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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펀딩] 2화 “일본 가서 공부 더하고 돈도 벌어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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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코시에 끌려갔던 13살 소녀 이야기

후지코시 이이토 다레가 윳다

사쿠라 하카게노 키노시타데


징지부 미쓰이가 있다소오다


와타시와 만마토 다마사렛다




쯔레데 유쿠노와 야스케레도


온나와 노세나이 기송센…

(후지코시 좋다고 누가 말했나

벗나무 잎 그늘 아래에


징집부 미쓰이가 말했단다


나는 감쪽같이 속았다.




끌고 가는 건 쉬워도


여자는 안 태우는 귀국선…)

 

” 할머니 그게 무슨 노래예요?

응? 해방되고 나서 아직 후지코시 공장에 있을 때 불렀던 노래, 숙소가 2층이었거든. 난간에 나가 있다가 일본사람이 지나가면 그 사람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불렀지, 그때는 이제 일은 안 하고 집에 돌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시간이 많았어, 어떤 언니가 가르쳐 줬는데 누군지는 기억이 안 나고 노래만 생각나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식량과 무기를 생산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노동력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여자근로동원의 촉진에 관한 건』(1943.9) 『여자정신근로령』(1944.8)을 시행하며 조선인 여자아이들을 끌고 가 군수공장에서 무기를 생산하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후지코시 도야마 공장,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도쿄 아사이토 누마즈 공장 등에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이 징용당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예전 신문이나 피해자들의 학적부를 보면 후쿠오카, 나가사키 등과 만주에도 근로정신대가 동원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근로정신대로 국내와 해외로 동원당한 피해자가 얼마나 있었는지 전체적인 정확한 현황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노래를 부른 최희순 할머니는 1931년 2월 생으로 올해 85세입니다. 전주에서 소학교 6학년을 다니던 13살 때 일본인 교장선생님과 학교에 찾아온 모집원의 설명을 듣고 일본의 도야마 후지코시에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할머니처럼 학교 교원에게 속아서 근로정신대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반 아이들 50명 중에 안갈 사람 10명을 제비뽑기하고 나머지 40명을 데리고 갔다거나, 봄에 졸업하고 고향집에 있는데 가을에 면 직원과 일본사람이 찾아와서 ‘광’에 숨어 있는 것을 끌고 간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어떻게 된 건지, 아버지가 만주로 가시고 어머니하고 둘이 살았는데 집이 너무 가난했어, 그래도 학교 성적은 좋았거든 수학도 잘하고..진학해서 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어머님이 말은 안하셨지만 나도 진학할 형편이 안 되는 걸아니까 포기하는 거지.

 

일본 가서 공부 더 하고


돈도 벌어올게 “

그런데 어느 날 교장선생님이 학생들이 모아 놓고서는 ‘일본에, 후지코시회사에 가면, 공부를 할 수 있다, 돈을 벌 수 있다, 생활은 걱정 안 해도 된다. 무엇이든지 배울 수 있으니까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올 수 있다’고 하면서 일본에 가라고 하잖아. 담임선생님도 동무들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불러서, 가라고 설득하고.

어머니가 절대 안 된다고 다음날 학교에 찾아가서 선생님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는 지금 같지 않아서 선생님이 ‘이미 정해졌으니 어쩔 수 없다. 걱정 말고 보내라’고 하니까 어머니도 방법이 없는 거야, 나도 옆에서 ‘공부도 더 하고 돈도 벌어오겠다’고 계속 조르고, 결국 허락할 수 밖에 없었지.”

1945년 2월 25일, 전주역에서 환송식 같은 것을 하고 근로정신대원 50명이 일본으로 출발했습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원들이 행진을 했습니다.

울고 있는 가족들과 아이들 사이를 경찰들이 막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거나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최희순 할머니는 이날 어머니가 사람들 사이에 서서 서럽게 울고 계시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본 가서 공부 더 하고 돈도 벌어올게”

▲1943 소학교 5학년 최희순 할머니와 어머니

공장에 도착 한 다음날부터 제식훈련을 시작하며 아이들은 일본에 오기 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훈련이 끝나고 작업장이 정해진 후에도 군대식 관리는 계속되었습니다. 25명이 한 방에서 생활했고, 숙소에서 공장으로 출발하기 전, 숙소로 돌아온 후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 이렇게 하루 세 번 점호를 했습니다. 잠잘 때, 밥 먹을 때, 일할 때도 함상 감시하는 사람이 따라다녔습니다. 물론 정해진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호되게 혼이 났습니다.


” 한국에서 들었던 이야기는


완전 거짓말이었지 “

“도착하마자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한국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완전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지, 그 때가 3월이었는데 공장이 벌판에 있었기 때문에 바람도 많이 불고 너무 추웠거든 손끝이 어는 것 같았어, 훈련하다가 저기 멀리서 ‘집합’하고 부르면 빨리 뛰어가야 돼. 동작이 조금만 느려도 뺨을 때리면서 야단치니까 너무 무서운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열 세살, 열 네살 먹은 애기들이 뭘 알아? 그냥 벌벌 떨면서 시키는 대로 하는거지. 애들이 밤에 잠자리에서 울고 그랬어.”

▲ 2005.10.17. 도야마후지코시 공장 북문 벽(360cm)

하루 일과는 오전 6시 기상, 8시 작업 시작, 오후 6시 퇴근, 10시 취침이었습니다. 기본적인 노동시간은 8~10시간이었지만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숙소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야근하는 날이 적지 않았습니다.

배치된 부서마다 하는 일이 달랐지만 대부분 밀링머신 같은 금속가공기계를 조작하는 일을 했습니다. 항공기 등 기계에 들어가는 베어링을 만든 분들도 있고 포탄의 외피를 만들었다는 할머니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일을 하기에는 작업대가 너무 높아 기계 앞에 나무 받침을 디디고 올라서야 했습니다. 남자 직원이 작업장을 돌아다니며 감시했지만 어차피 한 사람의 가공이 잘못되면 한 라인 전체작업이 망가지기 때문에 집중해서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린 아이들로서는 견딜 수 없는 가혹한 노동이었습니다.

“앞쪽에 기계를 돌리는 벨트가 엄청 빨리 돌아가거든 정신 안 차리면 금방 사고나, 내 두 칸 옆에 있던 애가 옷이 빨려 들어갔는지 어떻게 된 건지 기계에 걸려서 옷이 다 찢어지고 크게 다쳤는데 그 뒤로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어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몰라, 나도 왼손 검지가 기계에 끼어서 크게 다친 적도 있고.”

“12시부터 1시까지 점심시간이고 꼬박서서 일해. 기계가 서서 일하는 기계야 의자도 없어, 중간에 15분씩 두 번 쉬는 시간이 있는데 종일 서서 일하니까 다리가 뚱뚱 붓거든, 나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다리가 부어서 병원에 입원하는 사람도 있었는걸 뭐, 애들이 무서우니까 병이 나도록 아파도 어떻게 하지를 못 하는 거야.

작업장 한쪽에 발판 같은 거 엎어 놓은 게 있었는데 쉬는 시간에 거기에 다리 뻗고 앉아서 서로 ‘몸 아픈 거 괜찮아? 배고프다, 집에 가고 싶다’고 수군수군하고 그랬어, 매일 똑같으니까 별로 할 얘기도 없는 거야, 우리끼리는 우리말, 한국말 하는데 일본사람이 오면 조선말 했다고 야단맞으니까 아무 말도 안하고.”

그러면 공장에서 일하는게 제일 힘들었는지, 다른게 괴로운게 있었는지 여쭤봤습니다.

 

” 일하는 것도 힘든데


배고픈게 더 힘들어

“아침에 요만한 밥 간장종지 만큼 콩 뜨문뜨문 들어간 밥하고 된장국, 아무것도 안 들어간 멀건 된장국 한 공기, 짠지 딱 두 쪽씩 썰은 거 이렇게 주거든 그걸 먹고 배고프잖아, 밥도 그렇고 반찬이 없으니까.

가끔 해초국 같은 것도 나왔는데 먹지를 못하겠더라고. 그러니까 점심으로 받아온 빵을 미리 다 먹어버리는 거야 손바닥 만한 삼각빵 같은 거, 그냥 지금 먹는 이런 빵이 아니고 빈대떡 같은 빵을, 납작한 빵을 두 개 주는데 11시 15분에, 쉬는 시간에 다 먹어버려, 배고파서.”

1945년 8월 15일, 라디오 방송을 듣고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할머니는 매일 반복되던 B29의 폭격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살아남았다고 안도했습니다. 해방 다음 날부터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서 마을에 사는 조선인에게 찾아가 집에서 가져간 옷을 콩으로 바꿔먹으며 버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해 10월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사람들이 돌아오는데 애가 안 오니까 어머님이 얼마나 걱정했겠어.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소학교 담임선생님, 나한테 일본에 가라고 한 선생님 집에 찾아가서 ‘내 딸이 안돌아오면 나를 땅에 묻든지, 당신이 가서 내 딸을 찾아오든지 하라’고 했다고 하시더라구.

해방된 날부터 매일매일 전주역에 나와서 기차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셨다고 하시는데 그 때 어머니 마음을 생각하면..내가 고생한 것보다 억지부리고, 걱정 끼쳐드리고 한 게 가슴이 아파.”

*  *  *



1945.10.19. 전라북도 여자근로정신대 귀환시 사진, 하카타항(『進駐軍がしたフクオカ後集』)


여자근로정신대 강제동원 피해의 특징은 두 가지로 꼽힙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강제동원 피해와 달리 어린 아이들을 데려가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1932년에 일본은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예외적 경우에도 동원할 수 있는 대상을 건강한 성년 남성으로 한정하는 ‘강제노동에 관한 협약'(ILO 협약 제29호)을 비준했습니다.

법령으로 근로정신대를 만들고 조선총독부 지방 관리와 교원 등 공무원을 통해 조직적으로 어린 소녀들을 속이고, 협박, 유인하여 감금하고 노동력을 착취한 것은 국제법을 위반한 범죄행위였습니다.

또한 열악한 환경에서 중노동을 강제한 점,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점 등은 2003년 4월에 시작한 할머니들의 소송에서도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것이었다고 일본의 재판부도 인정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해방 후에도 그 피해가 가중되며 지속되었다는 점입니다. 무사히 귀국한 피해자들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당시에는 ‘근로정신대’와 일본군’위안부’가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가 일본에 끌려갔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 한국사회의 오해, 편견이


평생 할머니들을 괴롭혔다 “


할머니들이 근로정신대에 끌려갔던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피해는 소학교를 갓 졸업한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광범위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혼인을 하기 어려웠고, 혼인 후에 근로정신대 경력이 드러나 이혼당하거나 ‘시댁’의 배척을 견디며 살아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두려워 평생 혼자 살아온 할머니도 계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재판에 원고로 참여하겠다고 어렵게 결정하고서도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십니다.

할머니들이 자신이 당한 피해를 평생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죄인처럼 숨겨온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합니다.


▲2014.10.30 후지코시근로정신대 소송 1심 판결(서울중앙지방법원)

지난 2월 4일에 미쓰비시중공업에 끌려갔던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에게 일본정부 기구가 연금 탈퇴 수당으로 199엔(원화 약 1,850원)을 지급하여 공분을 사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일본인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며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고 한국정부는 ‘사적인 민사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고 모르는 척하고 있습니다. 양국 정부가 일제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철학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재 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의 소송은 한국에서 세 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주식회사 후지코시’를 상대로 한 소송이 1건(2013.2.14.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소),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 2건(2012.10.24 / 2014.2.27 광주지방법원에 제소).

할머니들이 건강히 살아계시는 동안 재판결과가 나와서 가해회사와 일본정부에게 사과를 받고, 마음에 남은 짐을 내려두고 속 시원히 여생을 살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글 | 김진영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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