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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17) 동백림 거점 대남 공작단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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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친구 강빈구 신고 안 했다고… 천상병 시인 전기고문 고초


■ 동백림사건 연계 혐의로 기소된 서울대 ‘민비연’ 사건

서울지검 공안부는 동백림사건에 관련하여 중정으로부터 2차로 송치받은 소위 민비연(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 관계자 7명을 별도로 구속 기소했다. 중정은 민비연을 동백림사건과 연계된 조직으로 발표하였는데, 거기엔 서울대 황성모 교수가 연결 고리로 설정되어 있었다. 황 교수는 독일에 유학하여 학위를 얻고 귀국하였는데, 중정은 그가 유학 당시 동백림에서 북한 측에 포섭되어 북한의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귀국 후 민비연을 조직하고 그 지도교수로서 학생 시위를 선동하여 정부를 전복하고 사회주의정권의 수립을 기도하였다고 발표했다.


민비연은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학생들의 연구 서클이었는데, 그때 기소된 피고인은 다음과 같다. 황성모(41·서울대 문리대 교수·민비연 지도교수), 김중태(25·신민당 운영위원·민비연 2대 회장), 현승일(24·서울대 출판부원·민비연 3대 회장), 이종률(26·동아일보 기자·민비연 초대 회장), 박범진(26·조선일보 기자·민비연 3대 총무부장), 박지동(27·동아일보 기자·민비연 5대 회장), 김도현(23·무직·민비연 회원).


이들은 훗날 정치·사회·언론 등 각계에서 자주 이름이 거론되는 인물들이었다. 그중 황성모는 간첩죄와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로, 나머지 사람들은 반국가단체의 구성 또는 가입, 지도적 역할 수행 등 혐의로 기소되었다. 요컨대 ‘민비연’이 반국가단체라는 전제 아래 재판에 회부되었던 것이다. 실은 1964~1965년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격화되었을 때 김중태·현승일이 이끄는 민비연이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조직으로 널리 알려져 검거된 바도 있다.(제2차 민비연 사건)


▲일러스트 | 박건웅


■ 검사 구형, 사형 6명에 무기징역도 4명이나


동백림사건 피고인 34명에 대한 첫 공판은 1967년 11월9일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이날 법정 안팎에는 국내외의 많은 보도진과 피고인의 가족·친지 등 방청객 200여명, 그리고 피고인 사이사이에 끼어 앉은 50여명의 교도관으로 초만원을 이룬 가운데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법정 중앙 단상에는 서울형사지법 합의 3부 법관들(재판장 김영준 부장판사)이 착석했고, 검사석에는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부장검사 이종원, 검사 이준승·이창우)이 자리 잡았으며, 그 맞은편 변호인석에는 김갑수·한격만·이용훈 등 29명의 변호사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재판은 피고인 34명에 대한 검사, 변호인, 재판부의 신문에 이어 증인신문을 하는 등 사실심리와 증거조사에 전후 10회나 공판이 계속되는 대장정이었다. 피고인들의 진술은 개인차가 있기는 했으나, 대체로 사실관계는 시인하면서도 상대방(북측 사람들)의 정체나 지령 및 반국가적인 의도나 언동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공통점을 보였다. 증인으로는 검찰 측에서 신청한 이용택 중정 수사과장 등 3명, 변호인 측에서 신청한 윤태림 숙명여대 총장 등 7명을 신문했다.


결심공판은 12월6일 오전에 열렸는데, 이종원 부장검사는 장장 1시간30분에 걸친 준엄한 논고를 한 끝에 피고인들에게 엄청난 중형을 구형했다. 즉, 사형 6명(정하룡·조영수·천병희·윤이상·최정길·정규명), 무기징역 4명(어준·강빈구·임석훈·이응로), 징역 15년 1명(김중환), 징역 10년 4명(이순자·김옥희·강혜순·박성옥), 나머지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징역 2년 내지 7년이 구형되었다.

■ ‘이게 무슨 간첩사건이냐’ – 변호인들 입을 모으다

일부 변호인들은 법정 최고형이 사형으로 되어 있는 간첩죄 부분에 대하여 강하게 무죄를 주장했다. 그 대표적인 변론 요지는 이러했다. “이 사건은 간첩사건이 아니다. 피고인들(정하룡·이순자)의 행위가 간첩활동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문인구 변호인) “검찰은 이 사건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조영수·김옥희 피고인들이 간첩행위를 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다.”(박승서 변호인) “윤이상 피고인은 한국 실정을 잘 몰랐으며, 다만 고분과 벽화를 보기 위하여 평양에 간 것이다.”(황성수 변호인) 이응로 부부의 변호인인 나는 간첩 혐의 부분은 물론 일련의 행위에서 ‘반국가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정(情)을 알지 못했음’을 역설했다.


사실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과 법정 진술을 종합해보면, 일부 피고인들에게 씌워진 죄명(적용법조)은 너무도 억지스럽게 보였다. 가령 간첩죄로 기소된 이들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공소사실의 끝머리 문구는 “…전시 북괴의 지령사항을 각 수행함으로써 간첩하고”라고 되어 있으나, 소위 ‘지령’이나 ‘제공한 정보’의 실체를 뜯어보면 사회통념과 법리에 비추어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허점이 쉽게 간파되는 것들이었다.


▲1967년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동백림사건 공판에 들어가지 못해 서성이는 사람들.


■ 검사 주장에 화답한 엄벌의 융단 폭격 – 1심 판결


제1심 선고 공판은 (1967년) 12월13일 오전에 열렸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은 그대로 현실이 되어 검사의 주장이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중형의 융단폭격처럼 되고 말았다. 간첩 혐의도 거의 공소사실대로 유죄로 보아 조영수·정규명 등 두 사람에게는 사형이, 윤이상·정하룡·강빈구·어준 등 4명에게는 무기징역이, 천병희·최정길·김중환에게는 징역 15년이 각 선고되었다. 나머지 22명에게는 징역 1년 내지 10년이 선고되었는데, 피고인 중 이수자·박인경·김종대·주석균·천상병 등 11명에 대하여는 형의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

이와 같은 1심 판결에 대해서는 18명의 피고인이 항소를 하였으며 (검찰에서도 여러 피고인에 대하여 항소), 서울고등법원 형사부(재판장 정태원 부장판사)에서 2심 재판을 담당하게 되었다. 작곡가 윤이상은 (1968년) 2월27일, 재판부의 병보석 허가로 몸이 풀려났다.


■ 이응로 화백, 5년(판결)이 무기(구형)보다 길 수도


재판 내용에 대한 메마른 설명이 길어져서 잠시 재판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할까 한다. 내가 변호를 맡은 이응로 화백은 1심에서 검사의 구형이 무기징역이었는데, 판결은 징역 5년이 선고되었다. 기자들과 친척·친지들이 구형에 비해서 아주 가벼운 형을 받았다며 나에게 고맙다고들 했다. 나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했다. 이미 60대 중반의 나이(64세)가 되어 한국인 남자 평균수명(1960년대 51세)을 훨씬 넘긴 이 화백에게 무기징역이나 5년 징역이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5년이 종신 무기보다 오히려 더 길 수도 있지 않은가? 결국 1심 판결의 형량은 검사의 구형보다 무겁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이 나의 논법이었다. (나는 실제로 항소심 법정에서 그런 주장을 폈는데, 그 때문인지 형량이 2년 줄어서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


■ 한국 문단의 3대 기인 천상병 시인의 인간 드라마


다음으로 시인 천상병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본다. 그는 같은 서울대 상대 친구인 강빈구 피고인을 공갈하여 돈을 갈취하고, 그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불고지죄로 기소되었다. 그는 강빈구에게 ‘중정에서 나더러 동독 갔다 온 사람을 대라고 해서 난처하다’는 말을 함으로써 겁을 주어 강씨로부터 금 6500원을 받았고, 그 후에도 술값으로 100원 내지 500원씩 도합 3만원을 받음으로써 갈취를 하였다는 것이었다. 대학 친구를 협박하여 2년 동안 갈취(?)한 돈의 합계가 3만6500원이었다니, 그것은 한 편의 코미디였다. 어쨌든 나는 글동네 친구의 정으로 변호를 자청했다. ‘한국 문단 3대 기인’ 중의 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던 그는 시인으로는 뛰어났음에도 가난하다 보니, 아는 사람을 만나면 으레 손을 내밀곤 했다. 우리는 그런 버릇을 ‘수금’이라고 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의 대한민국 법정은 그런 정도의 기행조차도 형법상의 공갈죄로 처벌했다. 형의 집행유예로 풀려 나온 뒤, 그는 항소도 포기하고 시골 유랑길에 올랐다. 전기고문의 후유증에다 영양실조까지 겹쳐 길거리를 헤매던 그는 한때 행방불명 된 채 소식이 끊겼었다. 그가 이 세상을 하직했다고 생각한 문우들이 뜻을 모아 그의 ‘유고 시집’ <새>를 내기까지 했는데, 나중에 살아서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행려병자의 행색을 하고 다니다가 서울의 한 시립병원에 강제 입원을 당했던 것이다.


■ 민비연 사건 – 고문에서 무죄까지


한편 동백림사건의 국내 연계 조직으로 기소된 앞서의 민비연 사건은 동백림사건과는 별도로 (1967년) 11월16일 첫 공판이 열렸다. 피고인들은 북괴 지령에 의한 반국가단체 구성 및 한일회담 반대 시위 등을 통한 박정희 정권 전복 기도 등의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였다. 6·8 부정선거에 대한 대학가의 반대 시위가 ‘북괴의 조종’에 의한 것이라는 검찰의 주장은 재판과정을 통해서 그 허구성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1심에서는 황성모에게 간첩죄가 아닌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 조항을 적용하여 징역 3년, 김중태에게 징역 2년의 유죄판결을 하고, 나머지 5명의 피고인들에게는 무죄가 선고되었다. 검찰의 집요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간첩 황성모가 만든 민비연이라는 반국가단체가 국가 전복을 기도했다’는 하급심의 일부 유죄판결은 대법원(재판장 송동욱, 주심 나항윤 대법원판사)의 파기 환송에 따른 재항소심을 거쳐 종국적으로 전원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상이 이른바 ‘제3차 민비연 사건’의 진상이자 귀결이었다.


황성모 교수는 훗날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6·8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한창이던 6월18일, 중정에 붙들려가 남산과 이문동을 오가며 꼬박 2주일간 조사를 받았다. 허위자백을 거부하자 끝내는 거꾸로 매달려 물고문을 당했고, 빨리 실신하는 편이 차라리 편하다는 요령도 터득했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1991년 7월5일자)

<2015-02-01>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7) 동백림 거점 대남 공작단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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