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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산내 유해발굴 개토제 현장 …”아부지 아부지…” 중년의 딸 애끊는 사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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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형무소 재소자 등 수천명 …낭월동서 학살당했다 알려져


“유해라도 찾아 모시고 싶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공동조사단 제2차 유해발굴 개토제가 23일 대전 동구 산내 골령골(낭월동) 유해발굴지에서 열려 한 유가족이 오열을 하고 있다. 전우용 기자 yongdsc@ggilbo.com


23일 오전 9시 경 대전 동구 낭월동(구 산내면 골령골)의 -대전형무소 정치범 및 민간인 집단 1학살지-를 알리는 비석 주위로 100여 명의 사람들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추모의 침묵에 빠져드는 유족들은 저마다 부모, 형제, 친지를 잃은 기억을 떠올리며 깊은 회한에 젖어 들었다.


한반도에 전쟁의 포화가 드리웠던 1950년 대전 산내에는 많은 사람들이 묻혔다. 생각의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로, 혹은 사상이 의심된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런 야만 속에 최후의 보루가 돼야 할 국가의 이성은 깊게 매장됐다.


개토제가 열린 이날 오전 하늘에서는 검은 까마귀들이 날갯짓을 하며 울어댔다. 이 골짜기에서 희생된 이의 수만 어림잡아 수천 명. ‘흙을 파기 전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인 개토제는 산자와 죽은자를 연결해주는 의식. 한삼을 나빌레는 경기민요인의 춤과 유가족들의 제례는 사라진 그들의 넋을 의로했다.
검은 비석 앞에서 한 중년여성은 “아부지 내가 왔는데 대답이 없소. 아부지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소. 누가 이랬는가. 아부지 아부지. 아부지”라고 목 놓아 울었다.


비통의 정서에 이를 지켜보던 한 중년 남성도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가 학살된 이후 힘겨운 삶을 살아온 유족들은 그 고된 삶을 주저리주저리 다른 이들에게 풀어냈다. 중년 남성은 “친척들마저 낙인이 찍힌 애들을 키워봤자 출세 못한다며 외면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개토제 후 골령골에서는 포크레인을 통한 유해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골령골의 굳은 땅 속에서 진실이 속살을 드러낼 때마다 유가족을 비롯한 모인이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유족은 “아버지의 유해를 찾아 모시고 싶다”며 오랜 시간 유해발굴 현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곤룡재, 용과 같은 형국이라 멋들어진 이름을 지녔던 이곳 골짜기는 비극을 거치며 ‘뼈가 산처럼 쌓인’ 골령골로 불리게 됐다. 주민들은 이 곳의 옛 명칭은 곤룡재지만 대전에 사는 양민들을 데려와서 대량 학살해서 죽은 사람이 뼈가 산처럼 쌓였으니 골령은 예언적 지명이다고 믿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희대의 학살 비극에 대해 ‘예언’이라는 이름으로 위로받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 비극은 유족들에게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아픔으로 남아있었다.


곽진성 기자 pen@ggilbo.com

<2015-02-23> 금강일보

☞기사원문: 대전 산내 유해발굴 개토제 현장 …”아부지 아부지…” 중년의 딸 애끊는 사부곡

※관련기사

☞민중의소리: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대전 골령골 민간인 유해발굴

☞충청신문: 대전 산내 골령골 유해발굴 개토제

☞뉴시스: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개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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