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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으로 본 현대사](26)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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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민청학련 현상금 ‘간첩의 7배’… 윤보선 전 대통령까지 법정에 세워


■ ‘맨 앞줄은 사형, 다음 줄은 무기…’


여러 피고인의 최후 진술 중에서도 여정남 피고인의 최후 진술이 특히 듣는 이의 마음에 걸렸다. 그는 인혁당이 ‘민청학련의 배후’라는 시나리오에 맞춘 연결고리로 기소된 처지였는데, 인혁당 관련자들의 처형을 예감이라도 했는지 절박한 표현으로 공소사실의 허구를 밝히느라 많은 말을 하다가 재판장의 제지를 받기도 했다.

“판결은 보나마나”라는 소리가 나돌았다. “맨 앞줄은 사형, 다음 줄은 무기, 그리고 세 번째 줄은….” 이런 식의 체념과 개탄에 맥이 빠진 채 판결의 날이 왔다. 7월13일에 열린 1심 선고공판은 일반의 불길한 예측을 ‘역시나’로 확인시켜 주었다. 앞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한 이철(서울대 사회학과 3년) 유인태(서울대 사회학과 졸업·목재상) 여정남(경북대 정외과 제적·무직) 김병곤(서울대 경제학과 4년) 라병식(서울대 국사학과 4년) 김영일(서울대 미학과 졸업·시인) 이현배(서울대 대학원 사학과 2년)는 구형대로 모두 사형이었다.

이어 정문화(서울대 외교학과 4년) 황인성(서울대 독문과 4년) 서중석(서울대 국사학과 4년) 안양노(서울대 정치학과 4년) 이근성(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무직) 김효순(서울대 정치학과 졸업·무직) 유근일(중앙일보 논설위원)은 각 무기징역, 정윤광(서울대 철학과 4년) 강구철(서울대 정치학과 3년) 이강철(경북대 정외과 졸업·무직) 정화영(경북대 정외과 4년) 임규영(경북대 사범대 사회학과 4년) 김영준(연세대 경제학과 4년) 송무호(연세대 경영학과 2년) 정상복(한국기독학생총연맹 간사) 이직형(한국기독학생총연맹 총무) 라상기(한국기독학생총연맹 이사) 서경석(서울대 기계공학과 졸업·무직) 이광일(한국신학대 1년·보병 제30사단 신병교육대)은 각 징역 20년, 구충서(단국대 사학과 1년) 김정길(전남대 상대 4년) 이강(전남대 법학과 4년) 윤한봉(전남대 축산과 4년) 김수길(성균관대 행정학과 3년) 안재웅(한국기독학생총연맹 간사)은 각 징역 15년, 판결은 이렇게 형벌의 해일(海溢)이자 광기의 발로 그 자체였다.


▲일러스트 | 박건웅

■ 공소사실을 그대로 베낀 ‘정찰제 판결’


판결문에 적힌 범죄사실은 공소장을 그대로 베낀 것이고 선고형량도 거의 구형 그대로여서, 나는 ‘정찰제 판결’이라고 공박했다. 그런데 이 말이 훗날 언론 등에서 자주 인용됨으로써 나는 자연스레 이 용어의 ‘저작권자’가 되었다.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그리고 나머지 18명의 징역 형기를 합치면 피고인 32명의 형기가 모두 240년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긴급조치 1호와 4호로 재판받은 사람 중 사형과 무기를 면한 유기징역을 선고받은 203명의 형기를 합산하면 2000년도 넘는다는 셈이 나온다고도 했다.


중정과 군 검찰의 조서는 잔인한 고문 등 가혹행위에 의해서 허위 조작된 것임이 피고인들의 폭로와 호소로 명백히 드러났다. 그 처절한 절규를 다 옮길 수는 없고, 그중의 한 예로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간사 정상복 피고인의 폭로를 요약해보기로 한다.


‘남산’(중정의 별칭)에 끌려가서 처음 며칠은 잠을 재우지 않더니, 그 다음엔 “너 이곳에서 싸늘한 시체로 나갈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협조를 할 것인지 잘 생각하라”고 하면서 “너 같은 놈 총으로 갈겨서, 정보부 습격하려는 놈인데 우리가 사살했다고 하고 철조망에 시체를 걸쳐놓고 찍은 사진과 함께 발표만 하면 끝이다”라고 했다.

고문의 첫 단계는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비틀면서 양 손가락 누르기, 그 다음엔 눕혀놓고 의자로 가슴을 누르거나 나무 방망이로 의자를 치기, 그래서 탈진상태에 빠졌는데도 전보다 더 잔혹한 물고문과 전기고문까지 당했다(정상복, <고문으로 조작된 KSCF운동>,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엮음, <1974년 4월-실록 민청학련>2, 학민사, 2004). 그러나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했다는 주장을 묵살했는가 하면, 군 검찰 측 증인을 피고인이나 변호인도 모르게 법무사가 비공개리에 일방적으로 신문하고 이를 유죄의 증거에 끼워넣었다.


■ 선언문 명의인 ‘민청학련’을 ‘가상 현실화’


중정에서 거창한 반국가단체처럼 발표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은 유인물상의 명의, 즉 가공적 명칭에 불과할 뿐 전혀 실재하는 조직이 아니었다. 학생 측도 ‘반국가단체 구성’이라는 공연한 트집을 피하기 위해서 조직체도 없고 명칭도 쓰지 않기로 했었다. 그런데, 1974년 4월3일자 ‘민중 민족 민주 선언’의 맨 끝에 발표 명의는 있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황인성이 임의로 적어넣은 이름이었다.


중정이 내건 엄청난 현상금만 보아도 유신정권의 조바심과 광기를 엿볼 수가 있었다. 당시 간첩 신고의 현상금이 통상 30만원 선이었는데, 민청학련 수배자에 대해서는 200만원이라고 현상 전단에 나붙었다.

어느 수배자는 그 점을 꼬집어 “어차피 잡힐 것이니까 아는 사람에게 신고하라고 해서 그 현상금의 절반만이라도 어려운 가정에 보탬이 되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유인태, <내가 겪은 민청학련사건>)


■ 전임 대통령도 ‘내란선동’으로 법정에


윤보선 전 대통령, 박형규 목사는 민청학련 활동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역시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에 서야 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에게서 나온 자금이 박형규 목사와 이우정 교수를 순차로 거쳐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공소장에는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선동, 민중 봉기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학생들에게 거사 자금을 주는 등 내란을 선동했다’는 거창한 혐의가 박혀 있었다. 그렇다고 전직 대통령까지 내란선동죄로 군법회의에 기소한 것은 놀라운 패착이었다.


윤보선은 법정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나이 77세 일생에 국가내란죄명으로 재판을 받게 되니 감회가 깊다. 나의 죄를 감해달라는 것보다는 학생들에게 공산당이란 죄목은 부당하니 벗겨주기를 부탁한다. 나를 사형장으로 끌고 가거나 풀어주는 것은 당신들 마음대로지만, 민주주의를 해야 된다는 내 소신을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


다음은 박형규 목사의 최후 진술. “저로 인해 법정에 서게 된 윤보선 전 대통령께 죄송하다. 이번 사건에 내가 학생들에게 자금 지원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만 뒤에 처져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참여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학생들보다 가볍지 않은 무거운 벌을 나에게 내려주기 바란다.”(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1)


박 목사는 이 사건으로 105일이나 수감되고도 풀려나지 못하고 15년형을 받았고,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아 온 윤 전 대통령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의 선고를 받았다. 존경받는 법조계 원로인 이병린·박세경 두 변호사가 윤 전 대통령을, 필자가 박 목사를 변호했는데 법정에 선 두 분의 모습과 말씀에 마음이 아팠다.


■ 파격적인 최후 진술, 희한한 항소 이유


연세대학교 김동길·김찬국 두 교수는 유신헌법 철폐 주장, 긴급조치 비방 외에 학생 데모를 교사 격려함으로써 내란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군사법정에 섰다. 김동길 교수는 제자들에게 ‘긴급조치로 박정희는 스스로 자신의 묘혈을 팠다’고 용기 있는 말을 했는가 하면, 파격적인 법정 최후 진술을 남겼다. 즉 “나는 석방을 원하지 않는다. 석방이 되더라도 나는 계속 유신에 반대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구속될 텐데, 그렇게 구속과 석방을 반복하는 것은 피차 번거로우니까 계속 감옥에서 조용히 살게 해달라”고 거침없는 기개를 과시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15년 선고를 받고 그날로 항소를 포기하여 유신재판을 냉소함으로써 또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목사이기도 한 김찬국 교수는 1심에서 징역 10년형을 받고 이에 불복 항소하였는데, 그 이유가 아주 남달랐다. 1심 변호인이 “피고인은 외국에 유학해서 서양식 민주주의밖에 몰라서 본건과 같은 행위를 한 것이니 관대한 처분을 바란다”고 변론한 데 실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보고 항소심에서 제대로 변론을 해달라고 했다.

말하자면, 판결 아닌 변호인의 변론에 불복 항소한 특이한 케이스였다. 나는 그의 소원대로 2심 법정에서 강경 일변도의 변론을 펼쳤다. 그런데 판결은 오히려 반으로 깎여서 징역 5년이 나왔다.


■ 서울대생과 KSCF가 큰 흐름의 표적

천주교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는 김영일(김지하)에게 학생들의 거사 활동자금을 주었다는 이유로 내란선동, 긴급조치 1호·4호 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로 기소되어 1심 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법정 진술과 미리 써놓은 ‘양심선언’에서 1인 장기 집권과 유신헌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 김영일에게 돈을 준 것은 민주 수호를 위한 학생운동의 기금이었지, 유혈 데모나 폭동을 일으키라고 준 것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이어 “나에 대한 내란선동 죄목은 억압받는 청년들에게 그리스도적 정의와 사랑의 운동을 하라고 돈을 준 데 대하여 붙인 조작된 죄목이다”라고 항변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긴급조치 4호에 걸린 (넓은 의미의) 민청학련 사건의 피고인들은 크게 보아 대학생들과 기독교 성직자들이 흐름을 잡고 있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180명 중 학생이 108명으로 단연 많았는데(그밖에는 소위 인혁당계 23명, 지식인 17명, 언론인 3명, 일본인 2명, 기타 종교인, 교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학별로는 서울대생이 40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서 전남대 14명, 서강대 11명, 연세대 10명, 경북대 8명 순이었다.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소속의 학생들이 많은 것은 학생과 기독교라는 두 세력의 접목 내지 접합적 동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었다.



<2015-04-05> 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6)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사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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