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을 방문해 초대한 집주인에게 이런저런 충고를 한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일지 모릅니다. 더구나 방문자와 초대자가 한 나라의 정상이라면 더욱 그럴 겁니다. 언론이라는 제삼자가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7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는 그런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서도 할 말을 다했습니다. 메시지는 콕콕 짚어 전달하면서 ‘예의 바르다’는 평을 들은 메르켈 총리의 노련함을 다시 정리해봤습니다.
● ‘예의 바른’ 메르켈, 독일의 경험만 얘기했다
메르켈 총리는 자신은 독일의 경험만을 말할 뿐이라는 전제를 꼭 붙였습니다.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도 ‘일본에 조언할 위치에 있지 않다’ ‘일본에 이래라저래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라’ ‘과거 정리가 화해의 전제조건이다’라는 메시지를 정중하게 날렸습니다. 일본 기자가 한국 중국과의 관계 개선 방법을 묻자, 메르켈 총리는 ‘독일이 과거 정리를 하니까 프랑스나 유럽이 독일에 관용을 베풀었다’고 답했습니다. 언론이 이런 답을 어떤 기사로 만들 지 메르켈 총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상대가 직접 반발할 수 없는 화법으로 충고와 조언의 메시지를 날렸습니다.
● ‘위안부 발언’은 간접화법으로 전달했다
한국과 일본은 현재 ‘위안부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안부 관련 발언은 대단히 민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메르켈 총리는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위안부를 끄집어 냈습니다. 일본의 제1야당인 민주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입니다. 메르켈 총리와 오카다 민주당 대표의 회담은 비공개로 진행됐습니다. 회담 내용을 나중에 오카다 대표가 설명했습니다. 오카다 대표가 ‘한국 중국과 화해가 잘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하니까, 메르켈 총리는 ‘한국과 일본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어 화해가 중요하다,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게 좋다’ 고 말했습니다. 한 나라 정상의 발언은 미리 선택되고 정제된다는 점에서 보면, 메르켈 총리의 위안부 발언은 작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안과 관련된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비공개 장소를 택한겁니다.
● ‘탈 원전’은 직접화법으로 조언했다
독일의 탈 원전 방침에 대해선 방일 전부터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일본 학자와의 대화 동영상을 직접 정부 홈페이지에 올리고 ‘후쿠시마 원전 발생 후 탈 원전을 결심했다. 일본도 같은 길을 가야 한다’고 직접 충고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대중 강연에서도 탈원전을 결단한 배경에 대해 ‘기술수준이 높은 일본에서도 예측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됐기 때문’이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습니다. 원전 재가동 방침을 천명한 아베 정권의 입장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돌직구’였습니다. 아베 총리는 ‘일본도 장기적으로는 탈원전을 지향하고 있다’는 말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지난 7년간 중국을 7번 방문했습니다. 일본은 7년 만의 방문이었습니다. 일본 언론은 메르켈 총리의 방일을 두고, 동아시아 외교노선이 ‘친중국’에서 ‘균형외교’로 바뀌는 신호라는 기대를 나타냈습니다. 하지만 메르켈 총리는 일본이 듣기 원하는 메시지는 남기지 않았습니다. 스가 관방장관이 메르켈 총리의 과거 발언에 대해 ‘기자 질문에 답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나, 기시다 외무장관이 ‘일본과 독일의 전후 처리 방식을 단순비교 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반응한 것은 당혹스러움의 표현일 것입니다.
중국 언론은 ‘메르켈 총리가 아베 총리게게 호된 역사 교육을 했다’고 환호했고, 영국 BBC는 ‘메르켈 총리가 넌지시 아베 총리에게 충고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독일 언론은 ‘할말은 하면서도 예의를 잃지 않았다’고 전했습니다. G7 국가 중 가장 오래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메르켈 총리는 일본을 바라보는 세계인의 시각을 품위 있게 일본 사회에 각인시켰습니다.
<2015-03-12> SBS
☞기사원문: [월드리포트] ‘예의 바른’ 메르켈, ‘위안부 발언’은 작심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