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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원인 외인론인가, 내인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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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1) 분단체제


▲ ‘계급갈등의 화약고’ 한반도
미국·소련 간 냉전으로 ‘점화’

전범 미처리… 극우·극좌 공존

1945년 한국인들은 큰 희망을 얻었지만,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점령으로 불안 속에서 해방의 큰 걸음을 시작해야 했다. 왜 한국이 분할점령됐어야 했는가? 해방은 그런 억울함 속에서 시작되었고, 그 억울함은 70년이라는 독립의 나이와 함께 또 다른 숙명이 되었다. 분단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논쟁의 중심에 있다.


지난 70년간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분단되었는가’와 ‘어떻게 분단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였다. 그렇기에 1980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해방전후사의 인식> 시리즈나, 그로부터 27년이 흐른 2007년 그에 대응해 출간된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은 큰 파문을 던졌다. 해방 전후의 많은 사건들을 분석하고, 논의하는 것은 한반도 분단의 원인을 찾기 위한 작업이었다. 70년 동안 진행된 분단에 관한 연구는 크게 외인론(外因論)과 내인론(內因論)으로 나뉘었다. 분단의 원인이 미국과 소련의 정책,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체제의 형성이었는가, 아니면 국내 정치세력 사이에서의 갈등과 분열이었는가가 핵심 논의사항이었다.


▲1945년 9월2일 도쿄만에 정박한 미 군함 미주리호에서 우메즈 요시지로 일본군 참모총장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 분단논쟁, 1980년대 이후 답보


분단을 둘러싼 논쟁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통해 심화됐다. 식민지 시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한반도에서의 지주와 소작인 간의 계급적 갈등은 해방 후의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오기 전에도 이미 한반도는 ‘점화만 하면 폭발할 화약통’이었다는 것이다. 이후 분단에 대한 연구는 주로 내적 요인에 집중되었고, <남로당 연구>나 서중석의 연구는 국내에서 나온 내인론의 역작이었다. 이를 전후해 찬반탁 논쟁,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 등에 대한 연구성과가 쏟아져 나왔다. 또 금기시되었던 1946년 가을의 소위 9월 총파업과 추수폭동, 4·3 항쟁이 활자화돼 나오기 시작했다.


역설적이게도 <한국전쟁의 기원>이 분단 내인론을 위한 연구를 촉발시켰지만, 정작 커밍스는 외인론에 기반을 둔 연구자였다. 그는 세계체제론에 기반을 둬 연구를 진행했다. 세계 중심부의 냉전 상황이 한반도에 내재화하였다는 주장이다. 한반도 내부 상황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미 군정의 통치정책은 그 혁명적 힘을 주저앉혔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1945년 이후 동북아시아의 재편은 그 이전 일본 제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심부와 주변부의 관계가 미국을 중심으로 부활하는 과정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분단 외인론은 한국의 모든 역사교과서에서 공통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정반대 입장에 서 있는 수정주의와 뉴라이트에서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 본질적인 책임의 당사자가 미국인지, 아니면 소련인지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 미·소 간의 냉전이 한반도에 내재화되면서 분단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물론 평가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수정주의는 분단국가 수립에 기여한 미국과 국내 보수세력을 비판하는 반면, 뉴라이트는 냉전이 내재화되는 것은 ‘필연적’ 과정이었기 때문에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좌우합작운동이나 남북협상과 같은 정치인들의 노력은 무의미하거나 좌익의 전술에 이용당했을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내인론과 외인론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다. 일부에서는 내인론과 외인론을 복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두 원인이 실제로 어떻게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중 어떠한 측면이 더 결정적으로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은 결여돼 있다.


분단의 원인에 대한 연구는 먼저 비교사적 연구로부터 그 문제의식을 바꾸어야 한다. 전범국이 분할점령된 유럽과는 달리 왜 아시아에서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분단되었는가? 일본의 패망 이후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국가들은 바로 독립을 얻지 못했던 반면 유독 왜 한국만 곧바로 독립이 되었는가?


한국의 독립은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을 통해서 처음 제기됐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미국은 일국을 분할점령하는 유럽 방식과는 달리 제국을 분할함으로써 일본의 힘을 약화시키는 방식을 아시아에서 추구했다. 한국의 독립과 대만이 중국으로 복귀한 것은 그것을 의미했다. 소련이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아시아의 상황은 미국이 소련의 참전을 요구하면서 급변했다. 미국은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스탈린에게 참전을 요구했다. 스탈린은 만주에 대한 이권을 노리면서 일본이 항복하기 일주일 전 참전을 결정했다. 참전하자마자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의 북부로 진격했다. 일본의 관동군은 예상과 달리 급격하게 무너졌다. 미국으로서는 소련의 진격을 막아야 했고, 이것이 일반명령 1호로 합의되었다. 한반도보다는 만주와 홋카이도 점령에 더 관심이 있었던 소련은 38선에서 진군을 멈추는 데 합의했다. 한반도의 분할점령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던 미국과 조금이라도 더 이권을 얻어내고자 했던 소련의 잔머리가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던 것이다.


■ 전범 처리지역엔 극우세력 없어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분단의 시점 문제이다. 1945년의 분할점령을 곧 분단으로 보아야 하는가? ‘일반명령 1호’에 따라 미·소에 의한 분할점령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임시적인 조치였다. 일반명령에서는 다른 지역에서의 분할, 특히 중국·만주와 인도차이나 지역(16도선)의 분할을 규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지역들이 모두 분단된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만 아직까지 분단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데 대한 원인을 분석해야 한다. 이는 분단의 원인과 해법을 동시에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단을 극복한 다른 나라에서 외적 요인이 중요하게 작동했다면,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한국에서는 분명 외적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한반도에서 작동하고 있다. 남북갈등뿐만 아니라 남남갈등조차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전쟁범죄자들이 제대로 처리되었던 지역과 그러지 못했던 지역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범들이 처리된 지역에는 극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극우가 없으면 극좌도 공존이 불가능하다. 좌와 우, 중도만이 있다. 그러나 전범이 부활한 지역에서는 극우와 극좌가 적대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진정한 좌우나 중도가 힘을 얻기 어려운 구도다.

중국의 존재도 한국의 분단 문제를 고찰하는 데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미관계와는 달리 완벽한 공조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북·중관계 역시 분단 문제 고찰의 핵심적 내용이다.

지금도 한반도의 분단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적인 역학관계는 내부와 외부의 요인들이 서로 결합하고 있기에 70년 전과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에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연구와 논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 선언문 속 ‘한국 명시’ 왜…

일본 점령지 ‘원상 복귀’ 의미는…

카이로 회담 재평가 필요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총리(왼쪽부터)는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카이로 선언’을 발표했다.


한국의 해방 및 분단과 관련해 카이로 회담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카이로 선언에 대해서는 ‘적절한 과정을 거쳐’에만 관심이 집중됐다. 그것이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인지, 또 38선은 언제 확정되었는지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첫째로 다른 나라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음에도, 한국은 길지 않은 선언문 속에 직접 언급되었다는 점, 둘째로 일본이 ‘탐욕’으로 차지한 영토에 대해서는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킨다는 점이었다.

한국에 대한 언급은 장개석이 한반도에서 자신과 가까운 임시정부가 주도하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의도와 관련이 있다. 또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식민지 시기에 계속해온 독립운동의 결과이기도 했다.

1945년의 시점에서 두 번째 내용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들의 미래를 규정했다. 원래의 위치로 복귀시킨다는 것은 독립이 아니라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들이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영국과 미국이 과거 식민지 지역으로 복귀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이 그들의 식민지를 유지했던 것과 같은 논리였다. 이로 인해 1945년 이후 한국을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는 옛 제국주의 국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또 다른 독립전쟁이 계속됐다. 베트남 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일본이 독일과 손을 잡지 않고 1차 세계대전처럼 영국과 손을 잡았다면 한국은 일본과의 독립전쟁을 다시 치러야만 했다.

박태균 | 서울대 교수·국사학

<2015-03-31> 경향신문

☞기사원문: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 김호기·박태균의 논쟁으로 읽는 70년]분단의 원인 외인론인가, 내인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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