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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 ‘파기 환송’한 대법 판사 겨냥 ‘북괴 앞잡이’ 괴벽보 나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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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의혹과 진실 – (18) 동백림 거점대남 공작단 사건 (下)


■ 대법원의 파기 환송 판결인즉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법원의 판결에 별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2심 판결은 ‘역시나’였다. 1심과 마찬가지로 피고인 전원 유죄에다 일부 형량만 높이거나 낮추는 정도였다. 즉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정하룡·임석훈은 사형으로 바뀌었고, 반대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조영수는 무기징역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윤이상은 징역 15년으로 낮추는 선에서 2심은 끝났다(1968년 4월13일).


그런데 상고심에서는 기대하지 않았던 이변(?)이 일어났다. 즉 1968년 7월30일 대법원(재판장 김치걸, 사광욱·최윤모·주운화 대법원판사)은 원판결(서울고등법원 판결) 중 피고인 정하룡·조영수·김중환·천병희·윤이상 등 12명에 대한 각 유죄 부분을 파기하고, 그 사건을 원심인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한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원심이 일부 피고인에 대해 반공법상의 회합죄와 잠입죄,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 등을 유죄로 인정한 것은 잘못이며, 일부 피고인에 대한 양형(윤이상 징역 15년, 임석훈 사형)도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이 요지였다. 검찰은 보안사범이나 간첩사범을 처벌하는 데 큰 차질을 초래하는 좋지 못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내세우며 크게 반발했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빨갱이 판사 몰아내자’ 잇단 괴벽보·괴문서


이런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자 서울 시내에 ‘애국시민회’ 명의로 ‘김일성의 판사를 잡아내라’ ‘북괴와 야합하여 기회를 노리는 붉은 도당을 처단하라’는 전단이 뿌려졌다(8월2일). 이어서 대법원 바로 옆에 있는 배재중학교 담장을 비롯해 법무부, 반도호텔, 태평로 일대에 역시 애국시민회 이름으로 된 괴벽보가 나붙었다. 거기에도 대법원 판결을 비난하는 살벌한 문구가 넘쳐나고 있었으니, ‘물적 증거가 없다고 무죄라는 것은 공산당을 감싸주기 위한 구실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일성의 앞잡이 김치걸, 주운화 판사를 처단하라’ ‘북괴의 앞잡이 사법부를 갈아내라’ ‘합법의 미명 아래 북괴 장단에 춤추는 빨갱이를 잡아내자’는 등의 격한 표현들이었다.

심지어 조진만 대법원장에게까지 ‘사법부 안에 용공판사를 두어서 되겠느냐’는 괴문서가 우송됐다. 앞서의 4명의 대법원판사에게는 서울 시내 곳곳에 뿌려진 전단이 우편으로 배달되었고, 주운화 대법원판사의 부인에게는 ‘내조하는 부인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느냐’는 편지가 우송되었다. 이런 일련의 괴문서 사태는 대법원 판결 3일 뒤인 (1968년) 8월2일부터 7일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 대법원장까지 나선 항의, 검찰의 딴전


이처럼 괴벽보, 괴문서를 통한 비난과 협박이 계속되자 조진만 대법원장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8월5일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판결에 대한 학문적 비판이나 법적 절차를 통한 다툼은 있을 수 있으나, 용공판사를 처단하라는 등의 비난이나 협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대한변호사협회도 성명을 내고, 일련의 괴벽보와 삐라 사건은 사법부의 독립을 말살하고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가공하고도 가증한 행위라고 지탄했다. 유진오 신민당 총재는 괴벽보 사건은 정부 권력기관의 소행이라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국회 내무 및 법제사법 두 위원회 연석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은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들에 대한 질의를 통해, 이 사건은 권력을 배경으로 한 범죄조직에 의해 저질러진 혐의가 짙다고 추궁했다. 그러나 당국의 수사는 별 진전이 없었다. 한 검찰 고위 간부가 이런 말도 했다고 알려졌다. “괴벽보는 판결을 비평한 것이다. 범인을 잡더라도 광고물단속법 위반이거나 즉결심판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괴전단을 살포하던 두 명이 검거되기도 했으나 애국시민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했다. 국회에서도 ‘괴벽보 사건 등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돼 조사활동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 난처했던 박 정권, 분개 끝에 사표 낸 대법원판사


나중에 알려지기로는, 동백림사건 일부 피고인들을 서독에서 연행해 온 탓으로 서독 정부가 강력한 항의를 거듭해왔기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으로서는 재판을 조속히 종결해 외교적 난경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난데없는 파기환송으로 사건이 재항소심으로 내려가게 되어 낭패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상의 괴벽보 협박사건은 사법부가 직접 당한 피해였기 때문인지 법원 측에서 발간한 <법원사>(대법원, 1995)와 <역사 속의 사법부>(사법발전재단, 2009)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동백림사건의 대법원 판결에 관여했던 대법원판사 두 사람은 사법권의 독립이 훼손된 데에 분개해 그 해 8월과 그 다음해 8월에 연달아 사임하고 대법원을 떠났다.




▲동백림사건으로 구속됐던 이응노 화백의 석방 당시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재상고심 판결 나오자 사면 또 사면, 전원 석방


대법원으로부터 사건을 환송받은 서울고등법원(재판장 송명관 부장판사)은 1968년 12월5일, 대법원의 파기환송 취지에 따라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정하룡·정규명에게 사형, 조영수에게 무기징역, 윤이상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하는 등의 판결을 했다. 이와 같은 재항소심 판결은 1969년 3월31일, 대법원(재상고심)에서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그대로 확정되었다. 그 후 정부는 이 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윤이상을 비롯해 어준·강빈구·천병희·김중환·임석훈·최정길·김성칠·박성옥·이응노를 1970년 광복절 특사(형집행정지)로 석방했으며, 나머지 정하룡·정규명·조영수 등은 1970년 연말 특사(형집행면제)로 석방했다. 이로써 동백림사건으로 복역 중이던 수감자는 전원 풀려났다.


■ 국정원 과거사규명위원회가 밝혀낸 사건의 진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2004년 11월2일 출범한 국가정보원의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조사 결과(2007년 발표)가 주목을 끈다.


그 발표문에는 당시의 국내 정치상황과 시대적 배경이 언급되어 있는데, 그 요지는 이러하다. 즉 1967년 재선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1971년 이후의 장기집권을 위해 3선개헌을 위한 국회 의석의 개헌 정족수 확보에 급급한 나머지 6·8 부정선거를 감행했고, 이에 대항하여 야당과 대학생들이 대규모 규탄 시위를 전개하자 많은 대학과 고등학교를 휴업령으로 문을 닫고 탄압하는 시점에서 이 사건을 과장 발표했다. 즉, 박 정권이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무력화하기 위해 임석진의 자수를 계기로 동백림사건을 부풀려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전후 7차례에 걸친 이 사건 수사 발표 이후 대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없어졌다.


■ 서독 정부의 고자세와 한국 정부의 저자세


서독 거주 한국인의 국내 이송과 관련해 서독과 한국 두 나라 정부 사이에 심각한 외교문제가 발생했다. 한국 수사관의 서독 내 ‘체포활동’을 주권 침해로 규정한 서독 정부는 피연행자들의 출국 과정의 강제성 유무에 대한 해명과 관련자의 원상회복 및 한국 공관원 3명의 소환을 요구했다. 프랑스 정부도 한국인들의 귀국 과정에 한국 공관원이 연루되어 있다면서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주권 침해라며 공식 항의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한국 측은 공식 사과, 재발 방지 약속, 공관원 소환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1심 재판에서 중형이 선고되자 서독 측은 신속한 재판과 재판 후의 특별사면조치를 요구했고, 재항소심에서도 중형이 선고되자 한국에 대한 차관 승인을 보류했다. 독일인 시위대 200여명이 한국대사관에 난입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1969년 1월 서독 대통령 특사가 방한해 사건 관련자 6명에 대한 석방에 합의하고, 앞서 본 바와 같이 두 번에 걸친 특사로 연행 구속자 전원을 석방해 서독 또는 프랑스로 돌려보냈다(<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국가정보원, 2007).


위 국정원 위원회는 조사 결론에서 1)중정은 피의자들에게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고 사건을 확대하였고, 2)수사과정에서 심리적 위협은 말할 것도 없고, 신체적인 가혹행위도 행사하였으며, 3)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북한의 지령에 따른 국가 전복행위로 몰고 가기 위해 196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적 조직이었던 민비연을 무리하게 동백림 공작단의 일환으로 확대 왜곡하는 등 동백림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고 판단했다.


■ 상처뿐인 대규모 ‘간첩단 사건’, 그 치부와 굴욕

작곡가 윤이상은 훗날 이 사건을 분명히 ‘납치사건’이라고 했으며, ‘나를 구제해준 것은 외국이었고, 많은 예술가들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삶과 예술, 그리고 ‘피랍’ 과정은 독일의 여류 작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상처 입은 용>(1977)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나중에 고국 방문을 희망했으나 ‘사죄’를 요구하는 정부 측의 거부로 재입국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95년 독일에서 눈을 감았다. 그는 1972년,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로 공연된 오페라 <심청>으로 세계적 작곡가의 명성을 얻었으며, 1977년부터 10년간 베를린 음악대학 교수를 지냈다. 1987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대규모의 ‘납치’ 검거 의혹, 조작 과장된 간첩 혐의, 수사과정의 가혹행위, 무리한 법률 적용, 주권 침해로 몰린 외교적 압박, 대법 판사들에 대한 용공 협박, ‘판결 백지화’로 막을 내린 전원 특사 석방. 동백림사건은 이 나라 사법사의 큰 치부이자 굴욕이었다. 그 배후와 틈새에서 이득을 챙긴 자가 있었다면,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

<2015-01-25> 경향신문

☞기사원문: 유죄 ‘파기 환송’한 대법 판사 겨냥 ‘북괴 앞잡이’ 괴벽보 나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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