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에 갔다 왔다. 태화산의 기운과 봄날의 공기, 바람, 햇살이 모두 좋다. ‘춘마곡추갑사(春麻谷秋甲寺)’라는 말이 있듯이 봄날 마곡사 운치가 제법이다. 투명한 녹색의 새싹들이 가시처럼 박혀 있는 모습이 그저 경이롭다. 꽃을 보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노란 산수유만으로도 부족함이 없다. 마곡사 대광보전 앞에서 강세황의 필세를 유심히 보다가 그 옆에 자리한 작은 건물에 들렀다.
김구 선생이 머물던 곳인 백범당이다. 개화기와 일제 사이의 만 3년을 민족의 영원한 사표인 백범 김구가 입산하여 그의 청년시대의 은신처로 삼았던 곳이 이곳 마곡사다.
그는 하은의 상좌가 되어 입산한 그 다음날 득도식을 마치고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고 머리를 깎았다. 1898년 그의 나이 23세 때 일이다. 그는 1년간의 출가생활을 끝내고 환속하였다.
오늘날 그가 거처했던 곳은 문이 굳게 잠겼고 다만 벽면에 사진 몇 장과 그의 글이 액자로 걸려 있다. 한쪽 벽면에는 사진을 복사해서 흡사 동상처럼 기대어놓았다. 그 형색이 조악하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김구 선생의 동상은 1969년에 김경승에 의해 제작된 것이 최초의 것이다. 김경승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돌아온 이로 전형적인 구상조각, 이른바 아카데미즘에 충실한 작가였다. 그러나 그는 대표적인 친일 미술인이기도 하다. 그런 이가 김구 선생의 동상을 제작했다는 사실이 너무 아이러니하다. 결코 반성을 모르고 부끄러움을 잊고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우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생각된다.
1936년 8월에 제7대 총독으로 미나미 지로가 경성에 부임했다. 만주사변을 거친 후 중일전쟁과 향후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상황 속에서 그는 내선일체와 황민화정책을 추진했으며 철저한 사상통제를 실시했다. 그에 따라 신사참배와 황지요배(아침마다 천황이 사는 동쪽을 향해서 절을 올리는 의식) 및 일장기 게양 독려와 기미가요 제창,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이 잇따랐다. 조선어말살과 창씨개명이 줄을 이었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많은 예술인들 역시 각종 시국강연회에 동원되었고 전선을 방문하여 전쟁문학을 쓰고 전쟁화를 그렸다.
주요한은 당시 전선에서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성전의 용사되기를 맹세하고 있다”고 써 보냈다. 대다수 미술인들도 멸사봉공의 국방국가체제 구축을 위한 그림을 그리거나 국민총력전람회 등에 동원되었다.
전쟁을 미화하는 여러 미술행사들도 줄을 이었다. 경성미술가협회 회원 150여명은 “국가의 비상시국에 직면하여 신체제 아래서 일억일심으로 직역봉공하여야 할 이때, 미술가 일동도 궐기하여 서로 단결을 굳게 하고 조선총력연맹에 협력하여 직역봉공을 다하자”라고 주장했다. 고희동, 김기창, 김은호, 김인승, 김경승, 박득순, 배운성, 배렴, 손응성, 심형구, 윤희순, 이봉상, 이상범, 이승만, 이종우, 이한복, 장발, 장우성, 정현웅, 허건 등 많은 작가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이들은 해방과 분단을 거친 후 남한 미술계의 주도적 인사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들에게서 배운 후학들은 현재 한국현대미술계의 어른들이 되었다.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가 얼마 전 ‘우당의 나라 만들기’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고 한다. 정치하기 가장 쉬운 게 과거를 들추어내서 비난하는 것이라면서 이는 ‘과거 포퓰리즘’이라고 했단다. 반면 우남(이승만 전 대통령)은 그렇게 과거를 들추어내는 대신 미래를 지향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게 바로 반민특위에 반대한 것이었단다. 반민특위를 결정할 때 무조건 친일분자 청산으로 나가서는 안된다고 국회 안에서 제동을 걸었는데 그것이 우남의 미래지향적인 사고였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반민특위가 무산된 결과 김경승 같은 친일미술인들이 기념동상사업을 따내 김구 선생 동상을 만들 수 있었다. 이게 문창극씨의 논리에 의하면 무척이나 미래지향적인 일이 된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2015-04-01> 경향신문
☞기사원문: [문화와 삶]봄날 마곡사와 김구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