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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도서관·미술관… 문화공간 재탄생한 ‘일제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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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10) 서울


▲ 총독부 청사·서울역·조선은행
도심 속 식민지 권력 상징 즐비

근대 문학 속에선 주요 무대


▲ 대다수 리모델링 거쳐 재활용

아픈 역사와 경성의 추억 증언


지난 3일 아침 서울에는 비가 내렸다. 지하철 시청역에서 내려 서울광장으로 올라왔다. 오전 9시쯤 되니 비가 그치고 공기는 한결 맑아졌다. 서울도서관(옛 서울시 청사·등록문화재 제52호)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시민들이 무상한 표정으로 그 앞을 지나갔다. 수평으로 긴 4층 건물로, 길게 뻗은 수직창이 현관문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경성부 청사란 초기 건립 목적에 맞게 제국주의 건축 어휘를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서울은 정치·사회·경제·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식민지배의 중심지였다. 일본은 식민지배의 상징성을 구축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건축물들을 빠른 속도로 도심 곳곳에 세웠다. ‘경성’은 1911년 행정구역을 5부8면제로 개편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1936년에는 고양군·시흥군·김포군의 일부 지역을 편입해 면적이 4배로 확장됐다. 그사이 인구도 20여만명에서 40만명으로 늘어났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가장 많게, 가장 적나라하게 남아 있는 곳이 서울이다.


서울 봉래동에 있는 옛 서울역사. 남만주철도주식회사가 만주~조선~일본을 잇기 위해 경성역이란 이름으로 1925년 준공했다. 광복 이후 1947년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꾸고 50여년간 도시화의 핵심 장소로 쓰였다. 2011년 전시, 공연 등을 선보이는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 284’로 재개관했다.

■ 식민지배의 중심지가 됐던 서울


일본 식민지배의 대표적인 상징 건축물로는 조선총독부 청사, 서울(경성)을 관할하는 경성부 청사, 정신적 억압기제인 조선신궁을 꼽는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1926년 10월 남산 왜성대에서 경복궁 신청사로 이전했다. 같은 시기 남산 밑에 있던 경성이사청(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위치)도 이전, 경성부 청사로 문을 열었다. 조선신궁은 약 5년간의 조성공사 끝에 1925년 남산에 들어섰다. 역사학자들은 3개의 상징물이 1925~1926년 조선신궁~경성부 청사~조선총독부 청사의 순서로 일정 거리를 두고 북쪽 방향으로 늘어서게 된 것을 ‘대경성 건설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라고 보고 있다. 조선신궁은 1945년 광복과 함께 소각됐고, 조선총독부 청사는 1996년 철거됐다. 경성부 청사는 광복 이후 서울시 청사로 쓰이다가 2012년 서울도서관으로 문을 열었다. 경성부 청사는 조선총독부 건축과 기사 이와쓰키 요시유키가 실무 설계를 맡았으며 르네상스 절충식으로 지었다. 현재 도서관 1층 중앙홀이나 외벽, 중앙계단은 초기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안창모 경기대 대학원 역사문화환경보존프로그램 주임교수는 “일본은 서양의 건축양식이 강대국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고 ‘일본이 강한 나라’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서양 양식으로 건축물들을 지었다”고 말했다.


비슷한 느낌을 주는 건축물은 서울도서관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등록문화재 제237호)이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 보면 고딕양식의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출입구를 아치형으로 만들었고, 네모반듯한 육면체로 딱딱한 느낌을 강조했다. 1928년 경성재판소로 지어졌으며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구금했던 장소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사법권을 통해 발현된 현장이다. 광복 후 대법원으로 쓰이다가 2002년 내부와 뒤편을 리모델링해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술관 뒤편으로 나와 대로를 건너 소공로를 따라 10여분 걸어서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사적 제280호) 앞에 섰다. 1912년 조선은행 본점으로 준공해 1989년까지 한국은행 건물로 사용했다. 맞은편에는 신세계백화점 본점(1934년)과 SC제일은행 옛 본점(1935년)이 보였다. 1930년대 식민 자본주의의 핵심 거리다.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는 “1930년대의 충무로와 남대문로 주변은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했으며 한국은행 광장 주변과 소공동 일대는 경성의 대표적인 비즈니스 타운으로 변모됐다”고 말한다.


이 주변은 고뇌하던 식민지 지식인들의 거리이기도 했다. ‘조선은행 앞에 구보는 전차를 내려 장곡천정(소공동)으로 향한다. 생각에 피로한 그는 이제 마땅히 다방에 들러 한 잔의 홍차를 즐겨야 할 것이다.’ 1934년 발표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듯 당시 은행 주변에는 문인들의 다방거리가 있었다. 한편 1934년 인근 명동에 ‘명치좌’란 영화관이 문을 연다. 이 건물도 대표적인 근대건축물로, 2003년 문화체육관광부가 겉만 복원하고 내부는 리모델링해 명동예술극장이란 이름으로 재개관해 사용하고 있다.


서울 명동에 있는 명동예술극장(위 사진)은 1934년 명치좌란 이름으로 문을 연 일본인을 위한 영화관이었다. 서소문동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아래 사진)은 1928년 지어져 경성재판소로 쓰였다. 두 건물 모두 일제강점기 서양 건축 양식을 따온 근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졌다.


■ 긍·부정의 의미 담고 있는 역사의 흔적


걸음을 옮겨 남대문을 거쳐 서울역에 다다랐다. 분홍빛 벽돌 건물에 대형 시계가 걸려 있다. 시간 개념을 심어준 시계, 공간의 이동을 좁힌 기차, 중앙돔과 소첨탑으로 지어진 건축물. 옛 서울역사(사적 제284호)는 오롯이 ‘근대의 상징’이다. 설계 단계부터 식민 수탈을 염두에 두었다. 1900년 7월 경인철도 개통 당시 약 33㎡(10평) 규모의 목조건물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원래 위치는 염천교 부근이었고 이름은 남대문역이었다.


남대문역을 관리하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만철)는 경성역을 일본~조선~만주를 잇는 길을 뚫을 목적으로 1925년 지금 위치에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준공했다. 철도, 광산 등 만주 일대의 이권을 장악하고 있던 만철은 경성역을 일본으로 수익금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었다. 1947년 서울역으로 이름을 바꿔 사용하다 2004년 새 역사가 신축되면서 폐쇄됐다. 약 5년간 복원 작업을 거쳐 2011년 8월 ‘문화역서울284’란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초기 모습 그대로 복원한 대합실, 귀빈실, 양식당 인테리어가 웅장하고 화려해 근대를 다룬 영화나 소설에서 본 것과 흡사했다. 1936년 발표된 이상의 소설 <날개>의 화자가 경성역을 찾아 커피를 마시던 장면이 생각났다. 이 낯선 건축물 안에서도 ‘일등대합실’은 일본인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복원 설명 자료는 옛 서울역이 ‘동경역을 원형으로 지어졌다’고 알려진 것과 달리 ‘스위스의 루체른역사(1896~1971)를 모델로 디자인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서울도서관에서 옛 서울역까지 일제 건축물을 둘러보는 데 약 3시간이 걸렸다.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이 건물들은 역사적으로나 건축적으로나 중요 건축물이다. 광복 이후에도 수십년간 한국 현대사의 면면을 지켜보며 시민들과 함께 지내왔다. 역사의 흔적은 긍정적인 것일 수도 있고,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안 교수는 “일제강점기 건축물을 문화재로 등록해 보존하고, 허물어진 건물을 복원하는 것은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범죄 사실을 증거로 남기는 작업”이라며 “우리와 후손들이 같은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시리즈 끝>

<2015-03-09>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기획 – 사진으로 보는 일제강점기 건축 기행]박물관·도서관·미술관… 문화공간 재탄생한 ‘일제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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