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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양반이 봤다면 온정신으로 못 돌아다녔을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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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1950년 대전 골령골 학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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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하(80)씨가 65년 전 학살 현장을 가르키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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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증언 도중 눈물을 글썽였다. 이어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어이구~ 어이구~ 생각만 해도 기가 막혀. 사람이 할 짓이 아녀. 짐승이 할 짓이지…. 못할 짓이지. 설령 죄를 지었어도 그렇게 죽여서는 안 되는 거여…. 참혹했어. 만약 기자 양반이 봤다면 온정신으로 못 돌아다녔을겨.” 

최근 골령골(대전 동구 낭월동 곤룡길) 현장에서 만난 박성하(80, 충북 옥천군 군서면)씨는 그때를 되새기며 몇 번씩 고개를 가로저었다. 65년 전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어느 날. 박씨는 15살 앳된 소년 시절이었다.

여느 때처럼 마을 뒷산에 바람을 쐬기 위해 올라갔다. 그가 살고 있는 충북 옥천군 소재 사향마을은 지금의 곤령터널을 사이에 놓고 대전시와 경계에 들어서 있다. 마을 뒷산 산등성이를 기준으로 앞쪽은 대전시고 뒤쪽은 옥천군이다. 

“죽이고 또 죽이고…” 2시간 동안의 학살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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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하(80)씨가 학살터에 서서 자신이 현장을 지켜봤던 산등성이를 가르켰다. 철탑 부근이 박씨가 지목한 유해매장 추정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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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뒷산 새질리 골짜기 능선에는 큰 아름드리 참나무가 정자나무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재를 넘어 오가는 사람들은 참나무 아래서 땀을 식히거나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곤 했다. 그날도 소년은 참나무 아래서 대전 쪽 산 아래를 바라보며 무심히 앉아 있었다. 

그때였다. 산 아래 저만치에서 트럭이 한 대 올라와 멈췄다. 이어 총을 든 군인과 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싣고 온 수십여 명의 사람들을 미리 파놓은 큰 구덩이 앞에 줄세웠다. 함께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 반대편 산 아래 마을로 서둘러 도망치듯 내려갔다. 

하지만 소년은 홀로 남았다. 두려움에 가슴이 방망이질하는데도 호기심에 바닥에 납작 엎드려 상황을 주시했다. 잠시 후 구덩이 앞쪽에서 하얀 불빛이 반짝거렸다. 뒤이어 후두두둑 총소리가 울렸다. 일렬로 서 있던 사람들이 구덩이 안으로 쓰러졌다. 다시 사람들을 가득 태운 또 한 대의 트럭이 멈췄다. 다시 구덩이 앞에 줄을 세우더니 총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 사람들이 구덩이 안으로 쑤셔박히듯 넘어졌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두려움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봐서는 안 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면 곧바로 군인과 경찰의 눈에 발각될 것만 같았다. 
   
“사람을 다 죽일 때까지 쭉 지켜봤어. 대략 오전 11시쯤부터 오후 1시까지 2시간 정도는 됐던 거 같아. 몇 명인지는 모르지. 짐작도 안 돼. 하여튼 2시간 내내 죽였어.”

“틀림 없어… 여기야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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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유해발굴단원이 수습한 유해를 정돈하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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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군인과 경찰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엎드린 그 자세 그대로 그곳을 지켜봤다. 

“나무를 하러 주변 온 산을 다녔는데도 사람 파묻은 그 구덩이가 있는 그 근처엔 못 가겠는 거야. 근데 수년 전 산 날망(산등성이)에서 보니께 바로 그 자리에 (한전에서) 철탑(고압 송전로)을 세웠더라고. 허 참….”

박씨가 언급한 송전탑 부근 학살 터에 대한 증언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또 다른 증언에 따라 해당 지점(7지점)에 대한 유해 발굴을 시도했다. 하지만 단 한 점의 유해도 찾지 못했다. 때문에 망설이는 박씨를 설득해 학살 현장까지 동행했다.  

“(2007년 발굴지점이) 틀렸어. 엉뚱한 곳을 팠어. (철탑 아래를 가르키며) 틀림없어, 여기야 여기. 그때 나한테 물어봤으면 헛고생 안 했을 텐데….”

박씨가 지목한 자리는 지난 2007년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발굴한 지점으로부터 왼쪽으로 불과 1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증언대로라면 10미터를 사이에 두고 유해발굴에 실패한 것이다. 

또 다른 180미터 구덩이에는 집 짓고 포도나무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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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일 대전 골령골 1학살지에서 발굴된 유해 옆에 유족이 가져놓은 국화가 놓여 있다. 유해 옆에는 함께 발굴된 탄피가 놓여 있다.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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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는 또 다른 암매장 추정지(제2학살지)까지 기자를 안내했다. 역시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일치하는 곳이다. 장날마다 어머니를 따라 재(골령골)를 넘어 다니며 구덩이 부근에서 사람 뼈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거나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했다. 

“다는 몰라도 큰 구덩이는 대략 알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기 긴밭 도로가에는 산에서 내려온 물이 흐르는 도랑이 있었어. 그 도랑을 따라 구덩이를 파고(약 180m) 거기에 사람들을 죽여서 묻었어. 말도 마. 불그죽죽한 피가 한참 동안 흘러나오고 했어.”

그는 암매장지 위에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짓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원래 이 자리는 일정(일제강점기) 때 일본놈들이 포탄을 쌓아놓던 자리였어. 학살이 있고나서 한참 후 OOO라는 사람이 돈을 벌어서 그 땅을 사서는 논을 쳤지(논으로 만들었지). 그때 내가 우연히 지나가다 봤는데 산기슭에서 사람 다리뼈가 불거져 나오더라구. 그걸 보고  내가 ‘아이구 땅을 파는 거야, 시체를 파는 거야?’ 그 소리까지 했구먼. 그러구 다시 밭으로 개간하더니 그 위에 집을 짓고, 비닐하우스를 짓고, 포도나무까지 심더라구…. (사람을 죽여 파묻은 구덩이라는 걸) 알면 못했을 거구먼.”(관련기사 : 땅 속에 묻힌 7천명… 돈 때문에 그냥 둔다는 정부)

“유해발굴?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진작 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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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일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유해발굴지 위에 세운 솟대. 솟대 아래에는 미발굴유해가 묻혀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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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 1일까지 일주일 동안 시민사회단체 주도로 유해를 발굴한 제1학살지에 대해서도 기억을 더듬었다.

“거긴 직접 보진 못했지만 얘기를 전해 들었지. 그 자리에서는 말뚝에다 사람을 한 명씩 붙들어 매고 수건으로 눈을 가린 뒤 총살해 묻었다고 했어. 그 아래쪽(유해를 발굴한 지점 아래 쪽 제재소 부근)에는 주로 서울에서 끌려온 여대생들을 죽였다고 들었어.”

그는 인터뷰 도중 몇 번씩 눈물을 훔쳤다. 수십여 년이 흘렸지만 학살 현장을 지켜본 트라우마는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듯했다. 일부 발굴된 유해가 삭아서 온전한 게 없다고 전하자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늦었어. 유골을 약재로 쓴다고 파간 것만 해도 엄청나…. 죽은 사람들이 죄 보도연맹인데, 뭔지도 모르고 가입한 사람들이여. 억울하게 죽은겨…. 진작 발굴했어야지….”

대전 산내 골령골은?
대전 산내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 13-1번지)에서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를 대상으로 대량 학살(1차 : 6월 28~30일 1400명, 2차 : 7월 3~5일 1800명, 3차 : 7월 6~17일 1700~3700명)이 벌어졌다. 당시 희생자들은 충남지구 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한국전쟁유족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4·9통일평화재단, 포럼진실과정의,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과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대전지역 19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달 23일부터 지난 1일까지 일주일 동안 산내 골령골에서 7일간 일정으로 약 20구(추정)의 유해를 발굴했다. 하지만 유해 대부분은 방치돼 훼손되고 있다.

 

<2015-03-09>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기자 양반이 봤다면 온정신으로 못 돌아다녔을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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