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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22)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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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발톱 꺼내든 ‘박정희 공포정치’… ‘반유신’ 장준하·백기완 첫 희생양


■ 유신정권의 폭주, 각계의 저항과 개헌운동


5·16 군사 쿠데타(국권 찬탈) – 헌법 파괴 – 위헌적 3공 헌법 – 역시 위헌적 3선개헌 – 7·4 남북공동선언 – 10·17 대통령특별선언, 비상계엄 선포 – 헌법 효력정지, 국회 해산(비상국무회의, 국회 기능 대행) – 국회 배제한 유신헌법 – 통대 선거(체육관 대통령) – 영구집권 체제. 박정희 권부(權府) 출현 후 헌정 파괴의 궤적을 메모식 명사구(名詞句)로만 나열해 보았다.


박정희의 폭주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3년 8월에는, 해외에서 ‘유신’ 반대투쟁을 벌이고 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을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일본에서 납치해 왔고, 10월에 들어서자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가의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다. 12월에는 함석헌·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를 망라한 ‘개헌청원운동본부’가 장준하, 백기완의 주도하에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이런 범국민적 저항에 몰리게 된 대통령 박정희와 국무총리 김종필은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하면서 개헌서명운동의 중지를 강력히 요구하는 담화를 발표한다. 하지만 이미 전국적으로 번진 개헌(유신헌법 폐지)운동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되어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74년의 새해 벽두인 1월7일, 61명의 문인들이 개헌서명운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는가 하면, 군부정권의 여당인 공화당의 초대 총재이자 당의장을 역임한 정구영과 전 사무총장 예춘호가 함께 공화당을 탈당함으로써 집권자를 낭패에 빠뜨렸다.


▲일러스트 | 박건웅


■ 긴급조치 1호, 개헌청원에 15년 징역


그러자 박 정권이 최악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대증요법으로 긴급히 내놓은 조치가 1월8일의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였다. 이런 조치는 그 이름부터가 매우 생소하고 미심쩍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로 시작되는 이 조치는 유신헌법 반대자를 군법회의에서 15년 징역으로 엄벌하겠다는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박 대통령은 “불행하게도 국가적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는 일부 인사들과 불순분자들은 부질없는 선동과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유포시키면서 사회혼란을 조성하여 헌정질서인 유신체제를 부정하고 이를 전복하려 들고 있다”고 비난하고, 이를 방관할 경우 안보와 질서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긴급조치를 선포한다고 주장했다. 헌법상 보장되는 개헌 논의조차도 15년 징역이라는 잔인한 형벌을 들이대야 할 만큼 그 헌법과 그 정권에 심각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1인 영구집권을 위한 공포정치의 막을 연 ‘유신시대’는 그것을 선포한 집권자보다 장수하여 1979년 12월8일, 그 9호가 해제될 때까지 2159일 동안 이 나라를 온통 탄압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 장준하·백기완, 유신 반대의 선봉에 서


이런 초법적인 엄벌 위협에도 불구하고 반유신 개헌운동은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번져나갔다. 그리고 긴급조치 1호 위반 첫 사건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일제 때 중국에서 광복군에 투신했고, 귀국 후에는 ‘사상계’ 주간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준하(58), 그리고 통일운동가이자 백범사상연구소장인 백기완(42), 이 두 사람이 긴급조치 재판극의 첫 배역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은 그 전해인 1973년 12월24일 함석헌·천관우·계훈제·문동환·홍남순·김수환 등 각계 인사들이 뜻을 모아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할 때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그 후 개헌운동의 중심에서 다각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다. 긴급조치(긴조) 사건은 일반법원이 아닌 비상보통군법회의가 1심, 비상고등군법회의가 2심, 대법원이 최종심을 맡게 되어 있었다. 이름부터 ‘비상’이 ‘보통’에 얹혀 있으니 피차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백기완 선생의 변호인이 되었다. 위 두 사람은 긴조 1호가 나온 지 5일 만에 중앙정보부로 연행 구속되어 그달 25일에 기소, 31일에 첫 공판, 바로 다음날인 2월1일 판결 선고, 이런 식의 초고속 질주로 1라운드가 끝났다. 서울 삼각지, 국방부 청사 근처의 언덕바지에 있는 군용 퀀셋 안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열렸는데, 법정 중앙 단상에는 재판장 육군중장 박희도, 심판관석엔 육군소장 신현수, 일반법원의 판사·검사 각 1명, 법무사 육군중령 김영범, 이렇게 5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으로 비상군법회의 법정에 선 기독교 성직자들. 오른쪽부터 김진홍, 이해학, 이규상, 인명진, 박윤수, 김경락.


■ 긴급조치 비방도 ‘긴급조치 위반’이라고


피고인석에 선 두 사람은 재야 민주세력의 지도자답게 자신들의 유신 반대, 개헌운동에 관하여 당당하게 소신을 밝혀 나갔다. 그런데 공소장에는 정작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에 들어간 행위는 이른바 모두(冒頭)사실, 즉 처벌대상인 범죄사실이 아니라 그 전 단계의 경과사실로 기재되어 있었다. 긴조가 발표된 1월8일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막상 공소사실에는 긴조를 비난하는 말 몇 마디만 남게 되었다. 예컨대, “국민이 대통령에게 개헌청원도 못한단 말인가” “개헌이란 ‘개’자만 말해도 잡혀가게 되어 있으니, 이런 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라는 등의 말을 함으로써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하고(장준하), 또는 “이런 조치는 대통령이 더 오래 해먹겠다는 이야기니 나는 15년 징역을 살고 나오면 백기완옹이 되겠구나”라는 말을 함으로써 대통령 긴조를 비방하고 …,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서 자못 희극적이었다. 긴조 1호에는 유신헌법 비방뿐 아니라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 역시 긴조 위반으로 처벌한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이다. 그 저인망식 표현에 냉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 백기완의 5000원, 장준하의 180원


변호인인 나와 백기완 선생 사이에는 이런 법정 문답도 오갔다.


변호인(변): 이번에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을 때에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는 단돈 5000원뿐이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백기완(백): 예, 딱 5000원밖에 없었습니다.


변: 그동안 개헌운동을 주도해오시면서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을 터인데요?


백: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바라는 엄청난 민심이 바로 우리들의 자금이요, 힘이었으니까요.


내가 그런 질문을 한 데는 개헌운동에 대한 국민적 공감과 백 선생의 헌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당사자인 백 선생도 그때를 회고하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어찌해서 그 많은 변호사 반대신문과 변론 요지를 빼고 굳이 이 대목을 상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한승헌 변호사의 날카롭고 당당한 백기완 변론의 알짜가 살아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반박정희 기류와 온 민중의 염원이 객관화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라고도 했다(백기완 ‘박정희 유신독재와 정면 대결’, <한승헌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범우사, 2006).


그런데 장준하 선생의 호주머니에서는 단돈 180원이 나왔다. 담배 한 갑 값도 안되는 푼돈이었다. 눈물겨운 일이었다.


■ 구형 다음날, 구형대로 징역 15년 선고


1월31일 결심공판에서 군 검찰관은 두 피고인에게 각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단 하루가 지난 다음날(2월1일) 전날의 구형과 똑같은 15년형이 선고되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정찰제 판결’이었다. 이게 개판이지 무슨 재판이냐고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군법회의니까, 다시 말해서 회의 결과에 불과하니까 그리 알고 넘어갑시다.” 내 그런 말을 듣고 한 일은 아니겠지만, 지금은 ‘군사법원’이라고 개명해 ‘회의’는 면했는지 모르겠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도 상고 기각으로 끝났다. 박 정권이 긴조 1호를 발동해, 법률로도 할 수 없는 짓을 대통령 명령 하나로 15년 징역을 먹이겠다니, 황당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공포 분위기가 넘쳐났다.


■ 젊은 기독교 성직자들의 ‘정면돌파’


그러나 그처럼 표독스러운 정권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개헌서명운동을 계속하다가 긴조 1호 위반으로 검거된 정면돌파형 그룹이 있었다. 김진홍(활빈교회 전도사·32세), 이해학(성남 주민교회 전도사·29세), 이규상(수도권특수선교위원회 전도사·34세), 인명진(도시산업선교연합회 목사·29세), 박윤수(창현교회 전도사·29세), 김경락(도시산업선교연합회 총무 겸 영등포 중앙교회 목사·36세) 등 기독교(개신교)계의 젊은 성직자 6명이었다.


그들은 1월17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7층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실에 예고 없이 들어갔다. 총무인 김관석 목사를 동석시킨 가운데 ‘1·8 긴급조치 철회 및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촉진하기 위한 시국선언 기도회’를 열었다. 이해학 전도사가 ‘1·8 조치는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는 등 3개항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참석자 일동은 개헌청원 서명록에 서명한 다음,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기독교 관계 기관 및 단체들을 찾아가 선언문을 배포하고 개헌청원 서명을 받았다.


그들은 검거되어 ‘남산’으로 통칭되는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때 수사관들은 누가 주범인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진홍, 이해학 두 젊은 전도사는 서로 자기가 주범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오히려 수사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수사요원들은 중정이 생기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두 사람을 존경한다고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수사관들이 자기가 담당한 사람을 주범으로 만들기 위해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성명서와 현수막의 글씨를 쓴 김진홍 전도사를 주범으로 하기로 합의(?)했다(이해학, ‘개신교 젊은 성직자들의 긴급조치 저항’, 앞의 실록).


<2015-03-08>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2)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사건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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