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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16) 동백림 거점 대남 공작단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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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동베를린서 대북 접촉” 이응노·윤이상 등 23명 간첩죄 기소


■ ‘한국 외교사에서 가장 잘못된 사건’


이 글을 준비 중이던 지난 18일, 서울의 한 일간지에 공로명 전 외무부 장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한국 외교사에서 가장 잘못했던 일을 꼽아 보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역시 박정희 정권 때 일로 1967년 동베를린 사건(한국 동포·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이다. 남의 나라에 가서 (사람을 납치해오며) 주권을 행사하려 했다.”


우연찮게 나는 그 두 사건의 진상 규명에 관여한 일이 있었기에 공감되는 바가 많았다. 나는 바로 그 동백림 사건의 변호인이었고, 또 김대중 납치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단체의 책임자로 일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이하 중정)는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적화공작단 사건’의 전모와 그에 대한 수사상황을 발표했다. 김형욱 당시 중정부장이 직접 기자들 앞에 나와 발표한 그 사건의 내용은 매우 엄청난 것이어서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했다. 발표는 그날 한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전후 7차에 걸쳐 순차적, 파상적으로 계속되어 세상을 온통 얼어붙게 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7차에 걸친 파상적 발표, ‘사상 최대의 간첩단 사건’

중정의 발표에 의하면 이 사건에는 서독과 프랑스에 거주 또는 유학 중이거나 유학한 적이 있는 15명의 교수를 비롯해 의사, 예술인, 언론인, 공무원 등 많은 지식인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들에 대한 혐의의 요지인즉, 1958년 9월부터 1967년 5월까지 동백림에 있는 북괴 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해왔고, 북괴로부터 공작금을 받았으며, 남북의 평화적 통일방안을 선전하고 적화통일 분위기를 조성, 결정적 시기에 남한에서 무장봉기를 기도하기 위해 암약해왔다는 것이었다. 조금 더 부연하면, 1)유럽에 거주하고 있는 윤이상·이응노 등 문화예술인, 국내의 황성모·임석진 등 학계 인사, 김중태·현승일 등 6·3 학생운동 세력 등과 의사·공무원·유학생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는데, 2)그들 중 일부는 1958년 9월부터 동백림에 있는 북괴 대사관을 드나들면서 이적활동을 하였는가 하면, 입북하거나 노동당에 입당한 뒤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 사건의 발단과 배경 및 외교적 파장

그런데 이 사건의 검거 발표가 있은 뒤 국내외적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뒤따랐다.

1)이 거창한(?) 사건의 용의자들은 대부분 중정 요원들이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직접 연행해 온 사람들이어서 거주국 정부로부터 주권 침해의 불법행위라는 강력한 항의가 제기되어 심각한 외교문제로 번졌다.

2)국내적으로는 당시 6·8 국회의원 부정선거로 집권 측에 대한 국민의 비난이 높아지면서 야당 의원들의 등원 거부와 학원가의 대규모 정부 규탄 시위가 격화된 때여서 정부가 국면전환을 위해 공안정국을 조성하고자 검거선풍을 일으켜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3)중정의 수사과정에서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자행되었다는 호소와 비난이 잇따랐는가 하면, 나중에는 사법권의 독립과 관련된 의혹마저 제기되어 나라의 체면이 적지 않게 흔들렸다.

이 사건은 1967년 5월, 명지대 조교수 임석진(36)이 서독 유학 당시 북한 측과 접촉했던 사실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자복(自服)한 것이 단서가 되었다고 알려졌다(그는 제보의 공로가 참작된 덕인지 ‘공소보류’ 처분을 받고 기소되지 않았으며, 재판 때에는 증인으로 법정에 나왔다). 그의 제보에 따라 중정의 특수공작팀이 유럽에 거주하면서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 측과 접촉한 유학생 등 한국인들을 국내로 연행 내지 이송하는 일대 작전이 실행되었는데, 그 인원은 유럽 5개국에서 도합 30명에 달하는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 피고인들 면면, 41명 중 23명이 간첩죄로

중정은 검·경·군 합동조사본부의 수사결과에 따라 66명의 피의자를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에 송치했고, 검찰은 그중 41명을 기소(뒤에 언급하는 ‘민비연’ 사건 포함)했는데, 간첩죄가 적용된 사람만 23명이나 되었다.

주요 인물들을 보면 구속 피고인으로는 윤이상(50·음악가), 정하룡(34·경희대 조교수), 조영수(34·전 동국대 강사), 김옥희(30·여·전 청와대 경호실 통신원), 이수자(41·여·윤이상의 처), 최정길(28·서독 에센대 경제학과 3년), 강빈구(35·서울대 상대 조교수), 천상병(38·시인), 임석훈(32·서백림공대 박사과정), 이응노(64·화가), 박인경(42·화가·이응노의 처), 정규명(39·서독 프랑크푸르트대 연구원), 박성옥(36·서독 광부) 등이 있고, 불구속 피고인으로는 주석균(65·전 한국농업문제연구소장), 이순자(37·전 국회도서관 임시직원), 어정희(43·서울 교인병원 간호원) 등이 있었다.

정부 수립 후 가장 규모가 큰 간첩사건으로 선전된 이 사건의 첫 공판은 1967년 11월9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3부(재판장 김영준 부장판사) 심리로 대법정에서 열렸다. 나는 이응노 화백과 그의 부인 박인경 피고인의 변호인으로서 법정에 나갔다.

■ 작곡가 윤이상, 쌍용총 고구려 벽화 보려고

34명이나 되는 동백림 사건 피고인들 가운데 재독 작곡가 윤이상과 재불 화가 이응노가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윤씨는 1958년 8월, 한 국제음악제에서 만난 동독의 여자 대학생에게 월북한 친구의 소식을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10여차례 동백림을 다녀온 일이 있다고 법정에서 진술했다. 헬싱키에서 열린 세계공산청년축제에 참가한 뒤에는 부부동반으로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당국자로부터 미화 수천달러를 받은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그가 접촉한 이원조라는 사람이 북한 공작원이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었고, 미화를 받은 것도 예술가에 대한 호의의 표시로 알았을 뿐 그것을 공작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고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북한을 방문한 동기를 묻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 과연 예술가다웠다. 그는 “용강에 있는 쌍용총의 고구려 벽화를 보고 싶어서 갔다. 벽화에 나타나 있는 고구려인의 기상을 직접 보게 되면, 내가 민족의 대서사시를 담은 음악을 작곡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고 답변했다. 나는 분단의 벽을 극복하려고 한 저 예술가의 염원을 재판부가 과연 얼마나 이해해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박 대통령 중임 경축행사 초청이라고 속여

이응노 화백의 경우도 역시 분단의 아픔이 배어 있는 사연이었다. 그가 동백림에 있는 북한대사관 사람과 만난 것은 6·25 때 행방불명된 아들이 북한에 살고 있다며, 아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북쪽 공관원의 말에 끌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구치소에서 변호인인 나와 처음 만났을 때 매우 흥분하고 있었다. “내가 서울에 끌려와서 왜 이런 모욕을 당해야 하느냐? 박정희 대통령의 중임 경축행사에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한 공로자로서 나를 초청한다기에 따라왔는데, 대통령의 이름까지 내세운 속임수는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중정은 윤이상에 대해서도 국내 초청이라는 거짓말을 하여 그를 한국대사관이 있는 본으로 유인했으며, ‘한국에 가서 간단한 조사를 받고 오면 된다’는 식으로 설득해 한국행을 수락하게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실로 말미암아 서독 정부는 한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기에 이르렀고, 공판 때마다 법정에 서독 관계자들이 나와 공판의 참관 방청은 물론 국내 언론에는 금지된 무비 카메라 촬영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의 재판절차가 끝난 뒤에도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외교적인 압력을 가해 형의 집행정지 등 형식으로 관련자들의 조기 석방을 관철했다. 외교적 마찰의 와중에 서독 주재 한국대사 최덕신이 소환(사실상 추방)되는 불상사까지 있었다.

■ 간첩죄 기소 23명, 최종심 간첩 유죄 0명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대체로 시인하거나 일부를 부인하기도 했는데 이른바 자신의 ‘범의’나 상대방에 대한 인식에서 공소장과 차이를 드러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정하룡 피고인의 경우를 보면 이러하다. 그는 동백림에 들어가 북괴대사관의 이원찬을 만났고, 그의 권유로 평양에 갔다. 대남공작간부의 권고로 노동당에 입당했으며, 돌아올 때 미화 1000달러를 받았다. 그 후 다시 입북해서 밀봉교육을 받고 귀국했으나 적극적인 간첩활동은 하지 않았다. 대체로 이런 정도였다. 조영수 피고인도 자기가 평양에 간 일은 있고 돈도 받았으나 공작금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거기서 암호 교육을 받거나 노동당에 입당한 것처럼 되어 있으나 피동적이었다. 간첩으로 모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말했다.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 사건에서는 동백림 방문 50명, 북한 방문 12명, 북측으로부터 금품수수 26명, 특수교육 이수 17명, 북측 요청사항 이행 12명 등으로 밝혀져 세간의 의혹과 달리 수사결과 발표가 일부 사실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피고인들의 단순한 대북 접촉 및 동조행위까지도 국가보안법 제2조 및 형법 제98조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였으며, 많은 사람을 간첩으로 오인케 하였다는 지적이 나왔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국정원 ‘진실위’ 보고서 총론(1)).

실제로 검찰은 중정으로부터 두 번에 걸쳐 송치받은 피고인 41명 중 23명을 간첩죄 또는 간첩미수죄로 기소했으나 최종심(재상고심)에서 간첩죄로 유죄가 확정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2015-01-25>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6) 동백림 거점 대남 공작단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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