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자 할머니는 1943년 1월, 당시 경기도 강화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 군속으로 징용당한 것이 1944년 2월이었으니까 할머니가 돌을 갓 지났을 때였습니다. 영상에서 나온 것처럼 할머니는 어머니 등에 업힌 채 아버지와 헤어졌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옛날에 어른들이 ‘남편 잡아먹을 상’ ‘애비 잡아먹은 딸년’이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천덕꾸러기처럼 외가에서 자라면서 이희자 할머니는 제대로 학교도 다닐 수 없었습니다.
어릴 때 가끔 외할머니가 들려주신 아버지 이야기가 이희자 할머니가 알고 있는 전부입니다. 할머니는 지금도 추운 겨울날 어린 딸아이와 아내를 두고 눈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아버지의 심정이 전해지면서 오랜 세월 쌓여온 설움이 몰려온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마흔이 넘어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후에서야 상상 속에만 있는 아버지가 아니라 실제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왜 죽어야만 했을까 아무도 그 이유를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막 태어난 나를 두고 왜 아버지가 전쟁터에 끌려가야만 했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정말 돌아가셨다면 유골이라도 찾을 수는 없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집으로 통지서 한 장 온 적도 없고, 인편으로라도 연락을 받지 못했으니 가족들은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없는 식민지였으니까, 전쟁통이었으니까, 그 때는 다 그랬어,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 섞인 낙담으로 묻혀질 의문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는 결혼하면서 떠났던 강화도에 다시 찾아가 징용, 징병으로 끌려갔던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기도 하고, 아버지와 같은 부대에 있었다는 분의 소식을 들으면 전국을 물어물어 찾아다녔습니다. “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을
강제동원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오신 분을 만나면 아버지가 겪었을 고통을 대신 말씀해 주시는구나 하는 마음에 한 마디도 놓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아버지가 겪었을 일이 떠올라 그리움과 분노가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그나마 자신과 같은 처지의 유족들과 만나 서로 의지하며 정을 나눈 덕분에 긴 세월 홀로 참았던 외로움을 조금은 떨쳐 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바로 일본이 저지른 악행의 증거다 1991년은 한일 과거사 청산운동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해였습니다.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로 그동안 숨어있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묻혀있던 문제가 봇물처럼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정부와 기업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소송을 펼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근거를 대라!” 김학순 할머니에 이어 다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도 용기를 내어 나섰지만, 일본 우익은 ‘위안부는 없었다, 근거를 대라!’며 거침없이 공격했습니다. 일본정부도 ‘그런 것을 입증하는 기록이 없다’며 부정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록은 모두 자기들이 가지고 있고 오랫동안 은폐하고 있으면서 피해자에게 물증이 없으니 인정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피해사실을
‘위안부 할머니들이 두 눈 뜨고 살아 계시는 데도 이렇게 일본 정부가 발뺌하는데 다 돌아가시고 나면 할머니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울지도 모를 일이다. 강제동원 피해자들도 마찬가지다. 확실하게 피해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찾아야 한다. 피해자들이 돌아가시면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고 24년이 지난 지금 서글프게도 이희자 할머니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전상사(戰傷死)” 달랑 세 글자로 확인한 아버지의 죽음 이희자 할머니는 아버지의 기록을 처음 발견했을 때를 떠올리며 분노와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유족회 활동을 하며 드나들던 사무실 한켠에 <피징용사망자연명부>라는 서류철이 꽂혀 있었답니다.
문서를 한 장 한 장 넘겨보다 아버지의 일본식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이원사연(李原思連). 그 때는 아버지의 창씨명을 몰랐지만 자료에 적혀있는 본적지 주소를 보고 아버지 이름인 줄 알아챘습니다.
그리고 ‘사망구분’에 쓰여있는 세 글자 ‘전상사(戰傷死)’, 장소도 중국 광서성 전현 180병참병원인 것을 보면 전투중 입은 상처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사망일이 ‘1945.6.11’이라고 되어 있으니 해방되기 불과 2달 앞둔 때였습니다. 명부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한 이희자 할머니는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자신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도대체 군속으로 끌려갔던 아버지는 왜 중국 광서성까지 갔고, 게다가 비전투요원이었는데 어떻게 하다 전투중에 부상을 입어 사망한 것일까요.
▲ 처음 확인한 아버지의 기록 ‘피징용사망자연명부’
암호 같은 숫자,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시 그로부터 5년 후 이희자 할머니는 아버지에 대한 두 번째 기록을 찾았습니다. <유수명부>라는 자료에도 아버지 ‘이사현’은 1945년 6월 11일 사망했다고 써 있었습니다. 더 간단한 기록이었지만 이번에는 암호해독이 좀 필요했습니다. 암호 같은 숫자 ‘공(供)42524’. 도무지 알 수 없는 ‘합사제(合祀濟)’라는 표시가 있었습니다. 일제시기에 일본군이 작성한 문서니 누구도 그 정확한 내용과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암호해독을 도와준 사람은 강제동원 피해자 재판지원활동을 해온 일본인 변호사와 일본 시민운동가, 재일동표였습니다.
‘공42542’라는 숫자는 공탁금 등록번호였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전쟁터로 끌려갔거나 군수공장에서 혹사당했으면서도 대부분 급여를 받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일본은 전쟁이 끝난 후에 이 돈을 당사자에게 통지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공탁시켜 버렸습니다. 이희자 할머니도 일본 후생노동성에 조회해서 아버지 명의로 공탁된 미불금 1,480엔을 확인했습니다. 아버지의 피 값이 아직도 일본 정부 금고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합사제(合祀濟)라는 건 도대체 무슨 표시일까’ 의문을 품고 있던 이희자 할머니에게 일본분이 ‘이희자씨 아버지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되어 있네요’라고 처음으로 알려주었습니다. “‘합사’의 뜻을 알고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합사? 그게 무슨 말이지?’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었던 할머니는 그 속뜻을 듣고 그만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울분에 하얗게 밤을 지샜다고 합니다. 일본이 ‘조선인’ 군인·군속 희생자들을 일본의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전쟁신으로 야스쿠니에 함께 모시고 있다는 의미를 이해하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A급 전범들과 함께 말이지요. 왜 이렇게 일본은 피해자에게 비인도적이고 야만적인 폭력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요. 그 사실을 일본정부에 캐묻기 위해 2001년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수백명이 원고로 참여한 재판을 대대적으로 제기했습니다. 2급문서로 감춰져 있던 명부 2003년에는 아버지 죽음의 진실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는 자료를 추가로 발견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던 <병적전시명부(兵籍戰時名簿)>는 당시 2급문서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족들에게조차 색인목록만 제시될 뿐 열람조차 허락되지 않아 끊임없이 공개를 요구하고 항의했습니다. 그 결과, 2003년 3월 31일자로 본인과 가족에게 열람이 허용되었습니다. “자료가 이미 국내에
수차례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인들에게 도움을 청해 여러 기록들을 찾았지만, 이런 자료가 국내에 이미 들어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고 합니다. 기록을 찾은 기쁜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강제동원 피해자를 얼마나 하찮게 대했는지 또 한 번 절망감을 느꼈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 강화를 떠나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장 상세한 기록을 담은 ‘병적전시명부’ 병적전시명부 – 이력 1944년 2월 15일 징용령에 의해 치중병(병참부대) 제49연대에 응징. 같은 날, 특설 건축근무제101중대에 편입
<병적전시명부>에는 강화도 고향집을 떠나 사망하기까지 날짜별로 아버지 이사현 씨의 행적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기록을 찾아나선지 14년 만에 이희자 할머니는 생전 가본 적도 없고, 가야할 이유도 없던 곳에서 총상을 입어 죽어가던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13개월 갓난아이로 헤어졌던 때로부터 헤아리면 무려 60년 만이었습니다.
끝나지 않는 기록 찾기의 여정 이희자 할머니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합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아버지 죽음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 개인이 이런 자료를 찾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입니다. 아무 기록도 찾지 못한 유족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입니다. ‘행방불명’된 가족을 찾기 위해 유족들은 여전히 안타까운 방황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왜 피해자들은 아직도 기록을 찾아 헤매야 할까 (2012년 2월 20일 일본 참의원회관) 이희자 : 저희가 1년 전부터 우편저금 조사신청을 하고 있는데 왜 지금까지 아무런 회신도 해주지 않는 거죠? 금융청 관계자 : 우편저금 관련 명부에는 국적표시가 없습니다. 일본인, 대만인의 통장 기록이 함께 섞여 있기 때문에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총무성 관계자 : 이름만 가지고서 한국인이라는 것을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조사에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희자 : 지금 핑계를 대면서 기록 확인을 안 해주려는 것 같은데 군사우편저금은 대부분 군인이나 군속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것입니다. ‘유수명부’를 보면 본적이 나와 있습니다. 명부와 계좌주를 대조하면 금방 찾을 수 있지 않습니까? 김민철 : 일본정부가 보관하고 있는 통장을 본인이나 유족에게 반환해야 합니다. 통장 정보를 한국정부에 제공해주십시오. 필요하다면 저희가 기록을 대조하겠습니다. 통장은 금융정보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유족들에게는 소중한 유품입니다. 강제동원 피해를 확인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록’입니다. 일본정부나 기업을 상대로 재판을 할 때도, 한국의 정부기관에서 피해자 심사를 할 때도 ‘기록’을 근거로 ‘피해자’라는 것을 확인합니다. 주로 ‘명부’로 되어 있는 이 기록들은 대부분 일본 정부나 군부대에서 생산한 것입니다. 노동자로 징용당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도 기업에서 만든 사원명부 같은 것이 있을 텐데 지금까지 극히 일부만 공개되었습니다. “일본이 남긴 기록을 한국에게 증명하라고 요구” 1965년에 한일청구권협정을 맺을 때에도 일본 정부는 14년간 협상을 지속하면서 이런 기록이 있다는 것을 숨겼습니다. 한국 정부가 ‘전쟁으로 인한 피징용자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때도 일본 정부는 적반하장으로 ‘한국 정부가 피징용자의 규모나 피해사실을 증명하라’고 요구했습니다.
▲ 2012.2.20 유죠은행 담당자와 우편저금문제 협의 이러한 일본정부의 자세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2년에 일본 국회의원의 도움을 받아 이희자 할머니는 일본 정부 기관의 담당자들을 만났습니다. 도저히 기록을 찾을 수 없었던 유족들은 마지막 방법으로 희생자들의 우편저금 통장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우편저금은 끌려간 사람의 월급 일부를 강제로 저축시킨 것이기 때문에 관련 기록을 통해 피해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정부의 관계자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기록을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망각의 늪, 진실의 기록 지금은 ‘국가기록원’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제공하고 있는 ‘일제 강점기 피해자 명부’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면 이름과 본적지 등을 입력해서 자료가 있는지 확인하고, 종이문서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이 데이터베이스는 1971년과 1990년대 초반 몇 차례에 걸쳐 일본정부가 한국외무부를 통해 전달한 명부로 만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노력과 비용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것이지만 이 곳에서 자료를 확인하지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피해자들은 오늘도 일본 시민운동가의 도움을 받아 일본의 여러 국가기관에 기록을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는 서신을 보내고 있는 실정입니다. 해방 70년을 맞으면서 왜 아직도 우리는 식민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하는 무거운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식민지 조선에 태어난 운명 때문에 ‘역사의 희생자’가 되어버린 분들의 기록을 찾을 때까지 우리는 진실의 기록 조사를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내어 놓지 않은 자료를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일본정부가 내어 놓지 않는 자료를 마냥 기다릴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입을 빌어 피해 사실을 기록하고 그것을 근거로 ‘가해자’들에게 책임을 물으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상으로 피해자들의 마지막 증언을 기록하고자 하는 이유입니다. <필자 : 김승은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자료실장> ▲아버지의 사망사실을 52년만에 알게 된 권수청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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