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기사

박정희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 섬뜩하다

936

강인규 펜실베니아주립대 교수의 박정희·박근혜 정권하의 한국사회 비교분석 

<‘불의의 체계’가 된 한국사회에서 벗어나기> 오마이뉴스 연재 기고문을 소개한다. – 편집자

[게릴라칼럼] ‘불의의 체계’가 된 한국사회에서 벗어나기①

▲ 경북 구미, 청도, 포항에는 2009년 이후 생긴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이 있다. 왼쪽부터 구미 박정희 대통령 생가 있는 동상, 청도 신도리에 있는 동상, 포항 문성리에 있는 동상. ⓒ 소중한

박정희 대통령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국민들을 ‘먹고 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왜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까? 우리를 ‘이미’ 먹고살게 해준 이가 16년간 집권하고 난 뒤 36년이 더 지났는데 말이다.

한국사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그 자체로 논쟁이고, 그 자체로 갈등이다. 그는 ‘추앙’의 대상 아니면 ‘혐오’의 대상이 되곤 한다. 양극의 평가를 아우르는 표현을 찾자면, ‘사람도 아니다’쯤 될 것이다. 그를 거의 ‘신’의 차원에서 숭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권력 유지를 위해 국민을 무참히 탄압하고 살해한 ‘냉혈동물’로 여기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도무지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견해가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박대통령을 ‘반인반신’으로 경외하는 사람도 독재 사실은 부인하지 않으며, 그를 극악무도한 압제자로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먹고살게 해 주었다’는 주장은 어느정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양극의 평가는 ‘박정희’라는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앞면에는 번쩍거리는 ‘경제’가, 뒷면에는 낡고 녹슨 ‘정치’가 새겨져 있다.

동전의 앞뒤가 서로 반박하지 않듯, 박정희의 ‘두 얼굴’도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양쪽을 번갈아 보여주며 돌 뿐이다. “비록 독재는 했지만, 먹고 살게 해 주었다.” “먹고살게는 해 주었을지 모르나, 잔혹한 독재자였다.” 하지만 이런 식의 ‘명-암’ 또는 ‘공-과’ 나누기가 옳을까?

만일 ‘먹고사는 문제’가 박정희 시대의 ‘공’은 커녕, 끔찍한 ‘과’라면 어떨까? 여전히 그가 국민들을 먹고살게 해 주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반박할 생각은 없다. 다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나라에서 어떻게 초등학생들이 ‘9급공무원’을 꿈꿀 수 있으며, ‘잘 살아 보세’라는 70년대 선거 구호가 (당시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딸에 의해) 재활용될 수 있었는지 궁금할 뿐이다.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그것은 우리사회가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반세기 넘게 생존 하나에 매달려 온 사회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퇴보한 것이 아닐까?

▲박정희기념·도서관에 내걸린 대형현수막 서울 마포구 상암동 ‘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에 사진과 구호가 적힌 대형 현수막 4장이 내걸렸다. 현수막에는 ‘우리도 할 수 있다! We Can Do!’ ”안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원히 못하는 사람입니다. ‘될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과 의욕이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 권우성

‘유신’이라는 부도덕의 체계

현재 국민들이 겪는 고통의 책임을 왜 박정희 대통령이 져야 하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책임만은 아니다. 지난 모든 지도자들에게도 책임이 있고, 무엇보다 현재 재임중인 대통령에게 가장 큰 책임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전임 지도자 가운데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을 주목해야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새로 ‘리바이벌’한 ‘잘 살아보세’ 구호의 원저자여서만은 아니다. 그는 우리 사회의 과거-현재-미래의 관심사를 온통 ‘먹고사는’ 원초적 차원에 가둔 장본인이었을뿐 아니라, ‘먹고사는 것’이라면 어떤 행위도 정당화하는 비윤리적 사고를 우리 내면에 체화시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이 모호하고 추상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뒤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보면 많은 분들이 수긍하리라 믿는다. 지난 6개월간, 학술적 목적을 위해 60-70년대의 정책자료를 꼼꼼히 검토할 기회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깨닫게 된 사실은, 유신이 경제나 정치체계가 아니라, 거대한 ‘부도덕의 체계’라는 사실이이었다.

“잘 살기 위해 ____________ 하자(하지 말자).”

우리는 위의 빈 칸에 무엇이든 넣을 수 있도록 세뇌받아 왔다. 예컨대, 현 정부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수호한다는 ‘자유민주주의’를 대입해 보자. “잘 살기 위해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자.” 이 대목에서 웃음을 터뜨릴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것은 70년대 대국민 홍보자료에 실제 등장한 구호다.

 ‘잘 살기 위한’ 자유의 포기 박정희 시대는 ‘잘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합리화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자유는 연탄가스처럼 위험한 것이어서 ‘제한’해야 한다는 내용의 유신 홍보물.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제공

한 가지 분명히 해 두고 싶은 것은, 나는 ‘박정희 때리기’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과거의 사건과 행위를 냉정히 평가하는 것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일이지만, 나는 과거의 인물보다 현재의 우리에 더 관심이 많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살펴보고 싶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무엇을 했나가 아니라,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불의의 공모자가 되었는가이다.

‘먹고살기’를 ‘패륜행위’로 만들기

‘잘 살자’는 논리는 ‘잘 살기 위해서 국민들의 인권도, 목숨도 무시하자’까지 확대되었다. 정부가 무고한 젊은이들을 간첩으로 몰아 판결 18시간만에 사형시킨 1975년 인혁당 사건만이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노후된 배에 대한 선령규제를 완화하는 위험한 결정을 내린 것도 ‘잘 살자’는 ‘친기업’ 정책이었다.

하지만 더 무서운 일은 세월호 사건이 터진 후에 벌어졌다. 대통령은 유족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외면했으며, 사건에 책임을 져야 할 여당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불순한 음모로 몰아갔다. 새누리당 의원 김진태는 세월호 인양에 회의적 태도를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시신을 위해서 이렇게 많은 사회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모두 ‘잘살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잘 살기 위해’ 국민 목숨을 위협하는 탈규제 정책을 펴고, 정부의 과오로 국민 수백 명이 목숨을 잃어도 ‘잘 살기 위해’ 지도자의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하며, ‘잘 살기 위해’ 실종자 가족의 고통을 외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서’ 인륜마저 포기해야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8년간을 통치한 뒤에도, 임기를 무제한으로 늘리기 위해 1972년 개헌을 시도했다. 이른바 ‘유신헌법’이 통과되면, 대통령은 사실상 종신직이 되고, 국회의원의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자신이 임명할 수 있게 되며, 국회마저 해산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 될 터였다. 하지만 개헌을 위해서는 국민투표가 필요했으므로, 국민들에게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작업은 매우 중요했다.

이때 박 대통령은 어떻게 국민들을 설득했을까? 이때도 ‘잘 살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배포된 유신 홍보자료를 보면, “10월 유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물은 뒤, 스스로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한 마디로 더 잘살자는 것이다.” 유신시대는 이처럼 정치와 경제가 뒤죽박죽 섞인 기괴한 사고체계를 국민들 머리 속에 이식한 시기이기도 하다.

▲ 유신은 ‘잘 살자는 것’ 유신시대의 홍보물에는 정치와 경제 담론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제공

‘잘 살기 위한’ 불의의 공모

한국정부는 고난과 궁핍에 지친 가련한 국민들에게 생존을 미끼로 권력을 얻어냈다. 그리고 ‘더 잘 살게 해주겠다’며 불의와 범죄에 눈감게 만들었다. ‘박정희 정부가 독재는 했지만, 먹고살게 해 주었다’는 말에 동의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아직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법살인 피해자의 가족들을 마음 속으로부터 지우는 것이다. ‘네 가족은 비통하게 죽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배고픔을 면하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대우와 환경도, 명분 없는 베트남에서의 양민 학살도 ‘경제발전’으로 합리화되었다. 존엄한 생존활동을 비윤리적인 장 속으로 몰아넣은 것, 나는 이것이 유신시대의 가장 큰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통은 한국사회의 곳곳에 퍼져 깊이 뿌리 내렸다.

탑승객들을 내버려둔 채 제 목숨먼저 건지는 승무원, 세월호 사건이 터지자 마자 ‘보험금’ 이야기부터 꺼내는 언론,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부모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보수단체와 ‘일베,’ 비정규직 양산해 비인간적 근무조건 속에 내던지는 정부와 기업,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과 소비자. ‘잘 살자’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고유의 공감본능을 거부하도록 만들었고, 우리는 지금 그 결과를 목격하고 있다.

이 시대는 ‘잘 살게 해주겠다’는 권력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요구한다. 그것은 ‘정말 잘 살게 해 줄거냐’가 아니라, ‘잘 산다는 게 무엇인가’가다.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지도자가 국민들을 잘 살게 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국민 소득 4만불’을 이야기한다면, 기대를 접는 게 현명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소득 1000불만 되면 국민 모두가 행복해진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그의 30배에 달하는 지금, 우리는 ‘잘 살고’ 있는가?

(2편으로 이어집니다.)

<2015-02-04>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박정희에 대한 또 하나의 해석, 섬뜩하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