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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펀딩] 5화. 누가 이 청년을 전범으로 만들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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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분주한 일생이었다. 26년간 거의 꿈속에서 지내왔다. 불꽃처럼 사라져버렸다. 이 짧은 일생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전혀 자신을 잊고 있었다. 모방과 허무함의 연속, 왜 좀 더 살지 못했는가. 비록 어리석고 불행한 삶일지라도 나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더라면 좋을 것을..

친구여. 형제여. 자신만의 지혜와 사상을 가지시오. 지금, 나는 자신의 죽음을 앞에 하고, 내 것이라곤 거의 없음에 실망해 있다. 다시 한 번, 고향 생각을 해 보지만, 잘 정리되지 않는다. 아니, 부모님과의 끈이 점점 끊어져가고 있는 듯하다.

 인생, 최상 최대의 고난이다. 이 방을 나갈 때까지다. 그것도 이제 거의 끝나고, 그리 얼마 남지 않았다. 자, 힘내자. 9시를 알리는 타종, 느긋하게 유유히 종이 울린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누님, 아우야, 행복하기를 바란다. 1번 열차 출발! 장하다. 장하다. 나도 그렇게 하리라. 앞으로 2, 3분이다. 나도 저렇게 만세를 외치리라. 왔다. 때가 된 것 같다. 이것으로 이 기록을 마치려 한다. 세상이여, 행복 있으라.”


1947년 2월 25일.

싱가포르의 창이형무소에서 생의 마지막 아침을 맞은 조문상은 밤새 써내려온 유서의 마지막을 이제 막 끝냈다. 곧이어 철창문이 열렸다. 동료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사형수방인 p홀의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걸음, 한걸음, 죽음의 문턱으로 가는 길은 그리 길지 않았다.

연합군 포로를 학대했다는 이유로 전범이 되어 교수대에 선 조문상. 개성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 청년. 그는 왜 전범이 되어 젊은 날의 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l 포로감시원 조문상, 전범용의자로 체포되었을 당시 모습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를 생각할 때마다 가끔씩 조문상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빡빡 깎은 머리, 뚜렷한 이목구비, 허름한 죄수복 속에도 가려지지 않는 지적인 눈매, 옅은 미소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엄격한 인상. 이 얼굴 어디에서도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를 찾아보긴 어렵다. 그렇기에 사진과 함께 그의 유서는 더 애처롭고 가슴 아프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 그 짧은 생을 제대로 정리조차 하지 못한 채 원망과 저주보다는 회한만 가득 남긴 채 그는 왜 그곳에서 그런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됐을까.

어떤 운명이 그로 하여금 비극적인 결말을 갖게 만들도록 했는가. 그가 죽음으로써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 하기엔 그 무게가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결정을 내린 사람들은 그가 진 무게만큼의 책임을 졌던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다시 또 묻는다. 왜 그는 그런 선택을 했던가. 인생의 허무함. 우연한 선택이 가져온 파멸적인 결과.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던 행위가 타인에게는 끔찍한 고통을 안겨줬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었을까.

피해자이면서도 가해자라는 멍에를 져야 했던 조선인 BC급 전범들.

“누가 그들을
전범으로 몰아넣었는가”

빗나간 선택

1942년 5월 어느 날,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의 17살 난 청년 이학래는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전날 면장이 불러 간 자리에서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참에 남방에 포로감시원 모집 있으니까 자네 갔다 오소.”

웃음 띤 말은 권유라기보다는 반 협박에 가까웠다.

청년은 아버지와 상의해보겠다는 말로 급히 자리를 떴다. 그러나 아버지라고 해도 별 수가 없었다. 태평양전쟁이 터진 뒤부터 면과 주재소에서 사람이 나오면 동네 청년들이 지원병이다 징용이다 해서 하나 둘 씩 사라지고 없었다. 청년도 언젠가는 끌려갈 거라는 각오는 하고 있었다.

‘이런 시국에 어차피 집에 있을 수 없으니까 2년 무사히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청년은 생각했다.

얼마전 그는 소사로 일하던 우편국에서 우편저금 사고가 나 그 책임을 지고 40원을 물어냈다. 석달치 월급을 배상했으니, 겨우 몇 마지기 소작 부쳐 먹는 집안 살림에 큰 타격을 줬다. 직장도 잃고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인데 ‘월급 50원’이라는 선전도 귀를 솔깃하게 했다.

‘어차피 끌려갈 건데 포로 감시라면 죽을 위험도 덜하고 월급도 많이 준다고 하지 않은가.’

청년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그 순간이 청년의 삶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음달 6월 13일, 이학래와 포로감시원을 지원한 일행들은 부산의 서면에 위치한 임시군속교육대, 일명 부대장의 이름을 딴 ‘노구치(野口) 부대’에 입소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끊임없는 욕설과 구타, 마주보고 빰 때리기, 그리고 혹독한 군사훈련이었다. 2개월간의 훈련 과정에서 포로에 대해 배운 것은 제네바조약이 아니라 포로를 동물처럼 다루고 한시도 놀려서는 안 된다는 교육이었다.

1945년 12월 4일 조문상이 방쾅형무소에서 미국 인도-버만 주둔군 본부 전쟁범죄분과의 심문을 받으면서 진술한 내용을 들어보자.

“부산에 있는 훈련소에 있던 교관 중 한 명은 우리들에게 포로들은 동물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포로들이 우리를 무시하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잔인해졌으며, 그들이 우리보다 크기 때문에 그들을 때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포로들보다 우월하게 보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력, 협박, 구타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포로들을 때리고 잔인하게 다뤄야 하는 지침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저는 제가 잘못되었고, 우리에게 처해질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아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군사문화는 포로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가하는 것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포로들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용소 군속과 일본군에게 경례를 해야 했으며, 심지어 장군에게 밥을 나르게 명령하여 모욕을 가했다. 그리고 포로들에게 벌을 가할 때도 서로 마주보고 뺨을 때리도록 해 수치심과 죄책감을 유발시키는 짓을 강요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야만적인 짓이 1970년대까지도 한국의 학교 현장에서 자주 벌어졌다. 청산해야 할 식민 문화가 교육 현장에서 버젓이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실행된 것이다.

아무튼 조문상의 진술처럼 포로를 동물과 같이 대우하도록 명령함에 따라 연합군 포로들은 최소한의 인격조차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분노한 연합군의 전범재판

1945년 10월부터 1951년 4월까지 동남아시아 49곳에서 미국을 비롯한 7개국이 주도한 BC급 전범재판이 열렸다. 전범재판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나라는 호주였다.

호주 정부는 도쿄재판에서 일본 천황을 전범으로 불러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비록 미국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전범에 대해서는 강경했다. 호주 군사법정에 선 BC급 전범들이 가혹할 정도로 과중한 판결을 받았다는 평가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호주 정부는 전범에 대해
왜 그렇게 강한 태도를 취했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작동했다. 하나는 1942년 8월 25일 일본군 육전대가 뉴기니 동쪽 끝 미른만에 상륙해서 9월 6일 물러날 때까지 호주군과 주민들을 상대로 무차별 학살과 강간, 심지어 인육식까지 저지른 일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잔인함과 야만성에 질겁한 호주 정부는 그 궁극적인 책임을 천황에게 물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른 하나는 일본군에 잡힌 포로들이 중노동과 질병, 학대, 고문, 구타, 처형 등으로 대규모 사망한 사실이었다. 나치에 붙잡힌 영미 포로의 사망률이 4%에 미치지 못한 데 비해 일본군에 잡힌 연합군 포로는 그 사망률은 27%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사망자의 대다수는 태국과 미얀마를 연결하는 태면철도(泰緬鐵道) 건설에 강제동원되어 죽은 포로들이었다.

1942년 6월 7일 일본 대본영은 남방군에게 태면철도 건설을 명령하여 연합군 포로 약 5만5천명과 동남아시아 노동자 7만여 명을 동원하여 7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414km의 철도를 놓았다.

이 공사는 산악과 밀림을 관통하는 난공사로 6~7년이 걸리는 사업이었으나 일본군은 이를 1/5로 기간을 단축시켰고, 준 것이라곤 포로와 노동자의 육체, 그리고 삽 한 자루뿐이었다. 식량과 약품도 제대로 보급되지 못하는 열대의 정글에서 연합군 포로 5만5천명 가운데 1만3천명이 이 공사에서 죽어간 것이다.

공사를 앞당기기 위해 아픈 포로들까지 공사에 동원되었다. 굶주림과 사고, 구타, 그리고 죽음으로 직결되기 십상인 말라리아와 이질 등이 포로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 현장의 최말단에 바로 조선인과 대만인 포로감시원들이 있었다.

호주 육군사령부는 이 참상을 보고 “버마에서 일본군의 목적은 전쟁포로와 쿨리(노동자)를 동원해 최대한 빨리 철도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얻기 위해 일본군은 전쟁포로의 삶과 고통을 고려하지 않은 냉정하고 믿기 힘들 정도의 잔혹성을 드러냈다. 철도에서 많은 포로들에게 영향을 미친 유일한 요소는 작업에 관한 정해진 일정이었다.”고 평가하면서 포로의 사망을 범죄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본인(그리고 특히 조선인) 군속과 기술자(철도대)들은 잔혹하고 야만적이었다. 따귀와 구타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고 강조하였다.

전쟁포로가 되어 철로건설에 동원된 윌리엄스 중령이 호주전쟁범죄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한 내용은 이렇다.

ㅣ당신 부하 884명 중에 200명 이상이 그 시기에 철로공사 때 죽었습니다. 당신은 이 손실을 막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그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호주를 떠날 때 완벽한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고, 포로로 잡히기 전까지 완벽한 건강을 즐겼습니다. 그 손실은 적당한 음식과 의료서비스, 그리고 동물이 아닌 인간다운 대접으로 예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ㅣ당신과 당신의 군의관들은 손실을 막고자 힘썼습니까?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더 나은 음식과 보급물을 요구하고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전혀 효과가 없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우리 부대가 공병부대이고 그들은 자바에 오기 전에 시리아에서 도로작업을 실제로 해봤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시리아에서 근무했고 그 작업은 고된 육체노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철로공사 때 그들은 파리 목숨처럼 죽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힘든 일을 했지만, 그보다도 일본군에게 당한 소름끼치는 강박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포로학대의 심각성을 확인한 호주 정부는 자국의 모든 전쟁포로에게 [FORM Q-전쟁포로에 의해 제출된 전쟁범죄정보]를 제출하도록 했다. 포로들에게서 제출받은 이 진술서를 토대로 전범 혐의자를 조사했고, 혐의에 오른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당사자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사진을 보고 용의자를 확인하거나 찾는 과정에서 ‘구비짓깬(首實檢)’이 진행되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방콕에 조선인들이 모여 있는데, 어느 날 군인들이 우리들을 모이라는 거야. 그래서 한 오십 명 정도가 모였는데, 모두 포로감시원 출신이야.

인자 쭉 우리들을 연합군 포로들 사이로 일률적으로 걸어가게 해. 걸어가다 헌병이 좀 나오라는 거야. 캄온 캄온 손가락으로 이러코롬 하거든. 그것이 즉 전범 용의자 체포 순간이라.”

이 몇 초의 순간이 이학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호주군은 [FORM Q]를 기초로 추가 진술서를 작성하여 용의자를 기소했으며, 이 자료는 군사법정에서 변호사들이 불확실한 기억에 근거한 진술이기 때문에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는 반론을 거부하고 모두 증거물로 채택되는 효력을 갖고 있었다. 포로들의 추가 확인도 없이 이 진술서 하나가 포로감시원의 생사를 결정하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이학래가 포로를 학대했다고 증언한 9명 중 단 한명도 이학래의 사형을 결정하는 재판정에 증인으로 나오지 않았다. 포로들의 분노가 그만큼 컸기 때문에 증언을 확인할 필요까지 없었다고 확신한 것일까. 그러기엔 너무 편의적인 결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사형수 방-P홀, 태면철도 철도대 중위였던 아베 히로시의 그림

죽음의 문턱을 오가다

연합군들에 의해 전범으로 지목받은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사실상 제대로 된 반론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148명이 기소되어 23명이 사형, 125명이 무기 또는 유기징역에 처해졌다.

이학래는 1947년 3월 18~2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호주 군사법정에 포로학대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검찰측은 수용소 캠프에 입소한 800여 명의 호주 포로 중 100명이 죽었으며 그 책임이 수용소의 책임자인 이학래에게 있다고 단언하였다.

이학래는 변호사에게 항변 자료를 주었고 검찰측 주장을 모두 부정하였다. 특히 자신이 수용소 책임자가 아니라고 항변했으며, 수용소장 이시이 중좌의 증언을 요청하기도 했다.

재판 과정에서 다퉜던 중요한 쟁점 중 하나는 포로감시원의 지위와 역할이었다. 검찰은 이학래가 작업의 세부항목을 책임지는 행정관리로서 캠프 지휘관의 지위에 있었으며 “피고인이 공식적으로 캠프 지휘관의 자리에 있었는지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지만, 그의 강한 개성 탓으로 그가 그 지위를 강탈하고 실제적으로 캠프를 운영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사는 그는 단지 군속일 뿐 캠프를 지휘할 권한이 없었으며, “약품 공급, 식량 배급, 포로의 숙영 및 포로의 복지와 직접 관련된 다른 직무들은 본질적으로 그의 직무 범위를 벗어난 것”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변호사는 이학래가 ‘희생양’이라 생각하며 “캠프의 다른 멤버들을 체포할 수 없었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피고인이 재판을 받게 된 것은 아닌가”라는 주장까지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학래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교수형을 선고했다.

이학래는 조문상과 함께 창이형무소의 사형수방(p홀)에 있었다. 동료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그도 마지막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런데 사형선고 후 2개월이 지났는데도 사형집행 날짜가 잡히지 않는 것 아닌가.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더 커져갔다.

그해 10월 24일. W. M. 앤더슨 법무총감(소장)이 이학래의 사형을 20년 징역형으로 변경하고, 11월 7일 징역형을 확정하였다. 사형에서 징역형으로 감형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학래가 수용소 책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법무총감의 청원에 따르면, 과거 이학래가 같은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OCI 호주법률분과에서 무죄석방한 사실이 있어 이에 대한 추가조사가 필요하며 “다른 사건과 비교해 볼 때, 이 사건은 특별히 나쁜 사안이 아니다.”고 판단하여 징역형을 ‘강력히 요구’한 것이다.

이학래가 단지 군속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수용소 캠프를 지휘?감독하고 있었다고 믿은 재판부의 판단이 뒤늦게나마 잘못되었음을 인정함으로써 그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포로들에게는 학대를 명령하고 지시한 책임자와 구조보다는 직접 눈앞에 있는 감시원들이 일차적인 원망의 대상이었다. 게다가 인간의 자존심을 하찮게 여기는 일본식 군사문화에 대한 반발감과 언어상의 장애로 인한 오해 등이 그 원한을 더 크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언어상의 장벽으로 감시원과 포로들 사이에 오해가 일어나 사태를 심각한 지경으로까지 몰고 간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줌모사건’이 그 예다.

1943년 여름, 버마 80킬로(KM)수용소에 포로로 있던 미 육군 V.P. 줌모(Zummo)가 조선인 포로감시원과 미국산 모직양말과 설탕을 교환하는 문제로 상의하는 과정에서 말을 잘못 알아들어 집단폭행으로 발전한 사건이 일어났다.

줌모는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 호의적인 감정으로 “당신은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다, 만약 내가 포로가 아니고 우리가 예전처럼 자유로웠다면 당신이 내게 보여줬던 것을 내가 당신을 위해 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선인 포로감시원은 이를 ‘내가 자유의 몸이 되면 당신은 포로가 될 것이고, 당신이 내게 해 준 일을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이해했다.

호의적인 말이 ‘당신이 포로가 되면’이라는 말로 해석되어 수용소가 발칵 뒤집어졌다. 줌모는 곧장 사무실로 불려갔고, 군조와 한 명의 장교, 여섯 명의 조선인 감시원들로부터 몽둥이와 총검으로 심하게 맞았다.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대부분 기소되어 실형을 살게 되었다. 이 현장에 조문상도 있었다. 그러나 심문과정에서 그는 ‘단지 보고만 있었지 구타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항변했으나 그 항변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51년 일본 스가모형무소로 이송되기 직전 아우트램 형무소의 전범들

버림받은 조선인 ‘황군들’

재판에서 판결이 확정된 BC급 전범 대부분은 이후 일본 스가모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52년 4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발효되어 조선인 전범들은 한때 기대를 가졌다.

평화조약에서 일본인 전범자의 형집행을 지속하도록 규정했지만 한국인과 대만인은 예외로 하였다. 조선인 전범들의 국적이 더 이상 일본이 아니었다.

따라서 일본정부에 석방을 요구했으나, 일본의 최고재판소(대법원)는 구금 당시에는 일본국민이었기 때문에 나머지 형기를 마쳐야 한다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행히 가석방된 조선인 전범들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어 아무런 생활 지원을 받지 못해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가석방 상태라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으며, 의지할 기반이 전혀 없는 일본에서 온갖 차별을 받으며 막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생활고와 삶에 대한 비관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도 생겼다.

“일본 정부는 거짓말을 했다”

한일 회담을 추진하던 과정에서 한국 외교 담당자가 ‘한국인 BC급 전범자를 협의 대상에 포함시키자’고 요구하자 일본 외무성 담당자는 ‘별도로 논의하자’ 하며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런데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난 뒤에는 돌변했다.

‘일본인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대우를 하라’고 요구하는 조선인 전범 출신의 피해자들에게 “한일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딴청을 피웠다. 한국 정부가 협의하자고 요청할 때는 별도로 논의하자고 해놓고 뒤에 와서는 한일협정으로 완전히 해결되었다고 한 입에 두말을 한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해결했다는 것인가. 협의하지 않기로 해결했다는 말인가.



l 1심 판결 직후, ‘부당판결’ 소식을 전하고 있다.(1996.9.9, 배소 촬영)

재일 한국인 전범자와 유족들은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일본 정부와 싸우기 위해서 동진회(同進會)를 결성했다. 일본 내각이 바뀔 때마다 국가책임을 묻는 청원서를 내고 기나긴 법적 투쟁을 벌였다.

형을 집행할 때는 ‘일본 국민’이기 때문이라 하면서, 형무소를 나서는 순간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하는 일본정부의 이 이중적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일본 사법부도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받아 한일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쑥스러웠던지 법이 없어 구제를 못하니 일본 정부와 의회가 법을 만들어 해결하라는 단서는 붙였다.

그러나 한일협정이 체결된 지 50년 지난 지금도 일본정부와 의회는 문제 해결을 거부하고 있다.

“징용해서 써먹어놓고
필요 없어지니 다 쓴 걸레처럼”

나는 연합국에게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다. 포로가 혹독하게 당한 것은 사실이고,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판이 형편없었다 해도, 연합국에게 불평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일본 정부다. 자신들을 징용해서 써먹어놓고 필요가 없어지니 다 쓴 걸레처럼 버리고 모른 척 하니, 그건 아니다. 인간다운 말 한 마디라도 왜 걸어주지 않는가.”

17살 때 징용당한 이학래씨의 나이는 지금 89살이다. 50년 전 일본 정부에게 던졌던 이 질문에 아직도 답변은 없다.

l 한국인BC급 전범과 시베리아억류자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기자회견(2005.11.9)


글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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