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릴라칼럼] ‘불의의 체계’가 된 한국사회에서 벗어나기②
▲ 일자리가 많아서 고민하는 국민들 한국 정부는 늘 일자리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호언해 왔다. 사진은 한국 정부의 과거 홍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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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고용이 실현되어 실업자는 없어지고, 누구든지 일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된다. 취직하지 못해 애쓰는 사회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사회로 바뀌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부지런하면 누구나 내 집을 가지고 단란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된다.”
웬 꿈같은 소리냐고 말할지 모르겠다. 앞으로 취직 걱정은커녕, 갈 곳이 너무 많아 고민하게 된다니 말이다. 게다가 내 집 마련도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라니, 이게 믿어지는가?
그도 그럴 것이, 현재 한국의 청년(15~24세)고용률은 24%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부가 조사해 ‘대학알리미’를 통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대졸자(전문대·일반대·대학원) 평균취업률은 58.6%로, 고등교육을 받고도 절반 가까이가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같은 해 고졸 취업자는 33.5%인 것으로 나타났다.
살인적 경쟁률을 뚫고 취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안락한 삶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취업자 10명 가운데 3명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지난해 10월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의 시간당 임금은 정규직의 64% 수준에 지나지 않으며,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조금 일하다 정규직으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 그게 쉽다면, 애초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비정규직이 1년 이내에 정규직이 될 확률은 10명 가운데 1~2명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한국에서 비정규직은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개미지옥’과 같다. 그리고 이 나락의 구멍은 더 넓고, 깊어지고 있다.
대기업에 취직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이지만, 그 ‘희귀종’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고 해서 ‘해피엔딩’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합격증을 받고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껏 받았을 30대 대기업 취업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10년 미만이다. 여성 대기업 취업자의 근속기간은 더 짧아, 7년이 채 안 된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여자든 남자든, 대학졸업장 없든 있든, 한국에 사는 이들에게 고용불안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물론 특별한 유전자를 타고난 ‘선천성 합격자’들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들이 얻은 진짜 특혜는 평생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평생 안정적으로 일할 필요가 없다는 점일 것이다. 기업주를 빼닮은 이들은 남자든, 여자든 대학을 나오든 안 나오든, 안락한 삶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경쟁자보다 무서운 ‘비경쟁자’
우리들은 생각한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면 뭔가 괜찮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 그들보다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말이다.
이런 상상을 해 보자. 사막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걸어간다. 뙤약볕이 등과 목을 태우고, 모래 바람이 눈알을 후벼 파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한 방향으로 걷는다. 말라서 터진 입술에 반쯤 눈을 감고 위태롭게 비척거리다가도, 뒷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면 눈을 번쩍 뜨고 다시 바삐 다리를 움직인다.
그러다 누군가 ‘저기 물이 있다’고 외치자, 난리가 난다. 대열이 갑자기 흩어지며, 사람들이 사방으로 뛰기 시작한다. 앞 사람 뒷덜미를 당기는 놈, 옆 사람을 밀어 자빠뜨리는 놈, 자빠진 이를 밟고 뛰는 놈. 정말 물이 있는지, 남들보다 먼저 가면 물을 마실 수 있는지 따위를 생각할 정신도, 여유도 없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저기 물이 있다’고 외친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만일 그 사람이 무리 속에서 함께 고생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말의 진실성을 의심해야 한다. 그는 낙타 (혹은 개인 제트기) 위에 편히 누워 자기가 가리킨 방향과 반대로 가는 사람일 수도 있다.
경쟁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은, 앞에서 뛰든 뒤에서 걷든, 어차피 많은 것을 얻을 수 없는 공동운명체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사람은 내 앞뒤로 보이는 경쟁자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고, 경쟁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경쟁주의는 분노를 엉뚱한 곳으로 겨냥하게 만들며, 무엇보다 연대해서 함께 싸워야 할 동료를 적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데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다.
“완전고용이 실현되어 실업자는 없어지고, 누구든지 일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된다…”
앞의 ‘무릉도원’은 1973년 유신정부의 공약이었다. 그렇다면 정부는 언제쯤 ‘일하고 싶으면 일할 수 있고, 부지런하면 집을 가질 수 있는 시대’가 실현된다고 약속한 것일까? 1970년대 말이다. 그렇다, ‘2070년대’가 아니라 ‘1970년대’ 말이다.
▲ 반세기 전의 복지공약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말이면 취직 걱정 없이 살 수 있게 된다고 장담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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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이면 ‘복지사회’ 찾아온다더니…
정부가 약속했던 건 일자리만이 아니었다. 당시 정부 홍보물에 따르면, “좋은 집을 갖고 잘 사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 집 없는 슬픔을 달래야 하는 서민들의 걱정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며, “의료보험제도가 발달되어 돈 없는 사람이 병이 났을 때 무료로 치료”해 주는 “복지사회”가 찾아온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삶의 질’에 대한 부분이었다. 더 이상 ‘생존’을 고민하던 차원에서 벗어나 ‘삶의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불어나는 소득으로 여유 있는 국민생활”이 가능해지고, “풍족한 살림으로 즐기는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고도 했다.
▲ ‘생존’을 넘어 ‘삶의 질’까지 책임진다는 유신정부 ‘복지사회’를 공약으로 내건 것은 박근혜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도 높은 수준의 ‘복지사회’를 약속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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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약속이 지켜졌는지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다.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박정희 대통령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탓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가 저격당한 것은 1979년 10월 말이므로, ’70년대 말’을 꽉 채우고 돌아가신 셈이다. 게다가 당시 정부는 복지국가가 도래하는 시점을 정확히 제시했다. “국민소득 1000달러의 고지를 점령할 때”라는 것이다.
한국은 1977년에 이미 1000달러 목표를 달성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현재 한국의 국민소득은 2만 8000달러를 초과했고, 올해 3만 달러를 넘어설 것이 확실시 된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10월 대한민국이 올해 ’30-50 클럽’에 가입한다고 보도했다. 국민 소득 3만 달러에 인구 5000만 명이 넘는 명실상부한 ‘강국’으로 부상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민소득 3만 달러와 인구 5000만 명을 동시에 갖춘 국가를 의미하는 ’30-50 클럽’에 가입한다. 전 세계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30K)를 넘고, 인구도 5000만 명(50M)이 넘는 국가는 지금까지 6개국(미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일본)뿐이다. ’30-50 클럽’에 도달한다는 것은 높은 생활수준과 대외적으로 비중 있는 경제 규모를 함께 갖춰, 강국(强國) 대열에 올라선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 대목에서 뛸 듯 기뻐야 할 텐데, 왜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지 모르겠다. 속아서만 살아 온 모양이다. 나 혼자라면 다행이겠는데, 이런 소식에 냉소적 태도를 보내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리라는 데 문제가 있다.
최근 KBS 박종훈 기자는 “벼랑 끝에 몰린 청년, 왜 ‘붕괴’를 택했나?”(2월 12일자)라는 보도에서 흥미로운 통계수치를 인용했다. 2월 초에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주최로 ‘한국인은 어떤 미래를 원하는가’라는 토론회가 열렸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청년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는데, ‘바라는 미래상’을 묻는 질문에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고 말한 사람은 23%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두 배 가까운 42%가 ‘붕괴, 새로운 시작’이라고 답해 “큰 충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 큰 충격을 준 부분은 “큰 충격을 주었다”는 기자의 말이었다. 지난 반세기 넘게 지속해 온 성장모델이 수많은 국민을 빈곤, 좌절, 불행,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게 너무나 당연하다. 만일 ‘지속적 경제성장’이라는 답변이 ‘붕괴, 새로운 시작’보다 많았다면 나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합리적 판단력을 지닌 청년이 두 배나 더 많다는 점에서 나는 희망의 불씨를 본다.
장기침체의 일본보다 처참한 한국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붕괴”라는 말이 섬뜩한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년들이 ‘붕괴’하기를 바라는 것은 사회 자체가 아니라, 좌절의 원인일 것이다. 만일 사회가 구성원 절대다수의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런 사회의 존속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바라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이미 붕괴된 사회다.
언제부턴가 일본은 한국의 ‘반면교사’가 된 듯하다. 일본처럼 장기침체의 늪에 빠지면 안 된다느니, 일본사회의 절망적 분위기가 가혹한 범죄를 낳고 있다느니, 취직을 포기하고 부모에 의존해 사는 ‘니트족’이 일본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말이다. 앞의 기자 역시 일본 청년들로부터 ‘희망 잃은’ 세대의 암울한 이야기를 끌어온다.
일본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앞의 이야기는 한국이 일본보다는 낫다는 전제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과연 그럴까? 일본은 청년 고용률뿐 아니라, 고용률 지표 전반에서 한국보다 양호하다. 자살률도 한국에 비해 낮으며, 범죄율 또한 살인, 강도, 강간, 폭력 등 강력범죄 모든 영역에서 한국보다 훨씬 낮다. 게다가 일본은 지난 10년간 범죄가 줄어든 반면, 한국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측정하는 ‘행복지수’도 일본이 훨씬 높아, OECD 주요국가 가운데 (2013년 기준) 한국이 27위를 기록했을 때, 일본은 21위였다. 청소년들의 행복지수 역시 일본이 훨씬 앞선다. 이런 데도 왜 자꾸 일본을 들먹이는 것일까? 2014년 취업률만 봐도, 일본과 한국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난해 한국 대졸자의 취업률은 58.6%에 머물렀지만, 일본은 94.4%였고, 고교생 취업률은 그보다 높은 96.6%였다.
한국 정부와 언론은 걸핏하면 ‘일본식 장기불황’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이 ‘장기침체’에 들어섰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식 장기불황’에 빠져 있는 게 아니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불황이 시작되지도 않은 나라의 국민이 불황의 늪에 빠진 국민보다 더욱 끔찍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금이 이런데, 본격적으로 불황이 시작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해답은 하나다. 혁명적인 복지투자만이 이 나라를 구해낼 수 있다. 유럽 국가들이 복지정책을 대대적으로 늘린 때는 돈이 남아돌던 경제활황시절이 아니었다. 복지가 전쟁 직후나 경제공황 당시 국민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는 점을 기억하면 놀랄 일이 아니다.
자살하는 20~30 세대, 성매매로 연명하는 ‘산업화세대’
국민들이 열심히 일해서 일인당 소득을 1000달러로 올려주면, 복지국가로 보답하겠다는 게 반세기 전 정부가 한 약속이었다. 이게 거짓이 아니었다면, 3만 달러 시대인 현재는 그 약속의 30배에 달하는 ‘슈퍼복지국가’가 되어 있어야 옳을 것이다. 이제 그런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적 생계, 거주, 의료, 교육을 보장한다는 1970년대 약속만은 지켜라.
대한민국 국민이 어떤 사람들인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가장 부유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일궈낸 이들이다. 그들에게 ‘삶의 즐거움’까지는 주지 못하더라도, ‘생존’으로는 고민하지는 않게 해야 한다. 그게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고, 최소한의 예의다.
▲ 성매매로 연명하는 할머니들 노인 성매매를 다룬 언론보도. 중요한 사안을 다루고 있지만, ‘일탈’에 초점을 맞추었을 뿐. 원인인 노인빈곤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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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슬픈 뉴스를 보았다. 종로 지하철 역 안에서 노인들이 술을 팔고 성매매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보도는 ‘불법행위’와 ‘단속’을 강조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분들이 왜 그래야 하느냐는 것이다. 한국에서 고령자(55~64세) 취업률은 청년 취업률보다 높은 63.1%고, 노인 취업률도 34%나 된다. 일해야 할 나이에 일하지 못하고, 쉬어야 할 나이에 쉬지 못하는 것이다.
노인 취업률은 OECD 평균의 3배지만, 노인 빈곤율은 50%에 달해, 역시 OECD 평균의 세 배에 달한다. 3배를 일하면서도 3배나 가난한 것이다. 정부는 만 열면 ‘산업화세대’를 찬양하면서도 이들의 처참한 삶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청년들은 일하지 못해 가난하고, 노인은 일하면서도 가난하다.
창의적이게도, 정부와 여당은 이 시점에서 ‘복지 축소’ 이야기를 꺼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복지과잉으로 가면 국민이 나태해진다”고 말했다. 경제학회 회장인 한 ‘명문대’ 교수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책으로 모든 근로자의 비정규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비정규직 임금을 높여 해고위험을 만회할 수 있다고 말하고 이렇게 덧붙였다.
“국민이 ‘남의 돈을 갖고 공짜로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의식이 많아지고 있어 걱정스럽다.”
위 기사가 실렸던 날, 또 다른 ‘명문대’의 졸업식이 있었다. 교정에 이런 글귀가 쓰인 현수막이 내걸렸다. “졸업하면 모하냐… 백순데…” 그리고 같은 날, 정부가 법 개정에 나섰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민들의 애국심을 향상을 위해 태극기 게양률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정책의 일환으로 무료태극기 나눠주기 행사까지 벌였는데, 시민들 반응이 시큰둥했다고 한다. ‘복지과잉’은 국민을 나태하게만 하는 게 아니라, 애국심까지도 빼앗는 모양이다.
<2015-03-0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만 원 돈에 할머니들 성매매 복지축소 하자는 나라의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