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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범 누명 쓰고 10년간 억울한 옥살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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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제67주년… 피해자 양규석옹 인터뷰


▲양규석 할아버지가 4·3사건 이후 억울하게 대구형무소에서 10년 동안 감옥살이 한 때를 회상하며 말하고 있다.
ⓒ 신용철


일본의 패망과 함께 찾아온 조국광복. 하지만 온전한 통일이 아닌 한반도 38선 이남을 통치한 미군정 체제하에 불만을 가진 세력은 무장으로 봉기했다.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 그리고 그를 따르는 군정 관리들의 충돌 과정에서 이루 헤아리기 힘든 수많은 양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다.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로, 보도연맹 사건과 더불어 양민학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손꼽히는 ‘제주 4·3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시대는 어둡고 참혹했다.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세상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하거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양규석(93) 할아버지도 ‘무덤에서 살아나온 4·3수형자’들 가운데 ‘한 명의 증인’으로, 아직까지 질곡의 역사 속에서 살고 계시다.

양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인 15세 때부터 10여 년 동안 돈을 벌고자 매형이 운영하는 일본 오사카의 한 가구공장에서 일한 것을 제외하고는, 지금까지 줄곧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마을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서 여느 촌부들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추가할 기록은 10여 년을 육지 형무소에서 억울하게 징역살이 한 것이다. 1945년 해방을 사흘 앞두고 고향에 돌아온 양 할아버지는 4·3사건이 일어난 1948년 어느 늦은 봄 그의 아버지와 함께 지붕에 이을 새끼를 꼬고 있었다.


어이없는 연행… 억울한 방화범

▲ 양규석 할아버지가 당시 경찰로부터 고문 받은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 신용철


해방 전 면사무소에서 일하며 친일을 일삼다가 경찰이 되어 돌아온 마을 출신 한 경찰관은 이날 양 할아버지를 당시 안덕지서로 데려갔다.

“지서에 갔더니 중산간에 올라가거나 그들(남로당 무장대)을 돕지 않았냐고 물어보길래 그런 적 없다고 대답했어. 사촌동생 양하석(양하석은 양 할아버지가 형무소로 끌려간 뒤 1949년 5월 26일 토벌대에 발각돼 육지형무소로 보내졌다가 6·25때 행방불명됐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양 할아버지는 양하석이 서북청년단의 총살로 죽었다고 했다)이 어디 있는지 말하라고 하길래 친동생이 어디서 무얼하는지도 모르는데 사촌동생이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아냐고 대답했지. 그때부터 이 놈들이 자기 뜻대로 안 되니까 물고문·전기고문 등 여러 고문들을 다 하더라고. 정말 괴롭고 힘들었어.”


양 할아버지는 그 당시 20대 후반에 받은 혹독한 고문으로 이후 평생을 지팡이를 짚고 살며 모진 세월을 살아왔다. 당시 안덕지서에서는 그에게 엉뚱하게도 방화범이라는 누명을 씌웠다.

“그때 서북청년단들이 우리 마을에서 못된 짓을 참 많이 했어. 내가 잡혀 가기 전에 어느 집에서 불이 났었어. 그때 난 마침 의형제를 맺고 있었던 지인과 나무 위에 올라가 얼마만큼 불이 났는지 구경을 했단 말이지. 나중에 알고 보니 서북청년단이 집에 불을 놓은 건데, 글쎄 이 놈들이 그 죄를 나에게 뒤집어 씌우더라고.”


잠시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내내 격앙된 목소리로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양 할아버지의 눈가에 마른 눈물이 맺혔다. 시대가 한없이 흘렀지만 ‘청년 양규석’은 그 때 그 모습을 아프도록 간직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양 할아버지는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닌 채로 살아왔다. 아니 “형무소 형량을 다 채우고 나오자마자 집 밖에 생각이 안 났어. 죽어도 집에서 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라는 양 할아버지의 말처럼, 모진 생을 고향을 생각하며 ‘버텼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 듯싶다.

1948년 9월께 제주경찰서에서 광주형무소로 이송된 양 할아버지는 그해 12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포고령 제 2호 위반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대구형무소에서 상소포기



▲ 4·3사건이 발생하고 무고하게 경찰서로 끌려가 고된 고문을 받은 양규석 할아버지는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 신용철


이후 1949년에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양 할아버지는 무고한 자신을 증명하려 했으나 1950년 6·25일 이후 상소를 포기했다.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군법에 회부되면 5년 형이 10년이 될 수도 있고 10년형은 무기징역이 될 수도 있다는 충고 때문이었다. 마침 그가 머물던 방에 있던 형량 1년짜리 죄수가 재심을 받고 나서 20년을 받은 것을 보며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 형무소에서 수감자들 이름이 호명돼서 나가면 이후 그들을 볼 수 없었던 두려움도 상소를 포기하는 데 한 자리를 차지했다.

양 할아버지는 이후 같은 해 9월께 부산으로 이감되었다가 다시 12월께 대구형무소로 재이감되었다 1957년 출소했다. 그 사이 가족들은 양 할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알고 이미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며 억울한 징역살이 때문에 10대 후반 결혼했던 첫 부인과 파혼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양 할아버지에게 억울하게 징역살이 한 부분에 대해서 신원 복권과 함께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

“보상해 줄 리가 있겠어. 그 놈들이 죄명을 씌워 가지고 그랬는데. 얘기 할 필요도 없어. 내 혼자 가슴에 묻어 놓고 살 거라 생각했어. 이제 그런 말 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이제 다 살고 해 봤자 무슨 필요가 있나.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을 뿐. 징역 산 거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그런 저런 생각을 하면 못 살아. 과거지사를 다 생각하고 살면 하루도 살 의미가 없어. 이제는 자식과 손주들도 있고 하니까 가족들 보는 낙으로 사는 거지 뭐.”

여전히 4·3은 해결해야 할 난제들로 가득하다. 일부 보수단체들이 제기하고 있는 4·3 희생자 재심사에 대한 논란 때문에 올해 박근혜 대통령은 4·3 희생자 추념식 참석을 하지 않고 이완구 국무총리가 대신 참석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 신채호 선생의 사자후는 오늘날 여전히 우리에게 죽비소리 같은 울림으로 다가와 경종이 되고 있다. 후세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알려줘야 하는지 4·3 위령들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역일간지 <제주신문>에 실린 기사입니다.

<2015-04-03>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방화범 누명 쓰고 10년간 억울한 옥살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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