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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21) 월간 ‘다리’ 필화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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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잇단 ‘공안 무죄’ 판결에 판사 구속 시도… 법관 150명 사표 ‘사법파동’ 불러


■ 검찰의 소송전략과 압력 시리즈


찰의 요청으로 변론이 재개되고, 7월13일이 다음 공판기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그날도 검사는 법정에 나오지 않은 채, 이 사건을 합의부로 이송해달라는 이송신청서를 재판부에 냈다. 피고인 임중빈은 전에 통일혁명당 사건(반공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았는데 다시 동종의 범행을 했으므로 반공법 제9조 제2항에 의한 재범자 특수가중사유(최고 사형까지)에 해당되어 단독판사 아닌 합의부에서 재판해야 할 사건이기 때문에 사건을 이송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중빈은 뒤에 보는 바와 같이 이 조항에 해당되는 사유가 없는 사람이어서 검찰의 그런 신청은 판사의 무죄 심증을 간파하고 사건을 합의부 재판으로 옮겨놓거나, 선고를 지연시키려는 속셈으로 보였다. 하지만 목요상 판사는 이 신청을 검토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할 수 없이 또 재판을 연기해야만 했다.


목 판사에게는 계속 압력과 위협이 가해졌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2007년 10월 국가정보원에서 나온 한 보고서의 기재를 그대로 여기에 인용한다.


“중정 조정관의 직간접적인 위협과 검찰의 재판 지연작전 외에도 목요상 판사에게 다양한 압력이 가해졌다. 담당 ○○○ 검사는 정보요원들과 형사들을 데리고 목요상 판사 집 앞에서 일주일간 잠복하면서 감시하기도 하고, 목 판사의 부인이 몸이 아파 을지병원에 입원하자 병원비를 누가 대신 내준 것이 아닌가 뒷조사를 하기도 했다. 당시 양주시 농협 지부장을 하던 목 판사의 큰형도 세무조사를 당하고 그 후에 퇴직했다.”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 374쪽)




일러스트 | 박건웅


■ 친구 집에 피신해 작성한 무죄 판결문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목 판사는 집에서 나와 한 친구 집에서 판결문을 작성해야 했다. 그는 훗날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다음날이 판결 선고일인데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틀림없이 내일 판결 선고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초저녁에 집에 있는데, 검사 중 한 사람이 집에 찾아왔다. 대문을 두드리면서 ‘○○○ 검사입니다’하는 소리를 듣고 나는 바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친구 집으로 갔다. (…) 거기서 무죄 판결문을 작성했다. 다음날 출근하니까 바로 검사가 찾아와 판결을 선고할 것인지를 묻기에 ‘기록도 집에 있었는데 내가 어떻게 판결을 할 수 있겠나?’라고 둘러대고 법정에 들어갔다.” (앞의 책 375쪽)


위의 말은 7월16일 오전 공판 이야기로 이어진다. 개정시간이 되고 판사가 입정을 하였는데도 검사는 법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판사는 한참을 기다리다가 판결 선고에 들어갔다. 그때 검사가 황급하게 법정에 들어오더니, 공판조서 기재에 대한 이의신청을 하고, 이어 언론인 2인을 감정증인으로 신청한다면서 판결 선고를 제지하려 했다. 목 판사는 즉석에서 검사의 신청을 기각하고 판결문을 읽어내려 갔다.


■ 검사의 방해 무릅쓰고 선고한 무죄판결


먼저, 검사의 합의부 이송신청은 이유 없다고 판단했다. 임중빈은 형의 집행유예 기간 중에 있는데, 이는 ‘형의 집행 중이거나 형의 집행을 종료한 때’를 가중처벌 요건으로 삼는 반공법 제9조의 2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합의부 관할사건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다음으로, 공소사실에 대한 무죄 판시의 요지는 이러했다. 임 피고인이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이란 논문에서 프랑스의 5월혁명, 미국의 뉴레프트 등 서구 학생운동을 인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활동, 주의, 사상을 찬양 고무 동조했다고는 볼 수 없으며, 독자적인 청년문화운동으로 역사적인 난관을 타개해보자는 일종의 청년문화론을 시도한 것이지, 현 정권 타도를 위한 문화혁명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판결은, ‘결론적으로 위 논문 내용을 통틀어 살펴볼 때, 다소 현 정부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대목이 없지 않으나 헌법상 보장된 언론자유의 테두리 안에서 전 근대적인 낡은 요소를 완전 청산하고 민족복지사회의 이념을 확립하는 방향으로 학생운동의 진로를 개척해나가자고 주장한 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반공법 제4조 1항에는 저촉되지 아니한다고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라고 명쾌하게 매듭을 지었다.


이 판결은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으로 잡아넣는 소위 공안사건 내지 시국사건에서는 그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폭탄선언 같은 것이었다. 당시 한 신문은 ‘반공법 대 언론자유의 싸움은 일단 언론자유의 승리로 끝맺게 되었다’라고 논평했다(‘주간조선’ 1971년 7월25일자). 나는 목 판사의 용단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가 앞으로 무사할까 하는 걱정이 떠나지 않았다.



‘다리’지 사건 피고인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는 목요상 당시 서울형사지방법원판사. | 경향신문 자료사진


■ 항소심, 상고심까지 ‘무죄’ 3연승의 기적


검사는 즉각 항소하였다. 그러나 서울형사지법 항소부(재판장 유상호 부장판사)는 극히 이례적인 ‘무변론 기각’ 판결을 했다. 통상 형사재판은 오전에 개정하면 먼저 판결을 선고하고 난 다음에 그날로 예정된 사건의 심리에 들어가기 때문에 변호인들은 앞서의 선고가 끝날 무렵에 법정에 들어간다. 그런데 그날 내가 ‘다리’지 사건의 법정에 들어갔을 때는 항소심에서 심리를 한번도 하지 않은 그 사건의 판결이 선고된 뒤였다. 무죄판결에 불복한 검사의 주장을 들어볼 필요도 없이 (즉 변론조차 열지 않고) 검사의 항소를 기각한 것이었다. 나는 변호인석에 앉아보지도 못한 채 희한한 ‘부전승’을 거둔 셈이었다. 항소심 판사들의 기습적인 ‘무변론 기각’에 검사들도 망연자실하는 모습이었다. 링 위에 올라가보지도 못하고 ‘부전패’한 악몽이었을 것이다.


물론 검사는 그런 항소심 판결에 불복하고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대법원 제2부(재판장 이영섭 대법원판사, 양병호·한환진·김윤행 대법원판사)는 1974년 5월28일 선고공판에서 검사의 상고를 기각함으로써 임중빈, 윤형두, 윤재식 3인에 대한 무죄를 확정지었다. 대법원의 판결선고 당시는 이른바 ‘긴급조치’ 정국이었는데도 원심의 무죄판결이 그대로 유지된 것을 보면, 목요상 판사의 제1심 무죄 논리가 얼마나 탄탄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당대 집권자의 라이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반공법 사건이 1, 2, 3심 내리 무죄판결로 3연승을 했으니,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 제1차 사법파동으로 비화된 무죄판결들


하지만 혹시라도 목 판사에게 무슨 보복조치가 가해지지 않을까 하는 앞서의 걱정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걱정은 현실이 되어 사상 초유의 사법파동으로 번져나갔다.


즉, 시위 학생들에 대한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했다가 무장군인 법원 난입사건(1964년 5월20일)의 변을 당한 적이 있는 서울형사지법의 양헌 판사가, 이번에는 신민당(야당) 당사에서 총선 거부를 외치며 농성을 하다가 구속기소된 학생들에게 무죄를 선고해(1971년 6월29일) 공안당국을 낭패에 빠트렸다. 거기에다가 7월 들어 목 판사의 ‘다리’지 무죄판결까지 나왔으니 사법부와 공안당국(검찰 포함) 사이의 갈등은 깊어만 갔고, 마침내 서울지검이 서울형사지법의 항소부 판사 2명과 참여서기에 대한 구속영장을 신청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7월28일). 이것이 제1차 사법파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검찰은 이범렬 부장판사와 그 배석 판사 1명이 반공법 위반 항소사건의 증인신문을 위해 제주도에 갔을 때, 변호인으로부터 여비 및 접대비로 9만7000원 상당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한 것이었다. 사실인즉, 그 재판부는 1971년 7월까지 19건 22명의 피고인에게 1심과는 달리 무죄를 선고했으며, 이 가운데는 반공법 사건도 5건이나 들어있었다(‘역사 속의 사법부’, 79쪽). 구속영장은 수석부장판사에 의해 기각되었으나 이 사실을 알게 된 법관들은 대책을 논의한 끝에 37명의 법관이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자 검찰은 구속영장을 재청구했고 이 역시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 법관들의 항의와 사표, 그 허전한 득실


국회 본회의에서 야당은 검찰의 법관 구속 시도는 ‘다리’지 사건 등 일련의 재판에서 보여준 사법부의 의연한 자세에 대한 보복이자 사법권 침해라며 법무장관의 해임을 요구했다. 뒤이어 서울민사지법 판사 36명도 사표를 냈는가 하면 서울의 민사, 형사 양 법원의 법관들이 ‘사법권 수호 건의문’을 채택하고 이를 대법원장에게 제출하면서 검찰의 사법권 침해 사례를 보고한 다음 그 시정책을 건의했다. 그러는 사이에 사표를 제출한 법관 수는 전국적으로 150명으로 늘어났다. 민복기 대법원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채 법관들의 사표 철회를 호소하였고, 이에 해당 법관들은 모두 사표를 철회하였다. 당초 법관들이 요구했던 사법권 독립에 대한 보장과 검찰 관계자의 인책은 무엇 하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파동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법원 쪽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영장청구 대상이 되었던 부장판사는 며칠 뒤에 사임했고,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은 지방으로 전보되자 바로 법관직을 그만두었다. 사법파동의 결과에 실망한 법관 2명도 사표를 냈고, 5명의 법관은 유신헌법 시행 후의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 그 밖에도 전국에서 여러 법관들이 연달아 법원을 떠났다. 제1차 사법파동은 이렇게 전과(戰果) 없이 끝났지만 그 의미와 불씨는 역사에 남아 훗날 제2차, 제3차 사법파동으로 이어졌다.


목 판사에게도 올 것이 왔다. 그는 무장군인 법원난입에도 불구하고 시위학생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던 양헌 판사와 함께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는 데 앞장섰지만, 유신헌법에 의한 1973년의 법관 재임용에서 탈락되어 사법부를 떠나고 말았다. 소신과 용기를 다한 법관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 사법부의 명맥을 살린 그들의 행보는 자랑스러운 법관상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주고 있다. ‘다리’지 필화사건은 그런 의미에서 사법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 되었고 그만큼 값진 교훈을 남겼다.


<2015-03-01>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1) 월간 ‘다리’ 필화사건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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