정거장이 있었다. 서대문 정거장은 남대문역이 확장 공사를 거쳐 1915년 경성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뒤로는 사양길에 접어들었지만, 경인 철도 개업식이 열렸던 곳이며 경인선과 경부선의 종착역으로 이용된 기점 역이었다. 지금의 경찰청 맞은편 이화여고 앞쪽, 당시 주소로는 경기도 경성부 의주통 1정목에 자리 잡았던 서대문 정거장 앞을 지나간 시위대는 독립문을 향해 걸었다. 시위대의 소식은 금방 퍼져 새문 밖 사람들은 조선 독립 시위에 나선 새문 안 사람들을 맞이했다. 

3월 27일에는 차금봉이 주도한 철도 노동자 파업이 일어났다. 철도 노동자이자 조선인 기관사였던 차금봉은 해고자 신분으로 주도면밀하게 파업을 조직했다. 차금봉의 동료들인 남대문 기관구 기관사들을 포함해 공작창과 조차부 등 용산역 주변에 일터를 두고 있던 철도 노동자 800명이 서울역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조선독립 노동대회’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당당히 파업을 선언했다. 조선 노동운동사 최초의 조직적이고 정치적이며 항일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는 투쟁을 철도 노동자들이 수행한 것이다. 조선 민중이 권력의 주인이 된 독립된 조선을 꿈꾸며 항일 운동에 전념한 차금봉은 1929년, 10년 전 자신이 이끌었던 시위대가 도착한 독립문 옆의 서대문 형무소에서 일제의 고문 끝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3.1운동은 국내외 모든 조선인들의 가슴을 움직였다. 하와이부터 만주와 연해주까지 조선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조선 독립의 열망은 어디에서나 표출되었다. 성금이 모이고 단체가 결성됐다. 1919년 이후의 항일 운동은 3.1운동을 겪었거나 그 정신을 이어받은 ‘3.1운동 키즈’들이 주도해나갔다. 3.1운동은 유럽의 68혁명이나 한국의 1980년 광주, 1987년 6월항쟁 같은 한 시대의 전환점이었다. 

일본인·조선인, 만주로 만주로…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청나라가 망했다. 1912년 중화민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신생 공화국 중국 내부의 문제들은 간단치 않았다. 여러 지역에서 군벌들이 패권을 누리고 있었고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했다. 혼돈의 공간이었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만철은 꾸준히 그 영향력을 넓힌다. 만철이 사업을 확장한다는 것은, 곧 관동군의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의미했다. 1912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과 만철이 협약을 맺고 부산-장춘 간 직통 열차를 운행하게 된다. 만주로 가는 직통로가 열린 것이다. 이어 1913년 6월 10일부터는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하는 유럽 주요 도시로의 연락운수가 시작된다. 경성역은 베이징과 하얼빈, 모스크바와 베를린, 파리로 이어지는 국제 역이 되었다. 1917년 이후 조선과 중국 동북부,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노선을 모두 관장하게 된 만철은 황금기를 맞이했다. 만철은 철도만 운영한 기업이 아니었다. 세계 1차 대전의 전쟁 특수 호황기를 거치면서 제철업을 산하에 두었고 탄광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해운 사업에도 손을 댔다. 만철의 시점인 다롄 항을 기지로 다롄기선(大連汽船)이라는 해운사를 설립했다. 장춘 신탁거래소 같은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토목, 화공, 창고, 전기, 숙박까지 아우르며 만철은 거대 ‘그룹형 기업’으로 성장했다. 만철의 활약에 힘입어 조선인과 일본인의 만주 이주가 쇄도했다. 만주 이주는 1931년 9월 18일 발생한 만주사변과 그 결과로 등장한 만주국 때문에 가속화되었다. 

만주 지역의 군벌들과 협력, 혹은 갈등 관계를 갖던 일본은 더 이상 이 지역에 대한 이권을 군벌들과 나누길 거부했다. 일본은 관동군이라는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군벌들을 토벌한다. 만주사변의 계기는 역시 철도와 관계된 사건이었다. 일본군은 장쉐량이 지배하고 있던 동북군을 몰아내기 위해 자작극을 만들었다. 펑톈(봉천) 부근 만철 노선인 류타오후 지역 철로 위에 관동군 분대가 폭약을 설치해 이를 폭파한 것이다 폭파 현장 부근에는 동북군 군복을 입은 중국인 시체 3구를 가져다 놓았다. 관동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펑톈과 길림성에 대한 전격적인 군사 행동에 돌입했다. 기습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장쉐량의 동북군은 패주했고 만주는 일본의 차지가 되었다. 일본은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일본의 원격조종을 받는 만주국의 실제 관리자는 관동군이었고 만철은 관동군의 손과 발이 되었다. 

1930년대 일본이 만주를 장악하고 승승장구하는 듯 보이면서 조선인 항일 투쟁의 흐름도 바뀌게 된다. 만주에서 조선인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던 반일 무장 투쟁은 소멸되었다. 일본군의 강한 압박, 재정 파탄 등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독립 가능성에 회의를 갖게 되는 분위기가 돌았던 게 결정적이었다. 그들은 하나둘 투쟁을 접었다. 조선 내에서도 서서히 진행되던 일제에 대한 투항이 급격히 진행되었다. 민족의 지도자로 불리던 자들이 앞다투어 일본의 품에 달려들었다. 조선 독립을 외치던 입에서 천황 폐하의 만수무강을 비는 기원이 쏟아져 나왔다. 3.1운동의 정신을 담은 ‘기미독립선언서’를 쓴 최남선조차 변절의 길로 들어섰다. 최남선은 민족을 판 대가로 중추원 참의 직에 올랐으며 일제의 만주와 조선, 두 식민 지역이 하나 되어 천황의 뜻을 실현하자는 취지로 창간된 어용신문 <만선일보(滿鮮日報)> 고문, 만주국 건국대 교수 자리를 얻었다.

만주에서 민족주의자들이 포기한 항일 무장 투쟁의 불씨를 이은 것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에 합류하거나, 소련 국경을 넘어 소비에트 공산당군 88저격여단 등의 부대에 합류했다. 중국공산당은 1935년 코민테른의 반파쇼 통일전선 최우선 방침에 따라 반일 투쟁에 나서는 모든 세력과 연합 작전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 주도하의 항일연군에 조선인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인들은 일본군과의 전투뿐 아니라 일본어를 이용한 삐라 살포, 선무공작과 포로 심문 등 다양한 작전에 참가했다.

만주국이 수립되자 일본은 ‘만주개척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인들을 이주시켰다. 일본인만으로는 공급을 충당하지 못하자 조선인 만주개척단을 만들었다. 이미 조선 민중의 상당수는 일제의 식민지 강탈로 생존의 기로에 서 있는 상태였다. 일본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흘러들어와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것보다 만주로 이주시키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국책회사 만선척식공사(滿鮮拓殖公社)에 의해 강제 이주당한 조선 농민의 숫자는,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25만 명이나 되었다. 이들 조선인 만주개척단은 일본인 개척단의 하청 단위로 치부되었다. 조선인 개척단은, 만주의 중국인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빼앗는 침략자인 동시에 일본의 앞잡이로 간주되었다. 관동군 헌병대 입장에서는 항상 감시해야 하는 불량 집단이었고 만선척식공사 입장에서는 마음 놓고 수탈해도 되는 대상이었다. 중국 비적들은 군의 경비가 삼엄한 일본인 개척촌 대신 조선인 개척촌을 습격 대상으로 삼았다. 이중 삼중의 고난은 조선인이 만주행 열차에 강제로 태워질 때부터 예정된 운명이었다.

만주행 열차에 조선 사람들이 강제로 태워진 것만은 아니었다. 일부 조선인은 일본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만주에 들어갔다.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의 신민으로 성장한 조선의 젊은이들은 선택할 미래가 별로 없었다. 이등 국민으로 태어난 태생적 한계로 인해 학병이나 노무자로 강제 동원되거나 일본의 하급 행동대원으로 사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민족적 자각이나 계급의식의 전환을 겪은 일부의 젊은이들만 제3의 길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국의 출범은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한몫 잡을 수 있다는 도전의식을 갖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1937년, 만주국을 앞세워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조선 젊은이들의 피를 필요로 했다. 

관동군은 중국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만주 일대의 조선인 항일 무장투쟁 세력의 괴멸도 주요한 목표로 삼았다. 관동군은 중국공산당과 조선인들이 결합한 항일연군에 대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진압 작전을 벌였다. 이런 작전에 혁혁한 전과를 세운 것은 만주국 군인으로 참전한 조선인들이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령이 내려졌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 ‘황군(皇軍)’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본군이 된다는 것은 천황의 은혜를 입는 것이며, 이등 국민으로서 가진 한계를 뚫고 탈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만주로 몰렸다. 제국의 신민으로 출세를 간절히 원하던 조선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엘도라도로 떠오른 만주행 열차에 올랐다. 황군에 지원하는 청춘들은 이광수, 모윤숙, 정비석을 비롯한 수많은 조선 지식인들의 열렬한 격려와 칭송을 받았다. 

“군대 생활을 마치고 오는 날은 전혀 신인이 되는데 이 신인화야말로 2300만이 모조리 통과하여야 할 필연당연의 과정인가 합니다. 일언이폐지 왈 ‘천황께 바쳐서 쓸데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즈음도 통용되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의 원조는 춘원 이광수였다. 이광수가 말하는 완성된 인간은, 천황께 바쳐져 잘 쓰이는 사람이었다. 

조선인 만주국 군인들 상당수는 1939년 3월 출범한 만주국 치안부 산하의 특수 부대에 배치되었다. 간도특설대라 불리는 조선인 부대는 관동군이나 만주국 산하에 민족별로 만들어진 부대 중 가장 뛰어난 전투력을 발휘했고 위상도 높았다. 간도특설대 출신 조선인 장교 중 하나인 백선엽 장군의 회고를 들어보자.

“펑톈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1942년 봄에 임관하여 자무쓰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후 간도특설부대의 한인 부대에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백선엽 회고록 <군과 나> 중)


“우리들이 쫓아다닌 게릴라 가운데 조선인이 많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요구하며 싸우고 있는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려는 일본의 책략에 그대로 끼인 모양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되어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백선엽 <대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 중)

한국전쟁에서 북한 인민군에 맞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백선엽 장군의 간도특설대 동료 중에는 신현준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비롯해 한국군 육군과 해군의 고위 장성들이 망라되어 있다. 이들이 청춘을 바쳐 헌신한 만주 토벌 작전은 초토화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항일 무장투쟁대의 섬멸을 목표로 했다. 실제로 만주에서 무장 독립투쟁은 간도특설대의 활약, 관동군과 만주군의 대대적인 압박 속에 소멸해 갔다. 관동군 헌병대가 달마다 만들어 토벌부대에 배포한 <사상대책월보>에는 만주 일대의 ‘공산 비적’ 분포도와 주도자를 지명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의 ‘공비’ 분포도에는 김일성, 박덕범, 한려허 등의 항일 공산주의자들이 제거의 대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무장 게릴라 활동이 힘들어지자 소비에트 연방공화국 하바롭스크로 들어가 소련군 산하 88저격여단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복무한다. 어찌됐든 만주군 간도특설대의 토벌 작전은 이후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 시기 남한 지역의 공산 무장 게릴라 부대 소탕 작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또 하나의 조선인이 있었다. 청년 박정희는 청운의 꿈을 안고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 도착했다. 박정희는 군인을 동경했다. 조선에서 일본 군인이 누리는 권한과 그 위세를 목격한 야심 많은 젊은이에게 군은 꿈에 그리는 이상이었을 것이다. 1940년 4월 사범학교 교사직을 내던지고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신경 2기생으로 지원한 박정희는 입학 과정 자체가 드라마틱한 ‘인간 승리’의 과정이었다. 22세의 나이는 연령 제한에 걸렸고 기혼자라는 장벽도 넘어야 했다. 그러나 젊은이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만주군관학교 지원자 원서 접수를 받는 만주국 치안부 군정사 징모과에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이 편지에는 “일사봉공 박정희”라는 피로 쓰인 혈서가 들어 있었다. 

일본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을 만한 정신과 기백으로 한 일사봉공의 굳은 결심과,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충성을 다할 각오가 편지에 담겨 있었다. 이 편지는 징모과에 의해 정중히 거절되었지만 10월의 재도전에서는 당당히 합격하게 된다. 사범학교 재학 시절 박정희의 교련 담당 교사였던 아리카와 게이이치가 관동군에 배속되면서 박정희의 입학을 도왔다고 전해진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 박정희는 조선인의 때를 벗기 위해 다카키 마사오로 이름을 바꾼다. 징모과에 보냈던 박정희의 편지는 진심이었다. “천황 폐하께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면에서 그는 일본인보다도 훨씬 일본인답게 행동했다”고 박정희, 아니 다카키 마사오를 지켜본 만주군관학교 교장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은 말했다. 

만주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다카기 마사오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만주군 보병 제8사단 소위로 임관한다. 다카기 마사오 소위는 자신의 이름에 아직 조선인의 흔적이 남았다며 완전한 일본식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로 개명한다. 오카모토 미노루는 천황의 국가 만주국의 군인으로서 자신의 부대에게 주어진 임무였던 팔로군 토벌에 나섰다. 박정희는 1945년 7월 만주국 중위로 진급하는 기쁨을 누렸지만 거기까지였다. 한 달 뒤 일본의 패망으로 더 이상 높은 계급장을 어깨에 달 수 없는 운명이 되어 버렸다.


▲ 1939년 3월 31일 자 <만주신문> 사본. 박정희가 일본에 충성하는 혈서를 작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만주철도와 얽혀 있는 동아시아 권력 지형

만주사변 이후 만철은 또 한 번의 확장기에 들어간다. 1932년부터 1943년까지 5000킬로미터의 철도망이 새로 깔렸다. 여기에 1934년 9월 소련과 오랜 줄다리기 교섭 끝에 동청철도로 불렸던 동중국철도를 사들였다. 비로소 만주의 모든 철도망은 만철의 것이 되었다. 러시아가 건설한 동청철도는 러시아 철도 규격에 따라 궤도 간격이 넓은 광궤여서 표준궤의 만철과 직통 운전이 불가능했다. 만철은 동중국철도를 관리하게 되자마자 신징-하얼빈간의 동청철도 노선 200킬로미터 구간을 3시간 만에 광궤에서 표준궤로 바꾸는 공사를 해치워버렸다. 완저우리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동중국 철도의 본선도 곧이어 표준궤로 전환됐다.

만철의 만주철도 완전 장악은 만주국의 승승장구를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였다. 만주국 대표로 소련과 교섭에 나서 동중국철도 매입을 성사시켰던 총무장관 호시노 나오키는 만철의 만주 제패를 “만주국 역사에 빛날 최고의 날”이라며 감격해했다. 

만주국의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였던 만철의 싱크탱크는 만철조사부라는 전략집단이었다. 만철조사부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 일대의 모든 지역을 답사했다. 지형, 지질, 자원, 각 도시와 마을의 인구 밀도 등 식민지 유지에 필요한 빅데이터를 자연스럽게 확보할 수 있었다. 

만철 조사부는 철도만이 아니라, 만철이 관장하는 모든 사업을 기획하고 경영 방침을 마련하는 콘트롤타워 역할까지 했다. 만철 조사부는 만주 사변 이후 경제조사회로 조직 개편을 한다. 관동군은 만철이 확보한 정보력을 직접 관리하고 싶어 만철 경제조사회를 관동군의 하부 기관으로 두는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경제조사회는 만철의 기관이면서 관동군의 정책기관이기도 한 반민반군 형태의 이상한 조직으로 거듭났다. 만철에는 일본 본국과는 다른 기업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 일본 본토의 기업이 정장 문화라면 만철은 캐주얼 같은 것이었다.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고 상상할 수 있는 바를 쉽게 내놓을 수 있었다. 교토대학 공학부를 나와 1937년 만철 중앙시험소에서 일하게 된 네기시 료지의 증언이다.

“‘만철맨’은 당시 민주적이었습니다. 아래 사람들이 생각보다 쉽게 말할 수 있었고, 간부가 선선히 식사에 초대해 주셨어요.” (나카미 다사오 등, <만주란 무엇이었는가> 중)

지금도 경직되어 있는 한국의 기업 문화를 볼 때 1930년대 만철의 자유로운 분위기는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었다. 이것은 만주를 기회와 개척의 땅으로 여긴 일본인들이, 무한한 도전의 대상으로 만주를 상정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분방함도 한몫했다. 만철조사부 시절부터 ‘만철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린 방법론으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로자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 야마다 세이타로의 <일본 자본주의의 분석> 등을 기초로 중국과 만주 사회를 연구했다.

만철의 이런 분위기는 결국 관동군에게 철퇴를 맞게 된다. 1942년 관동군 헌병대의 주도면밀한 포석으로 만철의 적색분자를 검거하는 ‘만철사건’이 일어났다. 관동군은 계속 수사를 확대해 1943년까지 만철사건을 통해 만철 조사부 44명을 “좌익 운동” 혐의로 검거했다. 이를 기점으로 만철 경제조사부는 사실상 붕괴했다.

만철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스포츠까지 아우르는 거대 왕국으로 자리 잡았다. ‘만영’이라고 불렀던 만철 영화제작소는 여러 편의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만들어 철도를 통해 보급했다. 만주사변 시에는 관동군의 종군 기록 필름을 제작했고 만주국 출범 이후에는 더욱 왕성한 영화제작 활동에 들어간다. 중일전쟁 시기에는 아예 만주국이 총괄하는 영화 제작 집단으로서 만영이 탄생한다. 초기 자본금 500만 엔은 만주국과 만철이 절반씩 나누어 부담했다. 

만철은 관동군, 만주국과 함께 만주 지배의 세 축 중 하나였다. 만주국은 국책 목표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입안했다. 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은 1936년 열린 탕캉츠 회의에서 출발한다. 탕캉츠는 만철노선 안산역 인근의 온천으로, 이곳에서 만철 경제조사회, 일만재정경제연구회, 만주국, 관동군이 참여하는 “산업 개발 장기 계획”안이 논의된다. 이 초안은 만주국 산업계의 거두이자 만주국 총무처 차관인 기시 노부스케에 의해 구체화되어 1939년 만주국 ‘산업 개발 5개년 계획’의 이름으로 실행된다. 기시 노부스케는 전후 일본 총리까지 올라 일본의 재무장을 금지한 평화헌법 체제에 문제를 제기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전쟁 범죄에 대한 일본의 반성보다 ‘황국’의 영광스런 추억이 훨씬 소중한 사람이었다. 이 기시 노부스케가 1961년 일본 총리관저에서 전 총리의 자격으로,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웃나라 한국의 실권자를 만났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에게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다짐했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는 같은 시기에 만주에 있었다.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한국의 경제 개발 모델로 기시 노부스케가 추진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들여온다. 만주국 장교로서 만주국의 시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박정희였다. 한국의 발전 모델로 만주국을 떠올리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현재 남북한과 일본의 권력자들을 보면 만주의 자기장이 얼마나 강력하게 세월을 이어 작용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냉전 시절 남과 북의 독재자 박정희와 김일성은 만주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사이였다. 만주의 항일 투사 김일성에서 시작되어 3대를 이은 김정은은 현재 북한의 최고 통치자다. 만주의 경험을 공유한 만주국 출신 한일 두 유력자의 영향력도 대를 이어 이어진다. 기시 노부스케가 원했던 평화헌법 폐기와 일본의 군사 대국화는 그의 손자인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에 의해 강력히 추진되고 있다. 한국의 현직 대통령 또한 만주의 그림자를 짊어지고 있던 전 대통령의 딸이다.

<2015-01-25> 프레시안

기사원문: ‘만철’ 전성시대와 박정희 ‘친일 혈서’, 그리고 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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