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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 만들기가 ‘국민’ 만들기로… 일본도 버린 ‘잔재’ 여전히 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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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6) 교육 – 교육에 숨은 식민권력


▲ 미 군정의 일본 교육개혁

교사 권한 강화, 국가 통제 약화

평화·민주시민교육 강조


▲ 한국은 중앙집권적 교육과정

사범대 중심 교원 양성 그대로

유신체제에서 오히려 강화


▲ 과도한 국가주도적 교육 체제

교장·교사·학생 수직적 관계로

학생 인권·교권, 해방되지 않아

“어떤 선생님은 수업 전에 차렷 경례를 10번이나 시킨 적도 있어요. ‘각이 안 살아있다’고. 몇 년 전 다녔던 미국 중학교에서는 학생과 선생님이 수평적 관계고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한국에선 대체로 선생님들이 위에 있고 학생들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한자를 제대로 못 쓴다고 손바닥 맞고, 체육선생님들은 걸핏하면 엎드려뻗쳐를 시켜서 허벅지 뒤를 때리는데, 내가 맞을 때도, 친구들이 맞는 걸 봐도 기분이 정말 나빠요.” (서울 ㄱ중 3학년 여학생)


“90년대 후반 사립중에 부임했는데, 제가 다닐 때의 학교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깜짝 놀랐어요. 중앙현관으로 못 다니게 하고 한달에 한번은 운동장 조회에서 교장선생님 훈화를 듣고, 아침마다 선도부, 생활지도부 교사가 교문에서 아이들 두발, 복장을 단속하고…. 아이들에게만 그런 문화가 남아 있는 게 아니었어요. 월요일마다 열리는 교무회의는 교장, 교감선생님의 지시사항만 전달하는 자리고, 교사들은 입도 뻥긋 못하는 분위기예요.” (서울 ㄴ중 40대 교사)

1996년 3월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학교라는 의미의 ‘국민학교’가 일제히 ‘초등학교’로 바뀌며 일제 잔재 청산의 물꼬가 터진 듯했다. 그러나 해방 70년이 지난 현재에도 일제가 남긴 문화는 학교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일제 식민지기를 연구한 교육학자와 역사학자들은 일제가 우리 교육에 남긴 가장 강력한 영향으로 ‘국가 주도적인 교육체제’를 지적했다. 이로 인해 국가-교육청-학교-교사-학생으로 이어지는 비민주적인 수직적 관계가 교육관행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 1943년 충북 괴산 목도공립국민학교 졸업앨범에 실린 애국조회 장면. | 민족문제연구소 제공


■ ‘국민’ 만들기로 더 강화된 잔재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의 저자인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일제의 교육제도나 시스템은 일본보다 우리 안에 더 많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등교시 복장검사와 소지품 검사, 애국조회 등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 모습 자체가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교육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수업 시작 전 반장의 구령에 맞춰 교사와 학생이 인사하고, 종 치면 운동장에 집합해 훈화를 듣는 일사불란한 모습 등 엄격한 학교규율은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일왕이 이끄는 신민으로 쉽게 통제하기 위해 일제에서 배태된 것”이라고 말했다.

오성철 서울교대 교수는 일제가 ‘세속 종교’로서 학교를 효율적으로 이용했다고 설명한다. 특별한 종교가 없는 일본은 기독교의 의식처럼 아주 정교한 규율을 만들었고, 이런 종교적인 ‘리추얼’(학교규율)이 반복되면서 일왕 이데올로기와 국가주의라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학생들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해방 후에도 형식은 그대로 둔 채 교육의 내용만 ‘신민’에서 ‘국민’ 만들기로 변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해방 이후 중앙집권적 교육과정도, 사범대 중심의 교원 양성도 일제시대 그대로였다. 국가가 교육과정을 만들고 각 학교와 교사들이 그대로 따라가는 ‘국가체제 교육과정’을 실시하는 곳은 한국과 일본, 북한, 중국 등 극히 일부 국가뿐이다. 국가교육에 복무하는 교사가 갖춰야 할 태도나 요건들이 일반적인 교양인과 다르다고 생각해서 사관학교 같은 체제를 통해 교사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범학교 중심의 교원 양성 체제의 바탕도 일제 식민지 시기에 마련된 것이다. 전후 일본은 오히려 교원 양성의 문호가 넓어졌지만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였던 대만, 중국, 북한과 함께 국가주도의 교원 양성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은 “학교문화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는 일본이라는 나라보다는 파시즘의 잔재이기 때문에 문제”라며 “이는 민주시민교육으로 해소됐어야 하는데 유신체제 하에서 오히려 일제의 군국주의, 군사적 집단훈련 등이 강화돼 부활했다”고 지적했다.

학교 현장에 뿌리내린 일제의 위계적인 틀이 교육개혁 움직임에 걸림돌이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교육청 관계자는 “위로부터 일률적으로 모든 학교에 시달하는 교육의 틀 안에서는 교사와 학생들이 자유롭게 사고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크지 않다”고 비판했다.

오성철 교수는 “국가 권력이 교육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할 순 없지만 우리 사회에선 지나치게 과도한 국가주도적인 체제로 학교 안에서 교장과 교사,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마저 수직적인 관계로 왜곡됐다”며 “학생인권과 교권 등 국가 외 교육주체들의 권리는 교육에서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일갈했다.


■ 한국과 일본의 엇갈린 교육개혁

1945년 해방 후 역설적으로 한국보다 일본에서 훨씬 민주적, 진보적인 교육체제의 틀이 자리잡았다. 미 군정이 군국주의의 혁파와 민주주의 교육 정착에 많은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미 군정이 주력한 일본 내 교육개혁의 핵심은 교육에 대한 국가의 장악, 국가 권력의 통제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이다. 교사들의 노조는 당시 미국에서도 합법이 아니었지만 미 군정은 문부성의 견제세력으로 교원노조를 만들 것을 강권했다. 교육행정의 역할은 교육시설과 조건 정비에만 그치고 교육의 목적이나 내용에 관여하지 못하게 규정됐다. 교육지방자치제격인 교육위원회가 도입됐고, 교사의 자율적 권한도 신장됐다. 국정교과서는 없어졌다. 미 군정이 끝난 1952년부터 문부성의 권한이 다시 신장되는 방향으로 교육정책이 진행됐지만 일교조는 여전히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문부성과 교육에서의 균형을 유지했다.


내용적으로도 일본의 전후 교육내용은 철저히 평화, 민주시민교육을 강조했다. 문부성은 1947년 헌법, 민주주의, 국제평화주의, 주권재민, 천황폐하, 전쟁포기, 기본적 인권 등의 목차로 아이들에게 민주시민 정신을 알기 쉽게 해설한 <새로운 헌법 이야기>를 발행했다.

일본의 진보적 역사학자와 역사교사, 시민들의 모임인 역사교육자협의회의 <학교사로 읽는 일본 근현대사>는 ‘전후 일본교육법의 제정으로 전전의 교육에서 탈피해 민주교육으로의 전환이 이뤄졌다’고 자평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는 “나는 지금 ‘주권재민’이라는 사상이나 ‘전쟁포기’라는 약속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모럴이라는 것을 느끼지만, 그 단초는 전후 중학교의 새로운 헌법 시간에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반면 해방 후 한국의 교육은 일본과는 다르게 전개됐다. 미 군정은 분단상태인 한국에서의 교육개혁에 소극적이었다. 대신 오천석 등 미국 유학경험이 있는 보수 우파들이 실질적으로 미 군정에 참여해서 교육개혁을 주도했다. 전후 일본은 교육에 대한 국가통제권 약화가 일차 목표였다면 한국은 학교교육의 정상화가 일차적 관심이었다. 일본 교과서, 일본인 교사가 사라진 상황에서 그 공백을 메울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에서 학무국장을 맡았던 라카드의 증언은 미군정 초기 한국인의 자율적 교육개혁의 허상을 압축적으로 대변한다.


“실제로는 일본어를 한국어로, 일본식 민족주의를 한국식 민족주의로, 일본인 교사를 한국인 교사로 대치하는 개혁을 제외하면, 한국인들은 그들이 1905년 이후 겪어온 교육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중략) 한국인들은 교육을 중앙집권적이며 가부장주의적으로 보았다.”

보수 우파들은 기존 일제식민지 시대보다 더욱 보수화하는 방향으로 교육법을 고치기도 했다. 1949년 만들어진 교육법을 보면 교육권력자들이 뭘 유지하고, 뭘 없애려 했는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오성철 교수는 <한국 교육법 제정의 특질>에서 해방 후 일본과 한국의 교육법을 비교했다. 일본은 해방 후 즉시 국민학교를 소학교로 바꿨지만 한국은 90년대 중반까지 국민학교 명칭을 그대로 유지했다. 일제 시대에도 규정상 금지돼 있었던 체벌은 한국 교육법에서 ‘각 학교의 장은 교육상 필요한 때에는 학생에게 징계 또는 처벌을 할 수 있다’는 규정으로 살아났다. 교사의 교권을 제한하는 일제의 망령에 대한 처리 방식도 달랐다. 일제는 1941년 <국민학교령>을 통해 ‘훈도는 학교장의 명을 받아 아동의 교육을 담당한다’고 규정했다. 전후 일본 교육법은 ‘학교장의 명을 받아’ 부분을 뺐지만 한국 교육법은 그대로 유지했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중반 교육법 개정 전까지 ‘교사는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교육한다’는 일제시대 퇴행적 규정이 두고두고 교사들에게 족쇄로 작용했다.

우리 교육에서 ‘어디까지가 일제 잔재인가’라는 부분은 여전히 논쟁지점이다. 그러나 해방 후 ‘위로부터의 변화’라는 방식을 통해 추진된 교육개혁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 평가가 많다. 해방 후 우리 교육개혁이 식민 교육에 대한 반성적 성찰 없이 기존의 틀을 그대로 가져가면서 실제 교육을 담당하는 교원들을 배제한 결과, 식민지 교육 잔재 극복에 한계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일본 역사교육을 전공한 단국대 교육대학원 구경남 교수는 “일본 사회가 최근 보수화하며 퇴색되긴 했지만, 최소한 전후 초기 일본에선 제국주의에 대한 교사들의 반성이 있었고, 전전을 극복하려는 노력과 민주주의 국가로 가야 한다는 지향점이 명확했던 반면 우리는 교육의 지향점보다 민족정체성 회복이 먼저였다”고 진단했다. 그는 “일제가 남긴 것에 대한 성찰과 대안적인 교육에 대한 고민이 있을 때 진정으로 식민지 교육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5-02-13>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기획 – 우리는 과연 해방됐는가]‘신민’ 만들기가 ‘국민’ 만들기로… 일본도 버린 ‘잔재’ 여전히 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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