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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전라도]광주의 부끄러운 상징 노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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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주봉은 1900년 여름에 태어나서 1945년 여름에 광주에서 사망했다. 본명은 노주현이고, 창씨개명은 `豊川守弘’이고, 태생은 전라남도 나주읍이며, 원적은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이다.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 경찰시험에 합격해 1927년 전라남도 경찰부 보안과 순사부장으로 승진했다. 1929년 1차 광주학생운동 사건, 1932년 전남노농협의회 사건, 1934년의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1942년 2차 광주학생운동 사건 등 수많은 학생운동과 독립운동 관련자들을 고문하고 탄압했다.

 

 

학생운동·독립운동자 잔인하게 고문

 

 

노주봉은 팔과 다리에 철봉을 끼워 주리를 틀고, 불에 달군 쇠꼬챙이 몸을 지지고, 고춧가루 물을 코에 퍼붓는 악랄한 고문을 자행했다. 일제의 경찰들도 혀를 내두룰 정도 잔인하게 고문했고, 대다수가 석방이 되어서도 반신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노주봉은 학생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을 가장 악랄하게 고문·취조해 사건을 조작, 그 공적을 쌓아 경시 계급에 승진했다.

 

해방 직전 조선 총독부 경시청에는 2만6677명의 일제 경찰관들이 있었고 조선인은 1만 명 정도였다. 지금의 치안감에 해당되는 `도경찰부장’은 조선인으로 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유일하게 윤종화 한 명 뿐이다. 지금의 총경에 해당되는 `경시’에 조선인은 21명 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경시였던 해방이 되자 미 군정청으로부터 전봉덕은 육군헌병사령관으로, 이익흥은 내무장관으로, 윤우경은 치안국장으로, 노덕술은 수도청 수사과장으로 승진했다. 또한 악질 노주봉은 전남 경찰부장으로 승진했다.

 

노주봉은 해방이 되자 일제가 물러나가 일제 식민지 지배의 주구 노릇을 하던 친일경찰들과 매국관료들은 모두 도피했다. 그러나 미군정에 의해 노주봉은 친일파에서 친미파가 되어 다시 전라남도 경찰청 경찰부장으로 임명됐다. 노주봉은 친일경찰의 경험과 인맥을 바탕으로 친일경찰을 다시 등용해 건국준비위원회를 분쇄하고 탄압했다. 노주봉은 그의 친일 행적에 불만을 가진 김영일·정판국·김이현 등 3명에게 1945년 10월 암살됐다.

해방되자 경찰 복귀…암살 당해

 

 

`조선인 경찰관들은 주로 민중과 직접 접촉하는 말단들이었다. 따라서 원성을 많이 사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과 동시에 조선인 경찰관들은 거의가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맞아죽는 이들도 생겼다.’ 월간조선 2005년 8월호의 내용이다. 노주봉을 암살했던 김영일은 살인범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암살됐다. 정판국은 살인혐의로 구속되어 석방됐고, 김이현은 도피해 체포되어 석방됐다.

 

노주봉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를 받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선정한 친일인명사전의 명단에 포함됐고,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 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됐다. 하지만 노주봉을 비롯한 친일파의 후손들은 아직도 권력의 핵심에서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서일환<광주우리들병원 행정원장>

<2015-03-20> 광주드림

☞기사원문: [역사 속 전라도]광주의 부끄러운 상징 노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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