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당한 여운택 할아버지의 증언
2012년 5월 24일 오후 2시 대법원 1호 법정실.
이날따라 처리해야 할 사건이 많아서인지, 법정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재판관은 사건번호와 결과를 빠른 속도로 무표정하게 읽어나갔다. 재판관의 낮은 목소리에 다소 무료하고 짜증도 슬슬 나려했다. 15분 쯤 지났을까.
“사건번호 2009다22549 손해배상 청구 소송, 원고 망 박창환의 소송수계인 외 4명, 피고 미쓰비시중공업주식회사, 주문,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등법원에 환송한다. 사건번호 2009다68620 손해배상청구소송, 원고 여운택 외 3명, 피고 신일본제철주식회사, 주문,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에 환송한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어, 이게 뭔 소리야.’
옆자리에 앉아 있던 법무법인 해마루의 장영석 변호사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이겼다’는 것을 서로 확인했다. 우리 둘은 서둘러 1호실을 빠져나왔다. 검색대 밖에서 이희자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겼습니다.”
“이겼대? 정말.”
“예.”
말을 한 나 자신도 믿기 어려웠다. 15년간의 싸움, 그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원폭 피해자 소송을 제외하면 다른 모든 강제동원 피해 소송에서 졌다. 그것을 뒤집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세상에, 세상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네.”
– 김민철, 보수적인 재판부가 내린 혁신적인 판결 『내일을 여는 역사』, 2012년 가을호.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선인’ 120만명 정도가 해외로 징용·징병 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군인과 군속 36만 5000여명, 군수기업 등에 노동자로 끌려간 사람 66만 7684명 정도가 확인되었습니다. 수치는 어느 정도 추정하고 있지만 끌려간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얼마나,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 *
살아 돌아오면 다행이었던 그 시절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들은 그 시절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고, 마을에는 돌아오지 않는 아들과 남편을 기다리며 대문을 열어두고 사는 집이 적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60, 70년 동안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힘겨운 세월을 혼자 살아온 아내의 이야기나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아온 유족들의 이야기를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전쟁과 군사독재의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한국사회는 식민지 시절을 되돌아보고 남아있는 문제를 해결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1965년에 한국정부와 일본정부는 청구권협정을 맺으면서 개인의 청구권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논했지만 정작 서로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피해자와 가족의 상처를 보살피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일제 식민지배에 의한 피해는 ‘국가’의 무게에 짓눌려 방치되었고 그 시간 동안 우리 사회가 짊어져야 할 모순의 크기도 거대해졌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올바른 관계를 이야기하려면 이 문제부터 정리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가 이 싸움에 힘을 보태기로 마음을 정한 이유 중에 하나였습니다.
대법원 판결 있던 날에 저는 강연 요청을 받아 일본에 있었습니다. 담당 변호사이면서 현장에 있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아쉽겠지만 나중에 받아본 판결문에는 아쉬움을 잊을 만큼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판결 이야기는 다시 하기로 하고 재판에 관한 설명을 좀 해보겠습니다.
▲1997.12.24 신일본제철 주식회사 제소, 일본 오사카지방법원 앞
아무 책임지지 않으려는 신일본제철
신일본제철에 대한 피해자들의 싸움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74년 도쿄의 헌책방에서 일본제철에서 생산한 조선인노무자관계라는 자료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 일본 고마자와 대학의 고쇼 타다시 교수가 이 자료를 근거로 연행조선인미불금 공탁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과거 일본제철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 근거 자료”
처음으로 과거 일본제철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공탁내역, 공탁 경위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피해자와 일본 시민단체, 변호사들은 일본제철의 후신인 신일본제철 주식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1997년 12월 24일, 여운택, 신천수 원고 두 분이 끌려갔던 오사카 제철소의 관할지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소를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2002년 항소심이 진행 중인 가운데 저는 원고 두 분을 모시고 일본 도쿄의 신일본제철 본사에 찾아갔습니다. 당시에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법적인 청구에 대해 일본법원이 ‘꾸준히’ 기각판결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가해자인 회사가 책임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원고 본인들을 모시고 회사 측과 화해협상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회사에 가보니 협상에 호의적이던 담당자가 바뀌었습니다. 새로 담당이 된 사람은 ‘재판이 진행되고 있으니 재판 결과대로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더 이상 협상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2002년 11월 일본 고등재판소에서,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하였고 신일본제철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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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6.30 재판보고회 후 선전활동, 신일본제철 일본 오사카지사 앞
일본 법원이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다고 해서 있는 문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피해자들의 고통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 일본 법원이 항상 ‘한일청구권협정’을 근거로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했지만 당시에는 그 문서가 공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재판이 진행 중이던 2002년 10월 한일회담 문서 공개를 거부한 외교통상부장관을 상대로 서울행정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2004년 2월 13일에 일부 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일본 법원 “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은 달라”
그리고 다시 관계자들이 한국에서 재판을 진행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2005년 2월 28일 일본재판에서 패소한 여운택, 신천수 두 분을 포함하여 피해자 5명이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때는 한국정부가 한일회담 문서를 모두 공개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소송이 쉽게 끝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서울중앙지방법원은 2008년 4월 3일 원고 패소 판결을 하였고, 2009년 7월 16일 원고들은 항소심에서도 패소하였습니다. 법원은 신일본제철이 원고들을 강제동원 했던 예전 ‘일본제철’과 다른 회사이며, 일본의 패소 판결과 모순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회사가 다르다고 판단한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2차 대전 중 일본의 군수기업이었던 일본제철은 전쟁이 끝나고 막대한 부채를 안고 있었습니다. 일본정부는 기업들의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몇 가지 특별법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회사를 쪼개서 분리하면서 부채를 안은 부분은 파산시키고 나머지 부분은 새로운 기업인 것처럼 경제활동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분리한 회사들을 합병해서 다시 하나의 기업으로 만들었습니다. 회사의 경영진도, 공장도, 자산도 합병 후에는 원래 기업과 같지만 채무만 없애는 마법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일본정부가 만든 특별법이니까 채권을 갖고 있던 일본국민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본국민이 아닌 한국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기당한 것처럼 황당한 것이었습니다.
원고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어 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그리고 대법원에서 판결하겠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상고 후 거의 2년 10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암담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대법원마저 원고들에게 패소 판결을 하면 법적인 싸움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연로한 원고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고민이 깊었습니다.
2012년 5월 24일, 판결 일에 원고 할아버님들의 몸이 쇠약하고 거동도 불편했기 때문에 아무도 법정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승소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다면 꼭 오시라고 말씀드렸겠지만 힘든 몸을 이끌고 법원까지 와서 패소 판결 내용을 듣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한국 법원의 파기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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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7.10 파기환송심 판결 후 기자회견, 서울고등법원 앞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파기환송 판결이 나왔습니다.
대법원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 자체가 불법적인 강점이고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일본 판결을 한국 법원에 적용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청구권협정에 대해서는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가해회사와 지금 신일본주금(신일본제철과 스미토모금속공업이 합병한 회사)은 같은 회사이기 때문에 원고들에게 피고 회사가 배상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신일철주금은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대법원에 상고했고, 현재 이 재판은 진행 중입니다.
일본 총리는 이 판결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보이면서 일본기업들이 한국 법원의 판결이 나더라도 따르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식민지배와 비인도적인 약탈행위를 저지르고도 무엇을 얼마만큼 잘못한 것인지, 어디까지 사죄하고 반성해야 하는지 인식도 고민도 없는 듯합니다.
판결의 근거를 찬찬히 읽어보면 이 재판이 단순히 개인이 당한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판결문에는 지금 한국사회가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국가가 개인에게 가한 비인간적인 행위는 어떻게 추궁되어야 하는지, 일본과 한국은 어떤 입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가야 하는지 여러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비추어 볼 때,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에 지나지 않고”(판결문 11쪽)
‘일본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므로, 이러한 판결 이유가 담긴 일본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결과는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일본 판결을 승인하여 그 효력을 인정할 수는 없다.’(판결문 11~12쪽)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
‘일본의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나 식민지배와 직결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등에 비추어 보면, 위 원고들의 손해배상청구권에 대하여는 청구권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아니하였음’(판결문 15쪽)
“피해자가 죽는다고 해서
피해사실이 사라지고
문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여운택 할아버님은 2013년 12월 6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신천수 할아버님은 2014년 10월 8일에 돌아가셨습니다. 피해를 당한 본인이 죽는다고 해서 피해사실이 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사회와 역사가 기억하게 되고 책임을 추궁하는 힘은 더욱 매서워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희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2002년 여운택, 신천수 두 선생님과 함께 신일본제철 본사로 찾아갔던 것처럼 올해에는 대법원의 판결문을 들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신일철주금을 다시 찾아갔으면 합니다.
글 | 장완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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