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 사루후쓰촌(猿拂村) 아사지노(淺茅野) 공동묘지 옛터.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골 발굴 현장에 부는 바람이 차갑습니다. 한국에서 온 지옥동 할아버지가 희생자의 유골이 서서히 드러나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닷새간의 발굴 작업을 마무리하던 때였습니다.
강제노동의 끝에 이역의 땅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유골의 주인공이 척추 뼈 한 마디를 세상에 내보이며 고국에서 온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온 것입니다.
ㅣ
60여년 만에 세상에 드러난 희생자의 척추뼈
오호츠크 바다를 향해 뻗어 있는 아사지노 비행장은 일본 최북단의 땅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1200m와 1400m의 목판 활주로를 갖춘 비행장을 건설했습니다.
“조선에서 끌려와
비행장 만들었던 젊은이들”
이 비행장을 만든 사람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온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가혹한 강제노동과 굶주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모두 89명의 조선인들이 이 곳에서 희생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와 홋카이도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간 조선의 젊은이들은 해방이 된 뒤에도 아무도 찾지 않는 자작나무 숲 아래에서 60여년이 넘는 세월을 잠들어 있었습니다.
지옥동 할아버지도 10대 후반의 나이에 이 곳에 끌려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 온 청년이 여든을 넘긴 노인이 되어 강제노동의 땅 홋카이도에 다시 선 것입니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지옥동 할아버지는 징용으로 이 곳까지 왔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 채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下?)에 닿았습니다. 그 곳에서 다시 일주일 동안 기차를 타고 일본열도를 횡단하여 혹한의 땅 홋카이도의 최북단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 현장까지 끌려 온 것입니다.
지금은 기차가 다니지 않아 선로도 없어진 허허벌판에 흔적만 남아 있는 나무로 된 플랫폼만이 이곳이 기차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60여 년 만에 다시 그 땅을 찾아온 할아버지는 이 곳에서 내려 ‘함바(飯場, 공사현장의 집단 숙소)까지 걸어갔다고 당시를 회상하였습니다.
ㅣ당시 아사지노 기차역의 플랫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계속된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어느 날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쓰러져 갔습니다. 지옥동 할아버지도 병에 걸려 쓰러져 몇날 며칠을 잤는지 모릅니다. 너무 추워 눈을 떠 보니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과 함께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으로 분류되어 시체보관소로 보내진 것입니다.
1970년대부터 일본인·재일동포들이 만든 시민단체가 홋카이도에서 강제노동의 역사를 조사하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2006년부터 이 민간단체와 한국의 시민들이 힘을 모아 홋카이도에서 강제노동 희생자의 유골을 발굴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의 젊은이들을 끌고와 노동을 강요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 정부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정부의 요구에 따라 군사시설을 건설한 일본의 기업에게도 그 책임이 있습니다. 고향에서 희생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에게 사망사실을 알려주고 유골이라도 돌려보내는 일은 일본정부와 기업이 마땅히 했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일본 정부와 기업은 어떠한 책임 있는 행동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7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는 고향의 가족들을 그리며 이역의 차디찬 땅 속에 묻혀 있었습니다.
2006년부터 시작한 유골 발굴의 후속작업으로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할아버지들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옥동 할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처음 할아버지와 만났을 때 “단노구미(丹野組)” 라는 말이 바로 할아버지 입에서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60여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당시에 비행장 건설을 맡았던 회사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사지노에서 이러한 유해 발굴을 하고 있으니 함께 가서 당시의 이야기를 증언해 줄 것을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조사 기간 동안 또 다른 몇 분의 할아버지들을 더 찾아갔지만 일본까지 갈 수 있는 분들은 없었습니다. 병들고 쇠약해져 먼 길을 나설 수가 없거나 그렇게 고생한 땅에 다시는 가기 싫다며 진저리를 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럴 돈이 어디 있느냐며 비용을 걱정하시기에 비용은 주최 쪽에서 다 부담하니 걱정 마시라고 하자 그 돈이 있으면 지금 살기 힘드니 달라고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강제동원의 경험은 지금까지도 이 분들의 삶에서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상처로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분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현실을 절실히 느끼기도 한 여정이었습니다.
“삶에서 다시는 기억하기
싫은 상처로 남아있다”
ㅣ홋카이도 현장에서 발굴되는 유해를 지켜보는 지옥동 할아버지
아사지노 비행장을 찾은 지옥동 할아버지는 당시 비행장이 있던 철길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았습니다. 어려운 걸음을 선뜻 나선 할아버지에게는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죽기 전에 이 땅에 꼭 다시 와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전염병에 걸려 할아버지 자신도 죽다가 살아남았지만, 병에 걸려 끝내 죽어간 두 사람의 희생자를 철길 옆 어딘가에 당신이 묻었다는 것입니다. 함께 고생하다가 죽어간 동료들을 꼭 찾고 싶다는 바람이 할아버지를 이 곳까지 이끈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ㅣ
몸이 구겨진 채로 매장된 희생자의 유골
“빨리 고향에 데리고 가!”
흙 속에 몸이 거꾸로 구겨진 채로 묻혀 있던 희생자의 처참한 모습이 드러나자 할아버지도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제대로 만들어진 관속에 넣어진 것도 유품이 함께 묻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구덩이에 몸이 구겨진 채로 묻힌 유골의 모습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생생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보아달라는 무언의 외침 앞에서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ㅣ
아시지노 공동묘지 옛터에서 발굴된 다수의 희생자 유골
“누군가의 아들, 남편이며
아버지였을 희생자들”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실시된 아사지노 비행장 희생자들에 대한 유골 발굴 작업으로 희생자의 유골 30~40구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차가운 땅 속에서 조심스럽게 발굴되어 납골함에 담겨진 희생자들의 유골은 추도식을 치른 뒤 근처 절에 모셔졌습니다. 누군가의 아들이며, 남편이며, 아버지였을 희생자들을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이 어딘가에는 있을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 강제동원으로 끌려간 자식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며 매일 기차역으로 자식을 맞으러 나갔다는 아버지들과 고향집으로 돌아올 자식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늘 대문을 열어두고 살았다는 어머니들도 이제는 모두 돌아가셨을 만큼 긴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지옥동 할아버지에게 강제노동을 시킨 기업 ‘단노구미’는 지금도 이 지역에서 굴지의 건설업체로 건재하고 있습니다.
현재 회사의 사장은 어린 시절 아사지노 비행장 근처에 있던 별장에서 놀았다고 합니다. 당신네 회사가 강제노동을 시킨 사람이 이 곳에 오니 찾아와서 사죄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발굴 주최 단체의 요구에 사장은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며 결국 얼굴도 내밀지 않았습니다.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자신들의 마을에서 있었던 강제노동의 역사를 마주하고자 발굴 작업에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고 함께 했던 마을 사람들은 강제동원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를 세우려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하지만 2013년 12월 제막식을 며칠 앞두고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우익들의 협박으로 이 추모비는 지금까지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녹색 목초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강제노동의 땅에는 “비행장 앞”이라고 적힌 버스정류장 간판만 덩그러니 서 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시대 역사의 증인 가운데 한 분인 지옥동 할아버지도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십니다.
ㅣ”비행장 앞”이라고 적힌 버스정류장 간판
해방이 된 지 70년이 지났지만 일본 땅에 강제로 끌려간 희생자의 유골이 얼마나 묻혀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일본전국에 흩어져 있는 사찰의 납골당에 임시로 보관된 채로 아직까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유골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침략전쟁에 군인이나 군속으로 끌려가 죽은 뒤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희생자들의 유골도 뉴기니, 필리핀, 시베리아, 중국 등 일본이 침략한 모든 지역의 땅 속에 그대로 묻혀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해마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이들 지역에서 전사자들의 유골을 수습해 오고 있습니다. 2015년도 한 해 일본정부의 ‘전물자 유골수집 귀환’에 관한 예산은 ‘164억 9천만원’입니다.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아베 정권은 전사자들의 유골 귀환 사업을 위해 새로운 법까지 만들어 힘을 기울이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발굴하는 전사자의 유골 가운데에는 당시에 일본군으로 끌려간 조선인 희생자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정부가 발굴한 전사자들의 유해를 조사하여 한국의 유족에게 돌려준 적은 없습니다.
“발굴한 유골을 일본인으로
취급하여 함께 화장”
일본정부는 발굴한 유골을 일본인으로 취급하여 일본인 사망자들과 함께 화장하고 무명전사자의 유골을 모아두는 치도리가후치전몰자묘원(千鳥ヶ淵戰淺者墓苑)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2014년 4월, 자신의 가족이 일본군으로 끌려가 희생당한 한국의 유족들은 일본 정부가 실시하고 있는 전사자 유골 발굴 사업에 자신들도 정식으로 참여시켜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매년 일본정부가 발굴하는 유골 가운데에는 당연히 자기 가족의 유골도 포함될 수 있기 때문에 일본인 유족에게 실시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인 유족의 DNA를 발굴된 유골과 대조하여 확인해 줄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유골 수집 귀환 사업은 일본국 정부가 실시하는 사업이므로, 외국인에 대해서는 해당국 정부가 실시하는 사업에 참가하는 것이 기본이라 생각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사실상 한국인 유족의 참여를 거부하고 한국 정부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 것입니다.
식민지에서 제국의 ‘황군’으로 억울하게 끌려가 죽어간 조선인들은 해방 70년이 지난 오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유골이 되어서도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달아 높이나 올라 이역의 산하 제국을 비추올 때
식민 징용의 청춘 굶주려 노동에 뼈 녹아 잠 못들고
아리 아리랑, 고향의 부모 나 돌아오기만 기다려
달아 높이나 올라 오늘 죽어 나간 영혼들을 세라
달아 높이나 올라 삭풍에 떠는 내 밤을 비추올 때
무덤도 없이 버려진 넋들 제국의 하늘 떠도는데
아리 아리랑 두고온 새 각시 병든 몸 통곡도 못 듣고
달아 높이나 올라 내 넋이라도 고향 마당에 뿌려라
아리 아리랑 버려진 넋들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달아 훤히나 비춰 슬픈 영혼들 이름이나 찾자
고향엘 들러야 저승길 간단다
달아 높이곰 올라라
달아 높이곰 올라라
“징용자 아리랑 – 달아, 높이곰…” – 정태춘
해방 70년, 식민지 조선에서 끌려가 유골조차 찾지 못한 강제동원 희생자의 유족들은 70년의 세월을 피붙이의 유골 한 조각이라도 찾겠다며 기다려야 했습니다.
무덤도 없이 버려져 떠돌고 있는 넋들, 고향에 들리지 못해 저승길로 가지 못한 넋들이 당신에게 묻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해방되었습니까?”
글 |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팀장
- 59281479.jpg (25.68 K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