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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환·전명운의거 107주년’ (上)1908년 美신문 스티븐스저격 대서특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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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호 선착장 앞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 고문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를 전명운 의사(25)와 장인환 의사(33)가 저격했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사진은 1면기사. 2015.03.20. <사진=샌프란시스코콜 DB> robin@newsis.com 2015-03-21


‘샌프란시스코 콜’ 1면부터 3면 도배 현장 그래픽까지 소개 눈길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인 최초의 ‘의혈 투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쓰러진 미국인은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 부상당한 동양인은 전명운(田明雲) 의사(25), 총을 쏜 동양인은 장인환(張仁煥) 의사(33)였다. 긴급 후송된 스티븐스는 치료를 받다가 이틀 후 총탄 제거 수술을 받다 숨졌다.


당시 대한제국 고문이었던 스티븐스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모종의 밀명을 받고 미국에 들어온 지 사흘만에 저격당한 사건은 커다란 파장 속에 국권 회복을 염원하는 한국인들의 피를 끓게 했고 이듬해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으로 이어졌다.


장인환·전명운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 월요일자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저격 다음날인 3월24일자는 1면부터 3면까지 이 사건 기사로 도배할만큼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1856년 창간한 샌프란시스코 콜은 당시 16면 발행이었고 한 부 가격은 5센트였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호 선착장 앞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 고문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를 전명운 의사(25)와 장인환 의사(33)가 저격했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2015.03.20. <사진=샌프란시스코콜 DB> robin@newsis.com 2015-03-21

스티븐스 저격 사건은 해외 거주 한인 최초의 의거였고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고 잔혹한 압정을 펼친 일본과 이를 방조 묵인한 미국에 대한 강력한 경고 메시지였다. 그때까지 미국 국민들은 코리아를 은둔의 미개국으로, 일본의 보호가 불가피한 나라로 인식했다.


특히 스티븐스는 대한제국 황실로부터 거액의 봉급을 받으며 한반도를 병탄에 빠뜨린 일본의 앞잡이로 활동하며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사실을 호도하고 있었다. 그가 3월20일 미국에 돌아온 것도 일본의 한반도 수탈을 정당화하고 이로 인해 조선 내 미국 기업가들의 손실이 발생한 것을 조율해 달라는 이토의 부탁 때문이었다.


스티븐스가 태평양을 건너오면서 일본 선박 니혼마루(日本丸)에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항구적인 동양 평화를 위하여 코리아는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 아래 편입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떠들었고 3월20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후 기자회견을 열어 “코리아에서 새 정부가 조직된 후로 정치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일본을 반대하지만 지방 농민 등 대부분 사람들은 정부의 학대를 받지 않아 모두 일본인을 환영한다”고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3월21일 토요일 신문이 나오자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은 격분을 금치 못했다. 다음은 3월23일 샌프란시스코 콜에 ‘Slurs on Korea End In Fight(코리아 비방 싸움으로 끝나다)’의 기사.


“코리아의 고문인 D. W. 스티븐스와 어젯밤(22일) 페어몬트 호텔로 온 다섯 명의 코리안 사이의 논쟁은 결국 난투극으로 끝났다. 페어몬트 호텔 로비에 놓여 있던 의자들은 공격하고 방어하는 무기로 돌변했다. 일본인들이 코리아를 지배하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은 스티븐스의 친일본 정서에 반대했다…다섯 명 중 세 명은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남성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중년 남성이었다..영어가 유창한 청년이 스티븐스에게 다가가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이중 한 명이 토요일자 신문에 실린 스티븐스의 인터뷰 “일본은 지금 미국이 필리핀에서 필리핀인을 위해서 한 것과 같은 일을 코리아에서 코리안을 위해서 하고 있다. 주어진 상황이 다소 다르기에 상황에 맞추기 위해서 방법을 수정할 뿐이다”라는 내용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느냐, 일본인이 코리안들을 학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알고 싶다고 묻자, 스티븐스는 “그런 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 순간, 중년의 코리안이 스티븐스를 쓰러뜨렸다. 머리를 바닥에 부딪친 스티븐스는 즉시 일어났지만 앞쪽에 있는 남자가 내리친 의자에 오른쪽 턱을 맞고 쓰러졌다..곧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스티븐스는 이마가 찢어지고,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다쳤다. 스티븐스가 코리안들이 호텔에서 물러나는 것에 만족했기 때문에 체포된 사람은 없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호 선착장 앞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 고문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를 전명운 의사(25)와 장인환 의사(33)가 저격했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2015.03.20. <사진=샌프란시스코콜 DB> robin@newsis.com 2015-03-21


이날 폭행사건의 배경은 23일 스티븐스가 저격당한 이튿날인 3월24일 신문에 상세히 소개됐다. ‘Shooting of Stevens Caused by Conspiracy Which Holy War Manifesto Inspired(스티븐스 저격은 성전 선언에 따른 공모에 의해 유발)’이라는 제목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코리안의 공모는 “성스러운 전쟁에 신명을 바쳐 모든 일본인들을 근절하라”는 ‘의병(Righteous Army) 선언’에 따른 것이다. ‘의병 선언’을 미국에서 처음 받은 사람은 미국의 코리안연합회 회장이자 ‘유나이티드 코리안(the United Korean)’의 편집자인 정재관(C. K. Chung)으로 총회를 소집해 스티븐스의 인터뷰 내용을 알렸고 이 중 코리안 5명은 코리아의 친구로 와서 코리안을 잔인한 적의 마수에 넘긴 스티븐스로부터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신성한 행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이들이 스티븐스에게 한번의 기회를 주기로 한 대목이다. “스티븐스가 목숨을 건질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스티븐스에게 인터뷰 내용을 철회하거나, 그런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할 기회를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 콜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호텔로 찾아갔을 때 스티븐스는 우리를 우롱하고, 돼지 취급했다. 우리는 모두 애국자들이다. 호텔로 찾아갔을 때 스티븐스를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좀 더 단단한 무기를 갖고 갔을 것이다. 의자는 너무 가벼웠다. 우리는 스티븐스를 공격한 뒤 체포당하기를 원했다”고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저격 이튿날 샌프란시스코 콜은 1면부터 3면까지 10개가 넘는 심층 취재기사들을 게재했다. 특히 1면엔 ‘코리안 공모자들의 저격으로 스티븐스 중태(Shot Down by Korean Conspirators Diplomat Stevens is at point of Death)’라는 톱기사와 함께 사건이 발생한 페리호 선착장에서 저격 과정과 이동 경로를 상세하게 그림으로 소개했다. 상단엔 스티븐스의 사진이, 하단엔 전명운 의사의 정면 얼굴과 장인환 의사의 측면 얼굴을 겹친 독특한 편집으로 눈길을 끌었다.

【뉴욕=뉴시스】노창현 특파원 = 1908년 3월23일 오전 9시30분 샌프란시스코 페리호 선착장 앞에서 세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대한제국 고문으로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56)를 전명운 의사(25)와 장인환 의사(33)가 저격했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을 비롯한 세계 주요 매체에 타전됐다. 특히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은 깜짝 놀랄정도로 많은 분량의 속보를 이어갔다. 유력지 샌프란시스코 콜은 3월23일부터 25일까지 사흘 연속 대서특필이었다. 사진은 2면기사 2015.03.20. <사진=샌프란시스코콜 DB> robin@newsis.com 2015-03-21


2면엔 전날의 폭행 사건과 저격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사진을 싣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콜은 시종 ‘애국자들(Patriots)’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들의 행위가 사적인 범행이 아니라 조국을 위한 애국적 응징이라는 것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다섯 명이 한꺼번에 나온 사진은 코리안연합회장 정재관을 비롯, 오창호(Au Chang Ho), 임춘기(Im Choon Ki), 송북천(Song Buk Chun), 이정래(Yi Chung Lai)이고 저격 자들을 체포한 J. M. 맥그래스와 에드워드 오웬스의 사진을 실었다. 이와 함께 장인환 의사이 것으로 보이는 한글 진술서도 게재했다.

“코리안들의 억눌린 일본의 지배에 대한 혁명의 불길은 어제 아침 페리 선착장에서 전명운(M. W. Chun)과 장인환(In Whan Chang), 두 코리안 애국자가 미국의 외교관이자 코리아 정부 고문인 더램 화이트 스티븐스를 암살하기 위해 저격하면서 활활 타올랐다. 코리안들은 스티븐스가 고종 황제로부터 국권을 탈취한 조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일본의 잔학 행위와 폭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스티븐스는 페어몬트 호텔 버스에서 내렸다. 오클랜드에서 애틀랜틱시티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의 옆에는 배웅나온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총영사 고이케 조조(Chozo Koike)가 있었다. 전날 밤 페어몬트 호텔에서 성난 코리안 다섯 명에게 공격을 당했지만 스티븐스는 자신의 운명에 지나치게 무심해서 경호원도 없었고 총을 소지하지도 않은 채 나타났다. 스티븐스가 자신의 가방 위로 몸을 굽힐 때 장인환이 리볼버 권총을 손수건에 감싼 채 달려왔다. 방아쇠를 당겼지만 손수건이 막혀 리볼버가 작동되지 않았다. 스티븐스가 놀라서 쳐다보자 장인환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어 리볼버로 얼굴을 세차게 후려치고 달아났다. 스티븐스 얼굴에서 피가 솟구쳤다. 스티븐스가 공격한 자를 추격하려 대여섯 걸음을 내디딜 때 두 번째 공범인 전명운(M. W. Chun)이 방아쇠를 당겼다. 첫 번째 총알은 스티븐스의 등에 박히는 대신 달아나는 장인환의 어깨에 맞았다. 스티븐스가 등을 돌리기 전에 전명운의 리볼버가 연속 두 번 스티븐스(Stevens)를 쏘았고, 땅에 쓰러졌다..”


샌프란시스코 콜은 이날 기사에서 장인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를 착각한 듯 두사람을 바꿔 묘사했다. 리볼버가 격발하지 않은 것은 전명운 의사였고 스티븐스를 명중시킨 것은 장인환 의사였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모의한 적도 없고 이전에 만난 적이 없는 사이였다는 사실이다.


스티븐스의 터무니없는 인터뷰에 분노한 두 의사가 각기 수집한 정보로 스티븐스 암살을 노렸고 결국 그로 인해 첫 시도가 실패한 후에도 2차 시도로 저격에 성공할 수 있었다.


robin@newsis.com

<2015-03-23> 뉴시스

☞기사원문: ‘장인환·전명운의거 107주년’ (上)1908년 美신문 스티븐스저격 대서특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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